Life is

범진이 졸업식

2013. 2. 15. 13:57

졸업식

아들 범진이 초등교육 졸업식이다. 직장에는 연가를 내고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모여서 졸업식장으로 향했다. 

대전에서 5개구에 살아 보았다. 노은동, 반석동은 주거환경이 좋고 삶의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범진이가 다닌 반석초등학교는 아이들의 만족도도 높고 주위의 평이 좋다. 직장 동료들이 서구 둔산동에 있는 학교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찌그러진 아파트에 눌러 안아 있다. 

마을축제 같은 졸업식을 내심 기대해 보았는데, 진행이 서투르고 경직되어서 졸업식의 광경이 서늘했다. 사회자는 후덕해보이시는 인상의 여자분이었는데 딱딱함과 서늘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교육청에서 배포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졸업식을 진행하는 것 같았는데 개성도 없고 학교별로 졸업식이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을 것 같다. 획일화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육청인가 보다. 아이들의 동영상 인사, 형식적인 상장전달 등 감동은 전혀 없었다. 

졸업식의 압권은 동영상으로 등장한 김신호대전교육감이었는데, 피곤한 얼굴로 등장하여 의례적인 주어동사목적어를 나열하여 아이들에게 다가가는데 제대로 듣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과는 50년 차이가 날텐데 연세 드신분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교육감 양복이 목깃은 붕 떠있고 양복은 몸과 옷이 별도로 움직이는 유체이탈이었다. 

졸업식 진행은 수준이하였지만 졸업식을 대하는 아이들이 행동이 자연스럽다. 부러운 세대이자 불쌍한 세대이지만 우리의 미래이다. 그런데 아이들 장래희망(꿈)의 약 80%가 의사라고 써 있는데, 이런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범진이가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게 기여했으면 한다. 졸업 축하한다.



▲ 교장선생님이 졸업장을 주시고 있으신데 아이들이어서 악수는 없고 인사로 대신한다.


▲ 학부모총회상

▲ 90도로 인사한다.

▲ 지난 4년간 행복하게 살았던 반석동 5단지아파트, 건물이 영산 계룡산 자락을 가리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좋은 위치와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 반석초등학교


▲ 반석동 커피로드 초입

Life is

사진가 최민식

2013. 2. 13. 13:56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 사진가 최민식 선생이 작고하셨다는 기사가 나왔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213000134

최민식 선생은 인간을 촬영했다. 흔히 다큐멘타리 사진으로 알려진 그의 사진 속에서는 화려함이나 자연미학이 아닌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넝마를 걸친 아이, 시장아지매, 속옷차림의 노동자, 발가벗은 아이들의 웃음을 그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라 불렸고 한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던 사진가이고, 사회에서 소외된 우리 이웃들의 참 모습을 사랑한 사진작가가 바로 최민식이다. 50년이 넘도록 사진작업을 한 그는 "은퇴할 나이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흑백사진에 관심이 많던 80년대 후반에 이분 작품을 많이 참고? 했었다. 예전에 방송에 출연하셔서 어려운시절 왜관에 있는 수도원의 도움을 받으셨다고 한다. 생전에 한번 뵙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인생을 누빈 사람인데 이분이 그런분이겠다.

Bravo Goo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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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신이 들린 여자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13번 미츠코 우치다의 환상적인 연주를 들었다.

신들렸다.

모짜르트 스페셜리스트 그러나 니혼진이며 비호감 외모라는 한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유명한 피아노선생님도 잘 모르고 있어서 의외였지만 그녀의 연주에 집중해보면 좋은 소리로 보답한다.

미츠코의 연주는 과대 포장된 연주자들과 비교하면 과유불급이라 하겠다.


 

  

 




중악단

계룡산 3대 사찰인 신원사 경내에 있는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산신각이 중악단이다. 산신각이 사찰내에 있는 것은 불교에 녹아있는 토속신앙의 자연스러운 형태이기도 하고 구원과 기복의 구분보다는 삶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픈 인간다움의 표현일 수 있다.

계룡산 과 무속신앙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과거 전국에서 가장 무속인들이 많았던 곳이 계룡산이고 지금도 공주시 반포면에서 계룡면쪽으로는 곳곳에 신을 모신 굿당들을 볼 수 있다. 계룡산에서 야간산행을 하면 기를 받기위해 치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을 볼 수 있다. 영험한 신령이 약해지면 계룡산에서의 기를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전국 3곳의 신령한 명산에 산신각을 만들어 국가의 제를 지냈는데, 북쪽 묘향산에는 상악단, 나라의 중심이자 한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신도안 근처 계룡산자락에 중악단을 그리고 남쪽 명산 지리산에 하악단을 만들어 나라를 위한 제사를 산신에게 지냈던 것이다.

현재 북한에 있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은 조선시대에 멸실되었고, 계룡산 중악단은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중악단 내부 - 산신령이 위엄이 없다



신원사에 가보자

대전에서 공주쪽으로 가면 공암을 지나면서부터 계룡산이 보인다. 무속적인 뉘앙스가 있는 계룡산은 웅장하지도 호방하지도 않은, 볼수록 아름다운 갸냘픈 여성미를 보여주는 수려한 산이다. 계룡산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라는 유명한 삼대사찰이 있다. 지금은 도예촌으로 유명한 상신리에도 과거에는 고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이 없고 우리들 기억속에는 동학사와 갑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계룡산을 가려면 대부분 대전에서 공주방면으로 가다가 박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주차장이 있는 동학사방면으로 가는 게 일반적 여행코스이다. 주차장과 가까와서 접근성이 좋은 동학사는 처음본 사람은 황당할 정도로 계룡산과 어울리지 않는 멋없음에 실망을 하게 만든다. 6.25 전쟁때 절의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 원이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절의 부족한 품격에 대찰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동학사인지 모르고 절을 지나가곤 한다. 

멋없는 동학사이지만 청도 운문사, 김천 청암사와 함께 비구니를 교육하는 대표적인 강원이다.  


      ▲ 박정자를 검색하면 연극배우가 나온다. 박정자는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던 이 마을에 정자 나무가 많아서 유래되었다.

갑사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국어책의 수필 갑사가는 길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가 맺어준 인연의 남매의 전설이 있는 남매탑 이야기와 잘 버무려진 갑사의 추억은 갑사라는 임팩트가 강한 절 이름과 어울려져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가장 어울리는 절은 '신원사'라고 할 수 있다. 무속신앙, 울긋불긋하고 치렁치렁한 옷, 그리고 칼춤을 추는 무속인, 기복신앙 등과 잘 버무려진 계룡만의 이야기가 있는 절이라고 생각 된다.

계룡산에 오면 계룡의 이야기를 찾기보다는 동학사를 들러보고 식당에서 동동주를 걸치고 산으로 직행하는 운치없음보다는 잔걸음으로 신원사를 둘러보고 계룡산의 묘미를 읽어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그리고 중악단에서 그리 신통해보이지 않는 산신령께 한 마디 건내보는 즐거움도--





사 비 성 '

대전청사공무원연합(대공연)에서 2013년 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워크샵장소로 우리가 삼국시대로 알고있는 기원전부터 약 700년 까지의 우리 역사의 한 축이었던 백제의 마직막 수도 사비성(부여)을 찾았다. 

90년대 이후 세계질서가 신자유주의의 소유물이 된 이후, 승자독식이 당연한 질서이자 자본주의의 진리로 받아들여 지던 것이 오래된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보다 더 강한 승자독식의 룰이 적용되는 영역이 역사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 만의 현상은 아니다. 역사의 승자가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놓은 자의적이고 만용적인 신라중심의 역사관이 이어지면서 백제하면 떠오르는 삼천궁녀만 남기고 우리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렸고(삼천궁녀라니 얼마나 악의적인 외곡인가!), 당시에 신라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고구려는 분단 후에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

요즘 TV 역사물이 과거 조선왕조의 멜로적 드라마 구성에서 고구려나 북방의 강인한 전투와 정벌을 다루는 것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차치하고서라도 신라중심의 남쪽에 국한된 역사와 과거 우리가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유목민족의 후예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이 많아져서 시청률을 높일 수 있고 광고도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에 있는 문화재를 둘러보며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상당한 유물들은 흔히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작품들이다. 과거 신라와는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뛰어난 미술품이 옛 백제땅에서 발견될 때마다 백제의 미학을 논하지 않아도 백제멸망 후 상당한 문화적 유산과 자산이 신라로 전이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요즘도 이어지고 있는 '백제'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신라를 상대적으로 빛내주는 것은 분명 아니다. 통일신라(고구려는 어디로), 호국불교(인명을 살상하는), 화랑 등등으로 위장되어 버린 스스로 역사를 퇴보시키는 자학적 역사는 이제는 멈춰야 한다. 

수도권이 삼국시대에 백제의 땅이었고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백제의 성이었다. 서울을 근거지로 나라를 건국한 백제가 가장 강성한 시기는 한강 유역에서 세력을 떨칠 때였고 백제의 수도는 백제역사의 대부분 서울이었고 세력이 약해지면서 웅진, 사비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백제는 충청도나 전라도가 주축인 나라가 아닌 것이다. 영화흥행을 위하여 전라도 사투리로 버무린 짝퉁 백제의 모습이 대중에게 각인되었지만 백제는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이자 중국, 일본과 교료가 활발했던 국제적인 나라가 아니었던가! 지금의 서울 사람들은 자기들의 뿌리가 되는 나라를 유추해 본다면 백제...

우리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포함한 동만주땅을 방문하였다. 당시 돈 몇푼 들고 중국을 찾았던 분들이 '조상들의 땅을 되찾자고 하며 플랭카드들고 사진찍고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보도하고는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역풍을 맞고 있는 윈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나라의 극우언론에서 중국이 우리나라를 삼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과장되게 보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침소봉대한 면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서 현실을 무시한 감정적인 대응과 무지한 역사관 그리고 소영웅주의는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현명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만약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서울 광화문 구 총독부자리에서 일제강점기를 근거로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플랭카드 걸로 시위를 하거나 기념행사를 하면 우리가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현실적으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접근이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므로 백제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찾고 높이는 길은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고 일본문화의 선지자적 역활을 한 백제에 대한 역사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고 삼국의 교류에도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국가 백제

우리가 느끼는 백제에 대한 잔상은 강한 국력으로 힘을 과시한 나라이기 보다는 문화적 우월성, 석탑, 향로, 칠지도, 불교, 일본과의 교류 등 문화적 색채가 강한 나라인데, 당과 야합하여 고구려를 잃어버리고 남쪽만을 차지한 신라의 방조속에 3천 궁녀라는 터무니 없는 날조극을 덮어쓴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역사속에서 내려온 아쉬움이 있다.

충청남도에서 약 20년째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백제역사문화단지의 조성이다. 잊혀지고 무시되던 백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사업으로 백제역사문화단지는 총 100만평 규모를 자랑한다. 현재 역사단지중 사비성은 약 12만평이라고 하는데 지방자치단체에서 장기간(90년대 초부터 시작)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반드시 좋은 결실을 거두어 백제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중요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 2013년 2월 초에 방문한 사비성이다. 충청남도의 도움으로 문화해설사의 해설서비스를 받았다. 사전신청하면 ㄴ구나 좋은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사비성내로 들어오면 천정문이 보인다. 지금의 청와대가 되겠다. 지붕 가장 윗쪽 양 끝단의 치미가 인상적이다. 20년전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동대사(도다이지)에서 비슷한 모습의 치미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일본의 나라시는 우리나라 백제와 유사한 곳이다. 두 도시가 교류한다면 백제를 매개체로 한 좋은 상품겸 상생과 협력이 가능할 것 같다. 


 ▲ 백제왕이 사용하던 집무실 의자를 재현해 놓았다. 나무의자라서 허리건강에는 좋겠다. 뒤에 보이는 금색 봉황은 위엄이 보이지 않고 치킨집이 연상된다. 


 백제왕 부부의 복식을 고증해 놓았다. 왕족이나 귀족은 실크로 만든 의복을 입을 수 있었지만 가장 대중적인 의복재료인 면직물은 고려 말에 도입되었으니 당시에 가난한 백성들은 얼마나 춥고 궁핍했을까. 이분들이 이어온 역사가 지금의 대한민국. 


 ▲ 왕궁사찰인 능사를 재현했다. 사비성내의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전통적인 백제양식의 사찰은 목탑 1개, 대웅전 1개라고 한다.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능사(사찰)를 재연해 놓았다.목탑 1개와 대웅전 1개  전통적인 백제양식이라고 한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종교적 복종을 불렀고 불교를 통한 생과 사의 위탁은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의 안식처였을 것이다.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대 기복신앙의 종교와 비교해보면 솔직함이 있다 그리고 아름답다. 


대웅전이 화려하지 않다. 뼈가 앙상했던 싯달타가 화려한 대웅전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예수님도 여호와도 정체불명의 첨탑과 네온사인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는 교회건물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싯달타는 제자들에게 잔소리가 많으셨다고 한다. 자신의 가르침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못미더움과 대중에 대한 가르침을 위하여 불경이 남게 되고 현대 불교는 철학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웅장하여 신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기 보다는 거부감을 주는 사찰는 다르다. 이곳 능사의 대웅전은 세월의 깊이는 없지만 단순하고 소박하여 백제다운 맛이 있다.




 KBS 한국재발견 프로그램에서 사비성과 능사를 소개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종교적 복종과 경외심을 가져왔고 불교를 통한 생사의 위탁은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안식처였을 것이다. 물질의 부를 신의 축복으로 몰고가는 현대 기복신앙 종교와 비교해보면 솔직하고 순수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 아파트를 벗아나 살게 되면 작은 종을 달아보고 싶다. 바람이 치미면 울리는 소리는 아름답겠지... 


 ▲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이 따뜻해진 작품이었다. 금칠을 해 놓은 불상이 아니다. 부처가 잘생기지도 않았다. 화려한 단청도 아니다. 부처님이 헬레니즘 부처(고수머리)도 아니다. 소나무를 깍아서 만든 나무결이 보이는 이 소박한 불상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도시로 진출한 절이나 포교원에 이런 불상을 도입한다면 대중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겠다. 


 ▲ 능사에서 독경을 하고 계시는 자원봉사자 어르신이시다. 능사에는 스님이 없지만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승려가 없는 사찰이 종교적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도 있지만, 왜 사찰에는 승려가 있어야 하고 교회에는 목사가 있어야 할까?  


백제시대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서 부장품도 없다고 한다. 순장이라는 폭압적인 제도로 많은 사람이 같이 묻히던 시대인데 소박하게 만들었다. 강자가 죽어서도 사후세계에서 강자가 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이다.



한강에 있던 위례성을 재연하였다. 나무 목책으로 성을 둘러쌓았다 읍성에 온 느낌이다


 벡제 귀족들의 집을 복원했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도 초가집이 많았는데 당시에 기와집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겠다. 




롯데와 백제

충청남도에서 주관하는 사업이지만 민간자본을 유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한때 공공건축물을 신개축할때 민간자본 유치가 단체장의 경영 능력인 것처럼 호도되던 시절에 이루어지기도 했고 살림이 팍팍한 충청남도의 고육지책 일 수 도 있지만 대기업이 각종 특혜를 받아가며 참여하는 민자사업추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지금에서 보면 비극이다.

호텔, 수영장, 골프장, 아울렛(부여 인구가 몇명인데)을 롯데에서 추진하고 있고 일부는 완성되어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백제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부족하고 이익이 선이 되는 대기업의 사업참여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지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자본의 도입이 마치 사업의 성공인 것처럼 인식하는 천박한 문화의식 수준이 불러온 참극이고 결국 백제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적 가치와 공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기에 걱정스럼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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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의 소개로 저녁식사를 한 황토정 식당(041-834-6263)

전통방식의 한옥으로 지어진 한정식집이다


부여리조트의 야경과 조경이 예사롭지 않다

콘도미니엄의 외관이 기와를 연상시킨다




배흘림 기둥도 볼 수 있고

백상원을 지나면 출입구가 나오고





리조트의 외관, 아쿠아리움 즉 물놀이장이 있다. 가족여행에는 이상적인 구조이고 대전충남 지역민들은 신분증 제시하면 

사우나 40%, 물놀이장은 3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사우나에서 나오면서 알게 되었다.



눈에 대한 추억과 괴로움

중국 남방사람들이나 동남아사람들이 '코리아투어'를 하는 동기 중에 '눈'을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눈이 내리면 들뜨던 마음은, 이젠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눈 내리는 풍경이 마음에 와 닫지 않는다. 매년 겨울이면 조달청이나 지방자치단체 모두 제설대책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자연현상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데 3류 언론들은 제설대책의 불균형을 마치 인간의 잘못으로 매몰차게 몰아치고 열심히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능하고 죄인으로 만든다.


3류 전문가들

우리나라의 제설제 공급을 총괄하고 있는 우리과에서도 눈은 피하고 싶은 상대이다. 제설대책은 언론기관에서 대중에게 선동적으로 어필하기 좋은 소재이기에 사실과 다른 무식한 보도나 염화칼슘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편파적인 기사라도 나오면 대응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번 1월 달에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모 박사(차마 이름을 언급하기도 한심한 내용이었다)라는 분이 기고한 제설제에 대한 한국일보 기사가 우리나라 친환경제설제의 현실과 인증에 대한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한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어서 웃음도 안나왔다. 화학에 대한 기초지식만 있어도 반박할 수 있을 정도의 기사가 유명 신문에 실리는 현실이 답답해서 반박메일이라도 보낼까 하다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였다.


사업가들

제설제로서 염화칼슘이나 염화나트륨 대신 '친환경제설제'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고 친환경제설제 사용에 대한 필요성이 언론에 수시로 기사화되면서 마치 국산 친환경제설제가 저급이어서 신제품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대주의 기사,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대단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여 보도하는 촌지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년간 이런 제설제에 대한 우리나라의 현황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친환경제설제를 정부정책, 지원금, 지자체 등과 엮어서 한 건 해먹는 사업으로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시마저

존경하는 박원순 서울시장께서도 친환경제설제 개발을 위하여 연구용역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보았는데 사실이라면 박시장에게 제설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 서울시 담당자들의 친환경제설제에 대한 인식이 낮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친환경제설제는 상당한 수준으로 이미 개발되어 있다. 염화칼슘에 중독된 지자체의 협조부족으로 친환경제설제의 사용량이 적고 보급에 한계가 있는 것이지 결코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보급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친환경제설제는 기술적으로 하이테크니컬한 제품이 아니다. 이미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설비만 갖추면 쉽게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단지 우리의 환경에 대한 인식이 아직 낮을 뿐이다. 국내 최고부자자치구에서 국산 친환경제설제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염화칼슘이나 중국산 친환경제설제를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연과의 싸움

사람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눈 내리면 눈이 쌓이고, 길이 미끄럽고, 차량, 사람 모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연현상을 감수하면서 물리적인 제설을 하는 것이 환경과 나라를 위한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한다. 아침에 출근할 때 도로변 상가를 보면 아르바이트를 주로 이용하는 편의점이나 화려하게 겉을 꾸며놓은 휴대폰 가게 앞은 눈을 전혀 치우지 않아서 겨우내 빙판길이다. 우리에게 피해가 되기에 강제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친환경제설제와 조달청

염화칼슘의 사용이 끼치는 환경적 악영향이 많이 알려지면서 시중에 친환경제설제의 보급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친환경마크 즉 환경표지인증을 받아야만 친환경제설제라는 공인을 받는 것인데, 친환경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저질제품들이 환경표지 인증 없이 친환경제설제라는 표기를 하고 판매하고 있다.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정부에서 나서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친환경제설제는 조달청에서도 직원들 기피품목이다. 업무 조정을 하면서 기꺼이 계약을 하겠다고 받은 품목이지만 걱정보다는 오히려 성과에 대한 보람과 애정이 생긴다. 수천 건 계약을 해 보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품목이다.

조달청에서는 환경마크 인증을 받은 제품을 대상으로 다수공급자계약을 한다. 매년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계약방법 등을 개선하여 소비자와 공급자가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차고 있지만 아직 어려움이 많다.

 

                                     


조달청 사무실에서 이번 친환경제설제 계약을 하면서 받아 놓았던 견본품을 가지고 친환경제설제 부식실험을 해보았다. 기대치 이하의 성능을 보인 제품이 많다.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환경표지 인증이 반드시 우수 성능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환경친화적이라는 인식을 안겨줄 수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친환경마크, 환경에 주는 유해성이 적다는 성격이 강한데 화학적 반응에 의한 제설이 과연 환경적인지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조달청에서 십여년간 내자 계약을 해오면서 가장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또 성과를 내고 싶은 물품이다. 내외부에 적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품목이면서 가장 성과도 없고 상처만 받는다. 신규계약에는 계약방법, 인증, 국내생산량, 이론적 배경, 실제 사용자의 반응 등을 종합하여 사용자, 생산자 그리고 환경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겠고, 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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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스

대학 동아리의 전성기는 80년대 중반일 것 같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의 성숙기를 넘어가면서 부가 축적되었고 철학적 인식은 비록 부족하였지만 감정적 민주주의를 애타게 찾던 민중의 일부로서 대학생의 자부심은 높았고 대학 동아리 활동도 덩달아 활발했었다.

1969년 창립된 앵글스가 벌써 44년의 역사가 되었다 그동안의 역사에 비하여 오비회의 조직이 몇번의 위기를 맞았었는데 다행히 대전에 계시는 선후배님들의 인연과 추억으로 끈끈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2013년 01월 12일, 대전 만년동 연분홍 해물탕에서 OB정기총회가 있었다.

이번 정기총회는 OB회 회칙개정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10여년간 고생하신 공주대 한승희 교수님께서 OB회장직을 내려놓으시고 82학번 충청대 배연성 교수님께서 그 자리를 이어가는 뜻 깊은 자리였다.

77학번 이경우 선배님(국방과학연구소)은 곧 할아버지가 되실 기대에 설레이셨고 열정적인 작품활동은 못난 후배들의 귀감이시다. 앞으로 오비회의 활성화와 따뜻한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번별 간사들의 열정적인 노력을 기대하며 더욱더 발전하는 앵글스가 되길 기원한다.

=The Angles OB회 회장단=

회 장 - 82 배연성

부회장 - 85 임상규, 89 염동운

총 무 - 02 정세영

감 사 - 84 남정수

고 문 - 77 이경우, 80 한승희



한승희 회장님에 대한 감사패


회의 안건 설명

신임 회장 및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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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중국은 한때 중공으로 불리며 한국전쟁의 앙금을 간직한 우리에겐 금단의 나라였으나 한반도와 중국은 역사적 동반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내게는 개인적으로도 친숙한 나라이다. 두 동생이 중국에 거주한지 벌써 10년이 넘었고 한족 중국인과 결혼을 하여 예쁜 두 조카를 두고 있다. 덕분에 중국을 20여차례 가 보면서 암모니아 냄새 가득한 중국에서 우리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국을 보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중국은 사람을 끓어 들이는 마력이 있었고 오히려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우리역사도 중국과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일목요연하게 풀어나갈 수 없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하여 간단한 중국사부터 유명인의 회고록까지 탐독해보았지만 김명호 선생의 중국인 이야기는 바다이야기만큼 재미있어서 중독이 되고 그 세계에 빠져들어서 비유하면 숨도 안쉬고 읽었다.

출근시간을 앞두고 책에서 손을 놀 수 없어서 지각생이 됐지만 아쉽지 않았다. 승자의 역사는 승자가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균형잡힌 내용과 에피소드를 통해서 중국인과 역사에 대한 기초적 상식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중국을 이해하고 더 빠져들게 된다.

책표지 디자인은 서글프지만 2권이 기다려진다. 10년 전부터 20년 계획으로 중국을 조금씩 여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경치만 보았던 여행에서 이제는 스토리가 있는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상의 책소개는 다음과 같다

청조 멸망에서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근현대사, 삼국지보다 재미있다

「중앙선데이」의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에서 연재했던 글을 토대로 하여, 청조 멸망에서 문화대혁명까지 격동기 중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을 생동감 있게 복원한 책이다. 중화민국 탄생, 공산당 창당,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내전과 합작, 중소와 중미외교, 신중국 수립과 문화대혁명 등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 혁명가, 지식인, 예술인 등 소설 속 주인공보다 개성 넘치는 인물들을 담아냈다.

중화민국 탄생, 공산당 창당,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내전과 합작, 중소와 중미외교, 신중국 수립과 문화대혁명 등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고, 혁명가 · 지식인 · 예술인 등 소설 속 주인공보다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있다. 허구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논픽션 역사다. 김 교수의 글은 인물들이 남긴 일기, 서한, 회고록 등 1차 자료와 객관적 문헌에 철저히 근거해 역사적 팩트에 초점을 맞춘다. 섣부른 평가나 어쭙잖은 너스레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본문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마오쩌둥과 2인자 류샤오치의 관계를 통해 문화대혁명의 과정의 내막을 보여주고, 장제스를 중심으로, 반목했던 아들 장징궈, 쟁우(爭友)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자유주의자 후스, 그리고 수많은 학술·사상의 인재를 배출했던 시난연합대학교의 일화를 들려준다. 여성 혁명가들의 이야기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중국 현대미술의 초석을 쌓은 쉬베이훙, 만화가 출신으로 현대 중국화의 비조로 우뚝 선 예첸위를 비롯해 치궁·둥서우핑·옌원량·류전샤 등 걸출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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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2005년 물한리계곡

2013. 1. 29. 22:37




2005년 앵글스 오비들이 영동 물한리계곡으로 소풍갔을 때이다.

89학번이 제일 어리고 아이들은 많아지고, 80년대를 질풍노도처럼 달려온 선배형들이 50이 넘었다.

지나온 시간은 흑백사진 같다.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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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독서

나비부인

2013. 1. 29. 22:15



스테디셀러는 될수 없는 베스트셀러

복수의 힘은 책으로 나왔다. 

인터넷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가 약력

1946년 대전생 (헐)

1965년 대전여중·고 졸업

1970년 서울음대 졸업

1972년 서울 음대 대학원졸업

1979년 빠리 국립음악원 졸업

1980년 빠리 에꼴 노르말 음악원 졸업

1987~2001년 빠리 국립오페라단원으로 활동

2001년 스위스 여름성악연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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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상사를 만난다는 것은 복이다.

2007년 염재현 차장님이 구매국장이실 때 상사로 모셨던 일이 기억난다.  구매국장 '염재현', 자재구매과장 '김영철'  생각해보니 그 때가 조달청 생활의 황금기였다. 염차장님의 너무 빠른 퇴직에 속상하고 아쉼움만 있었지 제대로 인사한번 드리지 못했는데 이번에 염차장님 퇴직 후 처음으로 식사를 함께하는 기회가 되었다. 

2008년 퇴직을 하셨으니 내가 곰처럼 미련을 떨다가 5년이 지나버렸다.

서울 반포 일식집에서 염차장님, 반포 김연정여사, 나승덕 박사와 함께 자리를 했다. 염차장님은 올해 6학년0반에 입학하셨고 손주 보는 낙이 좋으시다고 하셨다. 명쾌한 논리와 후배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셨는데 생각해보면 염차장님과 연관되는 단어가 많다. 혜안, 도인, 덕, 선배...

2010년 우리 청 호프데이 행사를 준비할 때, 최도환 회장님과 함께 후배직원들이 가장 닯고 싶은 O.B.를 선정하는 이벤트를 기획하였고, 독보적인 1위는 염차장님 이실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나 많은 후배들에게 지지를 받으셔서 진심은 진심으로 통한다는 진리를 확인했었고 같이 근무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우리 청에서 퇴직하신 많은 선배님들이 퇴직 후에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못하셨다. 과거의 인연과 미련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고 퇴행적인 행동이나 저질스러움으로 후배들의 기억속에서 회색빛으로 덧칠되었고, 후배들에게 저런 선배는 되지 말자는 훌륭한 교훈!을 남기기도 하는데, 염차장님 같은 존경받는 선배가 있고 나도 저런 선배가 되야지 하는 롤모델이 있다는 것. 우리 청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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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지용과 백석

옥천에서 유년시절 기억이 깊어서 일까! 

옥천출신 정지용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향토색이 넘치는 그의 시구가 좋다. 그가 구사하는 향토적 언어 속에 있는 장소들이 시간을 흘러 변해갔어도 나의 유년시절과 일부라도 중첩되지 않을 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80년대 말 지용의 시가 해금되었을 때 옥천에서 지용제를 준비하시던 부친 친구분의 설명을 통해서 처음 지용을 알게되었는데 이젠 옥천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되었다.

지용과 대비되는 시인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불리는 평안도 정주출신 백석(백기행)이다. 사슴처럼 긴 목과 오목조목한 귀공자 같은 얼굴의 식민지 시인 백석을 돌이켜볼때 꼭 기억해야할 다른 한 사람은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나타샤 김영한(자야)이다.

백석에게는 모범생같은 지용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묘한 센티멘탈이 있다. 조각 같은 얼굴과 뛰어난 文材를 가진 영어교사 백석에게서 나타샤와의 사랑은 그의 시속으로 더 빠져들게 한다. 성북동 대원각이 백석의 시한줄만 못하다고 하신 나타샤(북구의 소녀)의 인터뷰 기사가 있다. 

넘 볼 수 없는 눈물나는 사랑이다.

오늘 투병중인 진곤씨 병문안을 위해 창원가는 길에 국문과 출신 김학민 박사가 낭송한 백석 싯귀에 다들 감동하셨다. 다음에 만나면 길상사와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겠다.

                                                   ▲ 말년의 백석과 가족들(미소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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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인사 반대 및 내부승진 촉구 기자회견>

정부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는 23일 대전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상급부처 인사들의 낙하산 인사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정부대전청사 7개 외청 공무원 노조와 직장협의회 대표로 꾸려진 이 단체는 기자회견문에서 “대전청사에 입주해 있는 중앙행정기관은 독립적 업무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그동안 업무경험이 전혀 없는 인사들이 상급부처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관행처럼 내려왔다. 이런 낙하산 인사는 기관의 전문행정을 저해하고 행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이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관세청 5명, 산림청 5명, 조달청 8명, 특허청 8명, 통계청 10명, 문화재청 1명 등 차장급 이상 37명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왔다”고 덧붙였다.

장준영 연합회장(관세청 직장협의회장)은 “낙하산 인사 관행은 대전청사 정부기관을 상급부처의 인사적체 해소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부처 이기주의에 의한 것이다. 정부는 청장 등 고위공무원에 대한 인사에서 내부 승진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대전청사에는 특허청, 통계청, 산림청, 관세청, 문화재청, 중소기업청, 조달청, 병무청, 국가기록원 등 9개 정부기관이 입주해 있으며 이날 기자회견에는 병무청과 국가기록원을 제외한 7개 기관 노조위원장과 직장협의회장이 참석했다

하나. 청·차장 등 ‘낙하산 인사’를 즉각 중지하라!

하나. 해당 청 업무경험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를 결사반대한다!

하나. 차장, 국장은 물론 청장까지 내부승진을 적극 반영하라!

하나. 대전청사 입주 7개청은 독립업무와 기능을 수행하는 중앙행정 기관임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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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보다는 열정적인 삼바나 탱고가 더 연상되는 나라, 내게는 ‘몬테스 알파’로 친숙한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1903년생이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를 칠레 당국은 1911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한 아라우는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3~1918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직계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lause)의 지도를 받았다. 

위대한 스승 크라우제는 아라우에게 기술적인 기교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라우가 대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다양한 방면의 문화적 소양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아라우는 스승이 원했던 리스트의 승계자로서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호로비츠,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라우는 스승인 크라우제의 타계 후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11세)에 이루어졌다. 이후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과 같은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였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그는 1930년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하였으며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칠레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익군사정권치하의 조국 칠레에서는 연주초청에 응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198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교향악단과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인터뷰하였는데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6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타계했을 때 독일낭만주의 맥이 끊어졌다고 애통해 한 칠레사람 아라우 그는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섬세한 유대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그는 쇼팽, 베토벤, 리스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을 남겼다. 베르나르드 하이딩크의 지휘로 암스테르담 콘세르헤보관현악단(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과 연주한 음반, 50년대 후반 알세오 갈리에라가 연주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음반, 1986년 콜린 데이비스와의 음반이 알려져 있다.







판석

빈티지오디오는 진동을 파하려고 한다.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 밑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도산 판석 사진이다. 

빈티지 오디오 기기 밑에 받쳐놓은 판석들이 멋있어 보였고 진동방지에도 좋을 것 같아서 판석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까 하는 고민했는데 익산 판석공장에서 쉽게 구했다.  총 10장을 만들었는데 육중한 무게에 가정용 카트가 휘어져 버렸다.

판석은 주로 건물 외벽용으로 사용하지만 색상이 수려한 것은 실내 인테리어 용으로 이용된다. 

우리가 흔히 건물 외벽에 사용된 석재를 대리석이라고 부르는데 오용이고 건물외벽용은 화강암 또는 수입 현무암이다. 

대리석은 산성비와 화학적으로 반응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외벽에 사용이 불가능하며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화강암

한국다움에 화강암이 포함될 수 있다. 화강암은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한국스러운 돌이다. 

석가탑, 미륵사지 석탑, 정림사지 석탑, 다보탑, 석굴암, 다듬이돌, 절간의 지줏돌, 묘비석, 광화문 바닥판석의 공통점은 모두 화강암이다. 

전라북도 익산, 경상남도 거창, 경기도 포천 등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은 석영, 운모, 장석의 혼합체로서 가공성이 우수하여 훌륭한 석재 가공품의 재료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특히 익산의 황등석은 철분이 적어  최고의 품질로 인정 받는다.

벡제 석탁들이 1500년이 지난 현재도 철분에 의한 색상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백제 석공 장인들의 신라로 유입 석굴암, 불국사 등의 석재 문화재의 탄생에 기여했을 것이다.

우리 국토의 25% 이상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풍화 등으로 부스러진 화강암은 모래가 되어 강으로 흘러가고 국토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금수강산의 원천은 화강암이다. 

정수기 없이 살기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지만 화강암의 정수작용이 맑은 물을 만들어 준다.  화강암은 한국이다...


대리석

우리가 화강암을 오용하여 대리석이라고 부르지만 무뉘가 아름다운 대리석은 원래 중국 대리지방에서 나오는 석재이어서 대리석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국내에서도 일부 생산되었지만 색상이 단조롭고 양이 적어서 경제성이 없다. 중국의 석재 가공기술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흙과 나무가 풍부했던 우리나라는 흙을 이용한 건축이 발달했지만 돌이 풍부한 중국은 석재를 이용한 건축이 발달되었다. 중국 호텔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실내외 인테리어가 대부분 석재로 되어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대리석은 생산량이 부족하여 대부분 이태리나 중남미에서 원석을 수입을 하여 중국 최대 석재단지인 하문이나 산동성 평도 등에서 가공을 하여 전 세계로 수출을 하고 있다.


오석

가끔 오디오 받침용 오석판매가 중고장터에 나오는데 한 번도 오석을 볼 수는 없었다. 가끔은 물처리를 해서 광택을 입힌 것들이 검정색으로 보이 긴 했지만 대부분 화강암 이었고 현무암도 일부 보였다. 오석은 검정색 돌 즉 까마귀색이 나는 돌을 뜻하는데 학교나 관공서 입구에 있던 큰 검정색 표지석이나 서예용 벼루에 사용되는 것을 연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령벼루가 유명한데 보령이나 웅천에 가면 아직 석재공장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은 오석 광산에서 채취되는 원석의 양이 미미해서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무암

기타 석재로서는 제주도 현무암이 있는데 강도가 낮은 단점이 있지만 기공이 많고 외관이 수려하여 장식용으로 사용하면 깊이 있는 외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외부 반출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요즘 건물에 사용되는 현무암은 대부분 중국 수입석이다. 현무암의 미세기공은 훌륭한 정수작용을 해서 제주 삼다수를 만들어 주는 제주의 영물이다.

음향기기용 받침대로는 어떤 돌이든 사용가능한데, 화강암도 물갈기 처리를 하면 광택이 높아지고 색상도 진해져서 외관이 수려해진다. 그러나 화강암보다는 기타 무늬가 수려한 석재를 두께 3cm, 옆면 라운드를 주어서 만들어 사용하면 인테리어 효과도 얻을 수 있다. 

Life is/조달청

모범공무원

2013. 1. 18. 13:04

 


우리 과(쇼핑몰단가계약과) 모범공무원 나승덕 님이 모범공무원 선발을 감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배우자만 있으면 되는데, 어려운가 보다.

남자 넷중에 미혼이 셋이다.

* 3년이 지나고 2016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둘은 미혼이고 가장 어린 종복이는 애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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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자전거거치대

2013. 1. 18. 00:05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막고 컨디션을 조절해보기 위해서 지오사이클(http://www.geocycle.co.kr/)에서 로라(거치대)를 구했다. 우리과 양철인하고 지오사이클 김형식 사장님이 적극 추천했다. 실내에서의 운동효과가 가장 높고 쉽게 접근 가능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운동효과가 높은데 마찰소음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사가면 방안에 놓고 돌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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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io & Music

세셈트리오

2013. 1. 18. 00:02



왕년의 유명 트리오

셈 트리오의 대표곡은 '나성(羅城)에 가면'이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에는 흑백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세셈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카바사라는 멕시코 악기를 흔들면 시원한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던 동덕여대 성악과 출신의 권성희, 쉐그린 전언수의 형 전항 그리고 홍신복으로 구성되어 당시에 접하기 어려운 라틴계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었고 후에 전언수가 홍신복 대신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팀의 리더는 권성희가 아니고 음대생이던 그녀를 발굴한 전항이다. 

시골아이가 당시 미국이라는 천조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니 나성(羅城)이 어디인지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불러대는지 궁금했었는데, 막상 LA가 로스앤젤레스이고 그 로스앤젤레스를 '나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웃음이 나왔다.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메리카 이민이래 미국에 정착한 수많은 한인중에서 보편적인 좋은 잡을 가지고 주류사회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서 곤궁한 삶을 이겨보거나 정신적 자유를 찾 찾으러 간 나성에서 청소, 세탁, 의류판매, 스토어, 자바시장 봉제, 등등으로 이방인의 고단함을 겪었을 교포들을 재미교포 사업가라고 우러러 보던 시절의 향수인 것 같다.  미국에 대한 동경만 가득하고 정보가 부족했던 그 시절 여자 연예인들이 미국교포와 결혼한 사례가 많은데 미국에 가면 동경하는 교포사업가분이 결국 옷장사, 식당, 세탁소가 주업이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겠다. 

이 작품도 고 길옥윤선생의 작품이다. 이 분 참 대중가요에 남긴 씨가 많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그분은 가시고 이분들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변해가는데 7080에서 본 모습은 여유가 있었고 노래는 더 좋았다.

이런 분들이 공연할 장소가 7080이나 가요무대 말고도 더 많았으면 그리고 대전에서도 공연이 있었으면 한다.




              ▲ 오랜만에 들어본 현이와 덕이 음반이다. 세련지는 않았지만 장덕만의 색깔이 있다. 한번은 보고 싶었는데. 


 천재는 왜 불행할까

장덕과 장현 남매, 현이와 덕이로 기억되는 한국의 카펜터즈는 90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 잊혀져가던 이들 남매는 최근 장덕이 작곡하였던 주옥같은 노래들이 되살아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내 기억속에서도 다시 떠올려졌다.

남매의 부친은 개성고보와 연세대를 나온 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고 장규상, 모친은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나온 재미 서양화가 이숙희 여사라고 한다. 예술적이 관점으로 보면 클래식음악가와 서양화가의 만남은 이상적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서양화가가 추구하는 삶과 철학적인 남자의 삶은 달랐던지, 남매의 부모는 장덕이 9살때 이혼을 하였고 남매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다. 철학과 종교가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긍정적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면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더구나 종교와 이상에만 존재하는 삶에 가족들이 함께하기는 어렵고 정상적인 가족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구도자로서 실천적 철학을 꿈꾼 ‘뿐철학자’ 장규상에게 가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



▲ 장덕, 젊은날의 이숙희, 말년의 장규상



뿐철학

장덕과 장현은 부모로 부터 이어진 예술적 재능과 함께 장현은 바이올린을 장덕은 피아노를 공부하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고, 부모의 갈등과 부친의 기행 등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가 이들 남매의 조숙함과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는 삶을 원했던 모친에 비하여 부친 장규상의 기인적 삶과 철학에의 심취는 분명 가정불화를 낳았다. 수시로 집을 비우거나 양로원, 고아원에 대한 무료공연 그리고 지인의 빚보증 등 지금으로 보면 빵점아빠의 모든 것을 갖춘 부친에 대한 갈등이 있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이 흥인국민학교 2학년때 이혼을 하게 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두 남매는 같은 집에 살지 못하고 각각 고모와 지인의 집에 맡겨진다. 지금은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덜하지만 당시에 감수성이 예민한 남매가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인생의 짐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규상을 검색해보면 ‘뿐철학’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볼 수 있고, 제자가 수천 명이라고도 나오는데 자기 성찰과는 반대로 현실 도피적인 철학이 남겨 준 현실은 10대 남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하겠다. ‘뿐철학자’ 장규상을 따라 결국 남매는 도봉산의 한 사찰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학교를 가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으며 지냈다고 하는 이 기간들을 생각 해 보면, 이 후 수차례 일어나는 장덕의 자살기도는 그녀의 극도의 센티멘털한 감수성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도 있는 삶의 괘적이다.


한국의 카펜터즈

1974년 장덕은 서울사대부중에 다니던 중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남매가 겪는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부친과의 관계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있던 이숙희 여사는 한국의 카펜터즈 듀엣을 결성하게 해 준다. 1975년 장현과 장덕 남매는 드래곤랫츠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 데뷔하였고, 당시부터 장덕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는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었다.

장덕은 안양예고를 졸업했다. 1977년 입학한 장덕은 그 유명한 소녀와 가로등을 작사작곡하여 진미령의 노래로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출전하였다. 당시는 국제가요제가 유행하여 각 국에서 경쟁적으로 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장덕은 3년 연속으로 입선하는 재기를 보여주었다.

장덕과 오빠 장현은 훌륭한 음악듀오였지만 분명 음악적 재능은 장덕이 앞섰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남매는 당시의 여건상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없었고 음악적 재능과 함께 귀여운 외모였던 장덕은 팬들에게 납치를 당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결국 장덕은 솔로로 독립하였고 장현은 락그룹사운드 ‘현이와 거룩한 성’을 결성하여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재혼으로 받은 충격과 부친과의 갈등 그리고 가출 소동 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던 장덕은 결혼한 오빠 장현의 집에서 독립하였는데 혼자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위기였고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였다.


미국생활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던 장덕의 미국생활은 3년정도 였다. 딸의 불안한 생활과 자살기도를 걱정하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을 설득하여 1979년 10월 LA로 불러들인다. '나성에 가면'의 나성에서 당시 비주류였던 한국사람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백인들이 기피하는 자영업이었다. 장덕이 미국에서 어떤 일을 했을 까 궁금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사회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탈출구이기도 했다. 안양예고를 졸업한 장덕은 LA의 델몬트칼리지 음악과에 입학하였다가 테네시대학에 편입하여 음악을 전공하였다. 장덕은 짧은 결혼생활의 기록이 있는데  1981년 컨트리음악의 성지인 내쉬빌에서 교회오빠인 교포와 결혼을 하였다. 그 후 리패밀리라는 가족그룹을 결성하여 음악활동(교회나 교포사회 공연)을 하였으나 1983년 가을 이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성장기의 아픈 기억은 치유가 힘든가 보다. 내가 겪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도 성장기의 상처가 남긴 치유할 수 없는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방송에서 보았던 80년대 장덕의 쾌활함이 있었다. 뒤에 숨겨진 아픔도 많았겠지만 그런 장덕이 좋았다.

장덕은 귀국 후 너무 많이 변화된 대중음악계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졌으나 이번에도 오빠의 도움이 있었다. 장덕의 재기를 위하여 장현은 1985년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였고 타고난 재능과 보조개와 단발머리로 기억되는 상큼한 외모의 장덕은 "나너 좋아해 너나 좋아해" "이제 안녕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장덕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녀가수로서 지금은 원로가수급인 이선희, 정수라와 더불어 '바지 삼총사'로 불렸다. 장덕은 또한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김진아의 '묻지 말아요' 등 히트곡을 양산하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불행한 남매

장현은 장덕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진정으로 장덕을 아끼고 평생을 보호자로서 자기 희생을 한 오빠이다. 그는 장덕을 위하여 밤무대 출연을 정리하고 장덕,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을 소속가수로 하는 코아기획이라는 음반매니지먼트회사를 운영했다.

장현은 그 후 혀가 붓고 호흡장애를 겪다가 설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 음악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혀의 일부를 절단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다른 언론에서는 치료를 거부하고 안수기도 등 종교적 완치를 고수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는데, 설암은 대부분 발병증상을 인지하기 어려워서 상당히 악화된 후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오빠의 보호자가 된 장덕은 심각한 불면증을 겪었고, 친구집에서 지내던 장덕은 마포 염리동 진주아파트에서 기관지확장제, 수면제 과다복용 등에 의한 약물중독으로 사망하였고 사망과 같은 해 8월 16일 장현도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96년 봉천동 자책에서 부친 장규상도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덕은 그녀의 재능보다 비극적인 가족사가 먼저 회자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최근 그녀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되면서 주옥같은 명곡들이 부활하고 있다. 장덕은 출중한 능력을 가진 아티스트였지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2% 부족한 음악적 완성도와 아티스트임에도 인기에 연연했던 조급했던 모습들이 장덕의 존재감을 떨어뜨리고 단명하는 불행을 가져왔다.



강원도, 군입대의 추억

89년 12월에 우편으로 보내 온  군입대영장에는 도트프린터로 1990년 2월 6일 102보충대라고 찍혀 있었다. 102보충대는 강원도 춘성군(춘천시)에 있었고, 대전에서 춘천가는 버스편을 몰라서 대전역에서 서울역으로 다시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89~90년도 2012년 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 찬바람이 불던 청량리역에서 흘끔 본 신문에 장덕 요절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1990년 2월 4일 장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