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교회 안나가

2013. 5. 3. 15:47


"교회를 나가는 것과 기독교를 믿는 것"

크리스천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을 믿는 다는 것에 대한 방황이 길어져서 20여년 넘게 고민이었는데, 결국 종교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내세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합쳐진 내 고민은 같은 대전 지역의 토인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주변을 보면 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를 가진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무조건 믿어라'와 '원죄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날 때의 회의감이 발목을 잡고 있다.


몇년전 기억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내게 '교회믿고 천국가세요' 라고 말을 하고 쑥쓰러운 듯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아이는 교회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사실 교회를 믿으라는 말에 당혹스럽고 씁쓸한 하루였다. 

구세주가 있다면 우리 마음안에 있음을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Unchurched Christian

교회없는 기독교인을 뜻한다. 

지역 커뮤니티인 토인회에 참여하기 전에 고민했던 것은 이분들이 자유스러운 모임으로 보이는 종교적 모임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알게된 것은 토인회에 참여한 분들이 대부분은 교회에서 희망을 얻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결국 교회를 나가는 것과 기독교를 믿는 것은 별개이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종교관도 헛된 것을 인식하시고, 가정신앙 그리고 내 삶의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그분들은 크리스천이다.


기독교 방송이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다. 방송에 나온 목사분중 많은 분들이 과연 목사인지 유대교 랍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약에 집착한다. 적절하지 않은 구절을 뽑아내어 시대착오적인 우화를 비유한다. 구약스토리를 적절히 인용하면 독선과 기만이 픽션급 감동으로 변형된다.   


큰교회와 사업가

대형교회가 대기업과 혼동되기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는 세속적인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역사속에 세속과 종교가 구분된 적은 없었다.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종교사업가들을 비판하면 하나님이 나를 벌할 것 같고 기복에 영합하는 것이 나의 종교관 이라면 신앙이 사회의 악성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 

교회에 가지 않는 선한 사람을 벌하고 교회에 나가는 악인을 천당에 보내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앙

직장의 젊은 직원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이고, 또한 자신은 기독교를 믿지만 다른 종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직원도 많다.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종교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할 수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 선인의 말씀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비록 생각은 해도 실천이 어려운 일이지만 내 영혼을 스스로의 깨우침없이 누군가에게 맏긴 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 수 있다. 

Life is

수사받는 기법

2013. 4. 27. 16:54


 신문에 수사받는 기법에 대해서 나온 기사가 있었다. 조달공무원의 업무 특성상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찰과 검찰 같은 사정기관에 몇번씩은 불려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다. 

예전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작성해 보았다. 참고로 내 기억으로 검경에 5번 정도 가봤네...


1. 별거 아닌 게 아니다

수사관은 “별거 아니다”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소환할 때는 잠깐 얘기만 하면 된다 하고, 신문할 때는 자백하면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일종의 신문 기법이다. 한 변호사의 말이다. “체포된 피의자를 접견하러 가면 대부분 조금 있으면 풀려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곧 구속될 상황인데도 말이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러려면 수사기관이 소환 통보를 할 때 자신이 정식으로 입건된 ‘피의자’ 신분인지, 아직 입건되지 않은 ‘참고인’ 신분인지 확인해야 한다. 피의자 신분이라면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요구하자.


 →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어도 대부분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죄의 유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사기관이 그동안 불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이 없어도 엮일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작동하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2. 수사 초기에 변호인을 구하라

외국 영화를 보면 자유롭게 로이어를 부른다. 경찰은 로이어를 부르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평등한 관계로 바뀐다. 헌법에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할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이라면 더욱 법률적 조언을 받아야 한다.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좋은 변호인을 소개받아야 한다. 

공무원들이 초기 대응을 잘 못하여 기소가 되면 신분이 걸린 문제이므로 상당한 변호사 비용이 든다. 사후에 약방문 두드리는 격이다. 평균 3~5천 만원 정도의 변호사 비용이 사용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사건 초기에 돈을 아끼지 말고 변호사를 구하자. 변호사 양산시대인 지금은 친절하고 수임료가 저렴한 변호사가 상당히 많다. 출석 날짜도 수사기관과 협의하거나 조정·변경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방어 무기를 갖춘 뒤 출석하자.


3.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협업하라

아무리 성실한 변호인이라도 그는 남이다.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지도,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지도 않는다. 피의자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지만, 변호인에게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무죄 증거를 수집하고 구속된 피의자와 변호인 사이를 오갈 또 다른 조력자가 필요하다. 죄가 없으니까 혼자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고 자만이다. 수사나 재판은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가 결백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다. 특히 수사기관은 유죄라고 단정하고 몰아세운다. 유죄 증거는 확대하고 무죄 증거는 무시한다. 무죄라고 절규해도 그 상황을 혼자 벗어날 수 없다. 유죄 올가미가 씌워졌음을 인정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자.


→ 일단 사건이 시작되면 주변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직장에서 잘못된 사건으로 2년을 고생한 선배가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해서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을 만든 다른 사람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만나주지 않아서 내가 더 황당했던 안 좋은 기억이 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자. 


4. 진술 거부권을 활용하라

헌법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진술거부권이다. 이는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묵비권’이 아니다.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신문에는 일단 응하면서 불리한 질문에만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변호사와 협의한 진술만 하고 다른 질문에는 묵묵부답해도 된다. 흔히 대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지만, 현실에선 진술이 오히려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한 검사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건은 피의자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이유를 수사기관에 설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유죄 증거를 발견하고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책임이다. 직접 증거를 먼저 대라.”


→ 직장에서 보면 수사기관에 출두하면 이성을 잃어 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진술까지 열심히 하고 나온다. 잘 알고 지내는 수사관이 내게 말한다. 저런 놈하고 같이 근무하면 큰일 난다고..

필요한 말만 하자. 거짓말과 진술 거부는 다른 것이다.


5. 조사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을 정하라

피의자를 조사실에 넣어놓고는 몇 시간 동안 대기시켜서 피의자가 불안감에 심리적으로 무너지도록 하는 수사 기법이나, 수사관 한명이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며 수사를 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조금후에 푸근하게 생긴 수사관이 커피를 타 가지고 들어오며 고생이 많지요 하며 친절하게 대해주며 자백을 유도한다. 자신을 잡아넣으려는 사람을 구원자로 여기게 하는 전형적인 수사기법이다. 여기에 말려드면 안된다.

이럴 때 대응 방법은 출석할 때 조사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을 미리 정하고 변호인이 조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부당한 신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변호인이 옆에서 수사관의 질문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수사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 미리 정한 종료 시각이 지나면 조사가 끝나지 않아도 피의자는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장기간 조사는 피의자의 방어력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특히 심야 조사는 거부하는 게 낫다. 사실상의 가혹행위가 될 수 있다. 재출석하고 싶지 않아서 심야 조사에 응하기도 하는데 어차피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계속 소환한다.


→ 경찰이나 검찰에서 재소환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재소환은 죄가 위중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코 손해볼 일이 아니다. 수사관도 사람이어서 퇴근을 일찍하고 싶어 한다. 명심하자 수사관도 사람이다.


6. 자백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다

많은 증거 중에서 수사기관이 가장 원하는 것은 피의자의 자백이다. 혐의 자체가 불분명할 때 일단 자백을 받아내면 수사가 압축되고 법원도 유죄를 선고한다. 형사소송법은 자백 이외에 다른 증거가 없을 때, 즉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자백만 가지고 유죄를 선고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백은 ‘증거의 왕’으로서, 모든 무죄 증거를 뒤덮는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수사기관의 반복·유도 신문이나 “옆방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백했다”는 회유에 넘어가 거짓 자백해서는 안 된다. 혼자 계속 버티면 오히려 자기만 불리해질 것이라고 언뜻 생각하지만 전형적인 수사 방식에 불과하다.


→ 우습게도 수사기관에 소환된 많은 분들이 알아서 자백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한다. 이런 성향은 똑똑한 사람이 더 심하다.


7. “의심스러울 때는 검사의 이익으로”

법정은 거짓말 경연장인 것 같다. 판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억울한 일도 판사가 가려주지 못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선 양 당사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적어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는 경우가 많아서 진실이 100% 밝혀지기 어렵다. 게다가 판사는 같은 법률가인데다 공직자인 검사의 주장을 피고인보다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은 곧잘 무너진다. 따라서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검사의 유죄 주장·증거에 대해 판사가 합리적 의심을 품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무죄판결이 나오지 않는다.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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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주차 (Space Park-ing)' 갤러리 오픈

 

도안동 아파트 거실을 아트타일로 꾸미면 미적인 아름다움과 음향판 효과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오후 대학시절부터 아트타일 공예작업을 하는 앵글스 후배 미희를 만났다. 몇년만에 만나는 자리를 역시나 게으른 내가 약속시간에 늦었다. 돌이켜 보니 95년에 같이 대학원시험을 보았는데 어렸던 후배가 벌써 40이 넘었다고 한다.

벽지, 목재, 석재(대리석 등) 이외에는 벽장식에 사용할 소재가 많지 않은 것이 집 지을 때의 일반적인 고민이다. 아트타일을 사용하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장식효과가 있지만 시공이 복잡하고 비용이 높으며 이사할 때 탈착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후배가 시공의 어려을 설명하며 적극 권하지는 않는다. 나도 흙을 소재로 사용한 작품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만 아파트벽에 적합할 지는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개인주택이라면 주저함이 없을 것 같다.


금요일 오후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마침 선화동에 있는 기라에게 연락했다. 식사후의 장소는 화가 박석신이 운영하는 갤러리로 정하고 미희, 기라와 함께 출발.

주차장을 개조한 갤러리 키작은 하늘보기가 'PARKing 문화공간 주차'로 이름이 달라졌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아직 오픈하지 않았을 때였다고 한다. 화가의 성인 PARK 과 진행형 ing, 주차장의 뜻이 합해져서 문화공간 주차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갤러리와 문화공간의 차이는


이 곳이 화가 박석신의 개인 갤러리와 크로키 등의 수업을 하는 장소로만 알고 있었는데 화가는 세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쉼터 역활을 해줄 수 있는 공간을 꿈꾸며 문화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갤러리를 연상하면 몇점되지 않는 작품을 잠시 보는 장소였는데 예술과 체험문화를 결합한 대중으로의 적극적인 접근은 문화빈곤의 도시 대전에 꼭 필요한 현명한 시도인 것 같다.




                           이름모델과 대화를 하며 감성을 뽑아낸다. 편한 대화..



                              ▲ 이름이 작품으로 변하는 광경

 


'달빛도 때론 모양을 달리하지요'


화가 박석신(박교수)은 갤러리에서 내이름과 미희부부의 이름으로 각각 글씨그림을 그려주었다그림이 완성되어 눈앞에 보이기까지 기대와 설레임 그리고 약간의 걱정도 되는데 결과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돌아온다.

박교수가 내게 보내준 메시지는 '달빛도 때론 모양을 달리하지요'


 

 




내이름이 갤러리에 걸리고


박교수의 제안으로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됐다. 이런 영광이 있나. 정말로 지치고 바쁜 생활이 당연하게 받아 들여지던 내 모습이 편하게 쉬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 이름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다시 보니 미희 이름이 아트다. 박교수는 아름다울 미를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하고 감탄스러웠다. 미희는 도예작품에 사용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 위안 받고 싶은 사람, 미술이 알고싶은 사람 문화공간 주차로 가서 박 교수를 만나보기를 권한다. 문화공간 주차는 대흥동 대전여중 앞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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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버킨


에르메스(HERMES), 최고의 명품 브랜드이다. 

루이뷔통을 기저귀 가방으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가지고 싶어 한다는 버킨백은 영국출신의 프랑스 샹송가수 제인 버킨으로 인해서 탄생되었다. 

60년대 유럽문화의 아이콘, 제인 버킨(Jane Birkin)은 1946년생이고 마마 '주디 캠밸'은 영화배우였다. 세번의 결혼과 아빠가 다른 세딸의 엄마인 버킨은 영국출신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프렌치 샹송가수 겸 영화배우였다. 시인이기도 하고.. 


                                  ▲ 주디 켐벨(Judy Campbell)


                                 ▲ 제인 버킨(Jane Birkin)

 


첫 남편 - Jonh Barry


제인 버킨은 17세에 배우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 첫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1965년 훗날 영화음악의 거장이 되는 젊은 존 배리(John Barry)가 제작한 뮤지컬 'Passion Flower Hotel'에 출연했고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버킨이 19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존 배리는 007의 작곡가이며 아카데미와 그레미상을 수상한 훗날 영화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여자의 운명은 첫남자가 좌우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버킨의 첫남편부터 평범하지 않다. 제인은 첫딸인 Kate Barry를 낳고 다음해에 이혼했다. 


                                  ▲ 제인 버킨과 존베리 부부의 결혼시절 


                             ▲ 영화음악계의 거장이 된 존 베리의 말년사진이다. 


                                   ▲ 제인 버킨과 큰 딸 케이트의 어린시절 


                             ▲ 제인 버킨과 큰 딸 케이트의 최근 사진 



두번째 - 세르쥬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갱스부르, 갱단 보스는 아니다

프랑스의 천재 대중음악가, 배우이자 연출가이며 버킨의 영원한 남자인 갱스부르 사진을 보면 코가 크고 휘어진 전형적인 유대인이다. 러시아출신인 갱스부르의 부모가 러시아혁명 시기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본명은 뤼시앵 긴스버그(Lucien Ginsburg)이다. 

세르게이(Sergei)에서 세르쥬를 차용하였고 영국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에서 갱스부르를 차용했는데 클래식한 이미지의 영어 게이즈버러가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갱스부르가 되었다고 한다. 


평범할 수 없는 갱스부르는 영화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샹송에 대중음악을 접목하여 프랑스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이다. 그는 우리나라와는 멍멍탕으로 악연인 프랑스 여배우겸 가수인 브릿짓 바르도의 연인이었고 그녀를 위하여 많은 노래를 만들어 주었으나 외설적인 가사에 대한 악영향을 두려워한 브릿짓 바르도가 그 유명한 노래인 ‘Je t’aime moi non plus’의 취입을 거절하자 결별하게 되었다



                                        ▲ 브리짓 바르도와 갱스부르 




                                        ▲ 브리짓 바르도와 갱스부르 


예술과 사랑은 열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영화 'Slogan'에서 그녀를 만나 세르쥬는 그녀에게서 음악적재능과 매력을 발견했다. 즉 당시 영화계에 활약하는 여배우들은 볼륨이 있는 글래머스타일이었으나 제이 버킨은 깡마른 체형이어서 패셔니스타일수는 있어도 스타여배우로 활약이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제인의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알아차린 세르쥬는 그녀에게 샹송을 부를 것을 권했으며 그녀를 위하여 바르도가 포기한 노래를 주었고 갸냘프고 불안한 음색의 제인 버킨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며 대스타가 된 것이다. 결국 샹송계의 플레이보이인 갱스부르의 구애와 예술적 결합으로 두 사람은 (비공식)부부가 되었다.







                                        ▲ 제인버킨, 갱스부르, 큰 딸 케이트, 샤를로뜨 (1977) 


불어를 모르니 뜻은 이해되지 않지만 노래를 들어보면 신음소리도 나오고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면서 중독성이 있다. 두 사람은 예술적 동반자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제인버킨이 갱스부르를 만난 것은 분명히 행운이었다. 

갱스부르가 있었기에 영국인이어서 불어발음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갱스부르의 명곡을 부르는 샹송가수로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퇴물이 되어버린 브릿짓 바르도, 그리고 70을 앞둔 나이에도 세르쥬 갱스부르의 이름을 걸고 월드투어를 하고 있는 명가수 버킨,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 

그녀의 재능을 음악과 영화의 영역에서 꽃피워준 갱스부르는 잦은 기행과 알콜의존으로 재인 버킨과 갈등을 겪다가 82년 그녀와 헤어졌지만 83년 제인에게 신곡을 주며 음악적 재결합을 하였다. 당시의 명반이 브람스의 3번 교향곡 3악장을 편곡한 Baby Alone In Babylon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영국인인 제인 버킨이 프렌치 팝(샹송)을 대표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알콜중독과 심장병을 앓고 있던 갱스부르는 결국 심장마비로 91년 사망했다. 


마지막이다 - 쟈크 드와이옹(Jacques Doillon)


영화감독인 쟈크 드와이옹(Jacques Doillon)은 버킨의 세번째 남자이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하기도 하였던 쟈크 드와이옹은 우리나라도 보면 이창동 감독 같은 사람인 것 같다. 그들은 1982년 루 드와이옹(Lou Doillon)을 낳았다. 루는 패션디자이너, 모델, 패셔니스타, 배우, 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루 드와이옹(Lou Doillon)





월드투어 


제인버킨은 라이브공연에 주력하여 월드투어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004년, 2012년, 그리고 2013년 4월 공연까지 3번 내한 공연을 하였고, 공연관람기를 보면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근사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뷰티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아름답다.




샤를로뜨 갱스부르(Charlotte Gainbourg) 


제인 버킨과 갱스부르 사이에 낳은 딸이 2006년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사를로뜨 갱스부르이다. 샤를로뜨는 불편한 아빠의 외모와 엄마의 우월한 몸매를 이어받는데, 자신만의 개성있는 외모로 승화시키고 자신감 있는 패션에 대한 감각으로 영화뿐만 아닌 패션계에서도 탑클라스의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 패셔니스타로 활동하고 있다. 부모의 명성에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쌓아가는 이 배우 역시 아름답다. 











버킨백 


일년에 100개 정도 생산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버킨백은 1984년 에르메스의 회장이었던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가 비행기에서 동석하게 된 제인 버킨의 가방안에 자신과 샤를로트의 양육을 위한 물건이 엉망진창으로 넣어져 있는 것을 보고 포켓이 부착되고 많은 물건을 정리하여 넣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기로 제안하여 탄생한 가방이라고 한다. 지금은 켈리백과 함께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백으로서 베컴의 부인인 빅토리아는 100개가 넘는 가방을 가지고 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인 버킨은 최근 인터뷰에서 마지막 가지고 있던 버킨백은 도난을 당하고 더이상은 버킨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조달청은 조직력


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에서는 2013년 사업의 일환으로 대전청사에 입주한 7개청(직원들을 대표하는 조직이 없는 병무청은 불참)이 참여하는 청대항 체육행사를 개최하였다. 남녀 모두 참가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축구와 피구 2종목을 토나멘트 방식으로 일과후 경기를 하고 있다. 


조달청은 여자종목인 피구에서 1차예선을 통과하였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통계청을 상대하여 대전지방조달청 여직원(장동미, 이민원 등등)들의 무서운 실력으로 2 : 1로 신승하였다. 

통계청에서는 전직 핸드볼국가대표 출신 직원이 불참한게 가장 큰 패인이었다고 아쉬워 했는데, 승부에는 항상 적극성을 가지고 참여하는 조달청에게 좋은 결과가 있었다.


4월 15일 축구예선은 조달청 대 산림청의 경기였는데 일과시간 이후에 하는 경기이어서인지 봄날씨가 매섭다. 비가 올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경기는 가능하였다. 

산림청은 축구동호회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조달청 선수들이 시작부터 자신감이 있었다. 최근 젊은 직원들이 많이 축구동호회에 가입하여 전력이 급상승하였다고 하는데, 왕년의 주전들이 보이지 않는다. 산림청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대전청사 잔듸구장은 보수관계로 올해들어 처음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아직 적응이 어렵고 잔듸도 길어서 걱정스럽다. 우리청은 총 25명 선수단을 구성했고 적극적인 참여로 사기가 높다. 



           ▲ 파란색 유니폼이 조달청 선수들이다.


조달청은 젊은 직원위주로 선수 구성을 하였고 개인기보다는 패스위주의 게임을 운영해서 체력적으로 우월해 보인다. 정원철, 정우영, 강승호, 정호형, 김곤, 남유환 이런 젊은 직원들이 젊음을 체력으로 보여준다. 각 청별로 소속직원들의 특성이 있는데 조달청은 예전부터 승부근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 아마도 업무상 업체들에게 많이 시달려서인지 내면이 강하다.


           ▲ 헐크 이완


           ▲ 왼발의 달인 정원철


           ▲ 달려라 정우영


           ▲ 김곤


           ▲ 조달청 지단-관록의 성경수


           ▲ 테크니션 김광환




산림청이 페어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양팀이 부상자 없이 재미있는 경기가 이루어졌고, 산림청의 넉넉한 양보덕인지 조달청이 3 : 0으로 승리했다. 열심히 달려준 산림청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우리청 선수들에게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런데 우리청 주전선수들이 양복차림으로 구경을 하고 있다. 

다음 4강전은 대전청사에서 강팀으로 불리는 특허청과의 경기이다. 대규모 응원단을 구성해서 조달청의 저력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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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서을 박범계의원

 

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회장 관세청 장준영)의 각 청 노조위원장들이 정부대전청사가 위치한 대저시 서구 둔산동이 포함된 대전서을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박범계님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특허청 김정훈노조위원장이 마련한 이 자리는 대전청사내 산적한 현안들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박범계의원은 과거 판사, 고 노무현대통령의 동지, 그리고 지역구 의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접하기만 하였지만, 짧은 시간의 만남동안 판단의 균형감을 잃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공무원 임용제도에서 일제때부터 내려오는 행정고시제도의 문제점 설명 및 폐지의 필요성에 대한 토론과 공무원 6급이하 직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좋은 의견교환이 있었고, 박의원은 대전청사 공무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을 약속했다.    

 





정부대전청사


1998년 대부분 서울에 위치하였던 행정부 외청들이 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청사에는 관세청, 조달청, 특허청, 산림청, 문화재청, 철도청(철도공사), 병무청, 통계청, 중소기업청이 이주하였고, 조달청도 서울 반포에서의 역사를 접고 대전청사로 이주하였는데, 초기의 불편함은 이제 사라지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대전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높다.

 

대전은 광역시 승격 후 별다른 변화의 흐름이 없었고 외부 변화에 대한 반응이 느린 보수성이 강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말 둔산지역 개발이 시작되면서 구도심에서 둔산지역으로 대전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시대 충남도청의 이전, 대전역 설립이래 가장 큰 대전의 변화인 대전청사의 이전은 분명 대전시 역사의 획기적인 터닝포인트이다. 대전으로의 인구 유입이나 둔산동의 지엽적인 성장외에도 문화적, 경제적 성장동력은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박범계의원은 영동출신이고 어머니는 옥천이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옥천 출신이신데 옥천, 영동, 심천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말고 사람을 위한 좋은 의원으로 기억되고 멋진 다선의원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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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집이 뭐하는 곳이야

대전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소개하면 두부두루치기와 칼국수를 언급한다. 

대선칼국수, 신도칼국수, 공주분식, 상신분식 등등 유명한 칼국수 집들이 참 많았다. 칼국수집들 중에는 두부두루치기도 팔았는데 이 두부두루치기가 대전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대표음식이다. 음식문화가 발달한 지역의 사라들은 고작 두부두루치기야 할 수도 있지만 대전사람들은 매운 두부두루치기를 정말 좋아한다,

대전에는 두부두루치기로 유명한 식당이 많았다. 80년대에 청양식당, 광천식당, 벌집식당, 진로집, 별난집, 진선미 등등의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에는 남녀노소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 최고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별난집이다. 대전역 맞은편 중앙로에서 인쇄거리 초입의 한밭식당 옆에 있는 별난집은 허름하고 장소도 협소하여 불편하지만 독특한 맛에 매료된 팬들이 많다.


두부두루치기

대학시절에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선배형들이 데리고 와서 처음 맛본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맛도 있지만 분위기도 좋아서 당시 시대상과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참여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평하고 자신을 반성하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모습들은 눈에 선하다.

별난집은 같은 장소에 있다. 10년 전 쯤에 둔산동에 별난집 간판을 보고 아무생각없이 자연반사로 들어갔는데 짝퉁이었다.

예전 사장님이 계속 나오시지만 요즘은 아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대전역앞을 갈때면 생각나는 별난집 그집에서 두루치기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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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é)


엘가의 첼로협주곡(Elgar Cello Concerto)하면 떠오르는 영국의 여류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지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Jacqueline du Pré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집안은 영국령 채널제도(프랑스 북서해안 인근의 영국령 제도) 출신이다. 프랑스식 이름이어서 프랑스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채널제도를 지도로 보니 이름의 기원이 아마도 프랑스에 인접한 지리적 요인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노교사였고 재클린도 피아노와 음악적 기초를 모친으로 부터 배웠으나 재클린이 4살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 중 첼로소리를 가려 듣고(one of those) 첼로를 가지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클린 뒤 프레의 부모는 재클린이 5살이 되었을 때 런던첼로스쿨(London Cello School)로 보냈고, 2년 뒤에는 길드홀 음악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공부를 하게 했다. 재클린은 1955년 부터 윌리엄 플리스에게 사사했으며 16세에 위그모어 홀(Wigmore Hall)에서 첼로연주자로 공식 데뷔하였다. 

그녀는 1960년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기도 하고, 1962년에는 프랑스에서 폴 토르틀리(Paul Tortelier)에게 그리고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첼로계의 대마왕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첼로의 대가들에게 학습하는 좋은 기회였으나 역시 그녀의 최고 스승은 플린스이다. 


                                ▲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와 재클린



영국은 유럽의 중심에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의 자존감은 낮은 곳이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은 독일 이민자이고 그 이후로 연상되는 음악가는 마땅치 않다. 아마도 비틀즈 이전까지 음악의 변방이었기에 엘가는 소중한 영국 음악가로 대접받는다. 이런 엘가를 세상 밖으로 들어올린 사람은 역시 영국의 재클린이라고 할 수 있다. 엘가의 첼로협주곡 연주로 재클린은 주목을 받았다. 

존 바르톨리 경(Sir John Barbirolli)의 연주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65년 레코딩이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쉽게 드어온 곡은 아마도 이때의 녹음일 것이다. 또한 그녀는 1965년 카네기홀 무대에 데뷔하여 역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아날 도라티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미국인들에게 첼로가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연주경력은 10여년 정도로서 매우 짧지만 대가로서 인정받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재클린 & 바렌보임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클래식 음악계의 유명한 스토리이다. 스타첼로연주자이자 클래식음악계의 샛별로 자리잡은 재클린은 1966년 다니엘 바렌보(Daniel Barenboim)을 만났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바렌보임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고 있는 신성이었다. 누가 먼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재클린은 그와의 결혼을 결정하였고 키작은 유대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의 물리치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결혼을 하였다.

두사람이 만난지 6개월만에 올린 결혼식은 제3차 중동전쟁중이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치뤄졌다. 

전쟁중의 천재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의 결혼은 결국 불행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대단한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이때 결혼식 증인과 결혼기념연주의 지휘를 비호감 지휘자 주빈 메타가 맡았다고 한다.

국민요정이 강행한 유대인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차가움에 대한 탈출이고, 음악적 동지에게 느끼는 사랑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재클린은 부모와 관계가 소원하였고 형제들과의 불화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상황들이 결혼의 충분한 원인이 었을수 있다. 연주활동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농사 짇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는 재클린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결혼을 하면 동반자에게 받는 편안함에 마음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들의 결혼은 음악적 정서를 깊고 섬세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풍부한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피아노 바렌보임, 첼로 재클린, 바이올린 이츠하크 펄만, 비올라 핀커스 쥬커만, 제2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 쥬빈 메타(지휘자 쥬빈 메타와 동일인) 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The Trout'와 같은 많은 실내악곡을 연주하였다. 

위 연주는 동영상으로 쉽게 볼 수 있는데 최고수들의 젊은 시절 모습과 함께 동영상중에 조명해주는 바렌보임의 결혼반지와 재클린의 드레스는 이들이 부부연주자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재클린은 바렌보임과의 협주를 통해서 뛰어난 연주활동을 하였고 훌륭한 레코딩을 남겼지만 한정된 레파토리로 인하여 현대 클래식 음악에 큰 영향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녀의 팬들은 그정도 수준의 재클린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행과 죽음


1971년부터 재클린은 팔의 힘이 빠지고 손가락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연주횟수가 줄었고 그녀의 마지막 연주는  1973년에 있었다. 그녀의 병명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중추신경계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이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도 다발성경화증이었는데 그녀는 비록 뒤틀린 몸이지만 살아나서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재클린은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몸에 마비가 더해가는 불행이 온 것이다. 그녀는 연주활동을 포기한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생활을 하였고 팔과 다리가 굳어지며 온 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다가 1987년 10월 19일 42세로 사망했다. 

역시 신은 잔인한 분이시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나쁜 사람일까


다니엘 바렌보임의 '무언가'를 들어보면 꼭 지휘자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주활동으로 바쁜 그는 예전 가수 이0이나 권투선수 누구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병든 부인을 버린 나쁜 인간의 반열에 올라있다. 

병든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하고 재클린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하는 야사가 정설로 변하여 대부분의 기록들은 바렌보임을의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재클린에 대한 관계에서 비난이 앞선다.

바렌보임은  유대인이지만 반유대주의자로서 괴테의 작품을 따 시작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 갈등지역의 연주자들을 모아서 창단했으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콘서트를 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임진각에서도 공연을 갖은 기록이 있다.

재클린이 투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때 바렌보임이 냉혈한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렌보임이 미국 오케스트라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유럽 파리에 남아서 지휘활동을 한 있던 이유가 런던에 있는 재클린의 병간호때문 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유대계 러시아 바이올리스트 기돈 크래머의 전 부인이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의 만남은 바렌보임을 천하의 바람둥이로 몰아 붙이는 좋은 소재가 되었지만 여성편력이 경력이 되는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한다면 그가 그만한 비난의 대상인지는 찬성하지 않는다. 


                  ▲ 다니엘 바렌보임과  엘레나 바쉬키로바 


음악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바렌보임에게 엘레나와의 동거생활과 두 아이의 탄생은 비난하기보다는 음악을 위한 차선이었다고 억지 변명을 해주고 싶다. 왠지 그가 밉지 않다. 







                              ▲ 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하는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묘비(런던의 유대인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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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팔권광팔권


장미희라는 이름은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익숙하다. 대부분 멜로물에 출현한 장미희가 쿵푸영화에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에 힘준 모습, 유치한 의상 두가 아프다.  





장미희, 유가휘 주연의 1981년작 쿵후영화 <취팔권광팔권> 이다. 1981년이면 장미희 전성기인데 이런 영화에 출연하다니 실수다. 홍콩과의 합작영화(어쩌면 한국과의 합작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림만 보아도 유치함이 하늘로 치솟는 3류 공장형영화. 아트가 영구가 되었다.

 




염화칼슘이 뭐야


염화칼슘은 염소(Cl)와 칼슘(Ca)이 반응하여 만들어진 이온성 화합물로서 탄산칼슘과 묽은 염산을 반응시키면 얻을 수 있으며 화학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CaCO3(s) + 2HCl(aq) -> CaCl2(s) + H2O(l) + CO2(g)


수용액상태로 생성되나 약 300℃에서는 무수물인 CaCl2를 얻을 수 있다.

무수물은 조해성이 있는 사방정계의 백색 결정으로서 염화칼슘은 소금보다 흡수성이 강하다. 가격은 천연에서 얻어지는 소금보다는 높지만 초기 융빙 효과가 우수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제설제이다. 

염화칼슘은 습도가 낮을 때에는 물과 결합하여 노면에 부착되고 소금보다 조기에 해빙작용이 시작되며 용해과정에서는 소금과 반대로 열을 발산하여 이 열에 의해 용해작용을 돕는다. 20%의 염화칼슘 용액은 -20℃까지 얼지 않으며 30%의 용액은 -54℃까지 얼지 않는다. 





염화칼슘이 눈과 얼음을 녹이는 윈리


   조해 ⇒ 융해열 발생 ⇒ 눈과 반응 ⇒ 제설 ⇒ 빙점 강하


조해성이란 고체가 대기중에 방치되었을 때 대기중의 수증기가 흡수 용해되는 현상이다. 해당 포화용액의 수증기압이 낮을수록 조해성이 좋으며, 우리나라와 같이 동절기에 저온 건조한 조건에서는 염화칼슘이 월등하다.

염화칼슘을 공기나 눈 또는 얼음같은 수분과 접촉하면 수분을 흡수하면서 그 수분에 의하여 녹는 성질을 조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염화칼슘용액이 되면서 어느점 내림 현상이 발생한다. 눈이나 얼음의 경우 순수한 물보다 어는점이 낮아지게 되어 염화칼슘을 뿌린 주변의 얼음들이 녹게 되는 것이다. 

 ① 조해과정 : 녹는다 ② 용해열 발생 : 융해시 열이 발생한다. ③ 눈이 녹는다. ④ 녹은 눈이 제설제가 혼합되어 물이 된다. ⑤ 이물은 일반 물과 다르게 빙점이 대단히 낮아 거리가 쉽게 얼지 않는다.

염화칼슘이 눈이나 얼음위에 살포되면 염화칼슘의 강한 흡수성과 발열성에 의해 눈이나 얼음이 녹게 되는데 이때 용해에 필요한 열량 (80cal/얼음 1g당)은 염화칼슘의 용해열에 의해 공급된다.



염화칼슘의 피해는


1) 부식현상

바닷물의 부식현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약 4%이다. 염화나트륨과 유사한 염소성분을 가진 염화칼슘은 염소이온으로 분리되어 철과 반응하여 염화철을 형성하며 심각한 부식현상을 일으킨다.

 

2) 중금속 오염

국내에 사용되는 염화칼슘의 농도는 74%가 대부분이다. 즉 공업용 염화칼슘에는 상당량의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성분의 상당부분은 납(pb), 비소(As), 카드뮴(Cd), 수은(Hg), 크롬(Cr), 구리(Cu), 니켈(Ni), 아연(Zn)과 같은 중금속들이다. 염화칼슘의 대량 살포는 환경적인 면에서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이러한 중금속의 대량살포로 이어지고 전국이 중금속에 오염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3) 분진피해

염화칼슘이 제설작용을 하지만 미세 분말들은 대기중으로 부유되어 사람들의 호흡기로 침투할 수 있다. 한 겨울 뿐 아니라 봄철에도 도로에 남아있는 염화칼슘 분진들이 부유할 수 있으므로 대대적인 도로 청소 등이 필요하다.

 

4) 도로포트홀 현상 촉진

포트홀은 아스팔트 포장의 표면에 생기는 국부적인 구멍으로서 발생 원인은 부실시공, 자재의 품질불량, 배수구조불량 그리고 염화칼슘 발열에 의한 원인을 들 수 있다. 여르에도 발생하지만 겨울철 눈이 내린 후 대량 살포된 염화칼슘 등이 포트홀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식물의 성장을 방해

염화칼슘에 의한 수목 피해는 토양이 염류 축적으로 알칼리성화 되어 수목의 정상적인의 생리작용을 방해하여 수분이동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또 수목의 뿌리로 흡수된 염류는 수목에 치명적인 생리장애를 일으켜 수목의 황화현상과 괴사, 조기낙엽, 신진대사 장애 등의 독성을 나타낸다. 


6) 하천오염

염화칼슘은 하천의 염소와 칼슘 농도를 높여 미생물의 활성을 떨어뜨리는 등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면 염화칼슘은 물에 녹아서 칼슘 이온과 염소이온으로 분해되어 하천으로 이동한다. 즉 하천의 염소와 칼슘의 농도를 높여서 미생물의 활성을 떨어뜨리는 등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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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2013. 3. 31. 18:00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간 이원숙 여사

2011년 정경화명화명훈 남매의 모친인 이원숙여사가 작고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여사는 함경남도 원산출신의 인텔리 여성으로서, 유명한 원산 루시여고를 거쳐 배화여고와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뒤 여성으로는 드물게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다. 시대를 앞서가신 분으로서 한국전쟁때 트럭을 구하여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간 일화는 유명하다.

정경화는 동양인 최초의 클래식계의 스타이다. 원래 피아노를 배웠으나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었으며 1960년 12세 때 미국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그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교육자 중 한 명인 이반 갈라미안 문하에서 사사했다.

이원숙여사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62년 전 가족과 함께 도미하였다. 그녀는 강한 생활력으로 워싱턴과 시애틀에서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운영하였으며 7남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쳤다. 지휘자인 정명훈, 첼로연주자이자 음악감독인 정명화와 바이올린의 정경화 남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레빈트릿콩쿠르

2001년 사망한 미국의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미국 음악계의 대부로서 ‘아메리카-이스라엘 문화재단’을 통해 유대인 음악인의 지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67년 줄리어드음악학교의 이반 갈리미언의 동갑내기 제자인 정경화와 유대인 핀커스 쥬커만은 레빈트릿콩쿠르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클래식음악계가 사실상 유대인들의 앞마당인 상황에서 당시 콩쿠르는 아이작 스턴이 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인 주커만이 우승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시 19살의 정경화는 신들린 연주로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우승자로 정경화를 추천하였으나, 연주도중 활을 놓치는 실수를 범한 핀커스 쥬커만을 우승시키기 위하여 위원장인 아이작 스턴이 재연주를 권유하여 사상초유의 공동우승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정경화는 1970년 바이올린 솔리스트가 갑작스럽게 결장을 하자 런던에서 앙드레 프레빈 지휘의 런던 교향악단을 반주로 하여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것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와 미국 등지에서 그녀를 일약 인기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었다. 


                                           ▲ 누구일까?


                                           ▲ 원조 이은미





                             ▲ 조미미여사


                                     ▲ 앙드레프레빈과 공항에서..


    



















Life is

앵글스 친구들

2013. 3. 30. 22:01

앵글스 친구들

2000년 전까지는 필름카메라 시절이었다.  충남대에 입학했던 88년 3월 사진동아리에 가입했고  앵글스라는 동아리 명이 참 좋았다.

그 때 만났던 충남대 사진예술반(앵글스) 88 동기들이 3년만에 모였다.  

25년 시간이 흘렀다. 

환섭이는 15년 만에 본 것 같다. 건축시공기술사로 지금은 세종시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0喜는 벌써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다들 건강히 지내고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으랴..  

여름에 서천에서 전원생활을 하고있는 경애를 찾아서 모임을 하기로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화첩기행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 대전에서 활발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가 박석신은 자신의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대전의 원도심(구도심이 어울린다)인 중구 대흥동에 있는 박석신의  화랑 겸 문화공간 '문화공간 파킹'에 다녀왔다. 

화가 박석신은 지역에서 잘 알려진 화가이자 문화기획자 그리고 대흥동 문화거리의 지킴이로서 활동하고 있다. 화가 박석신의 배우자가 친구인 인연으로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꾸준한 활동으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지역방송에서 방송되는 화첩기행에 출연하고 있다.



문화공간 주차

지금은 구도심이지만 대전의 원도심의 대표는 선화동, 은행동, 대흥동을 꼽을 수 있다. 40대 이상의 대전사람들에게 대흥동은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대전의 중심이 중구에 있었던 90년대 중반까지 대전 문화의 중심지는 분명 대흥동이었다. 비록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전의 중심축이 서구 둔산동과 유성구로 옮겨졌고 내게도 생활권이 서구와 유성에 한정되어 대흥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추억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전은 새것보다는 역사가 담겨있는 스토리가 필요한 도시이다. 비록 지금은 문화적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상업과 문화가 동반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공생할 때 대흥동의 생명이 이어질 것이고 대전이 부족한 문화자산의 젖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역사깊은 대전여중 앞에 있는 문화공간 파킹은 80년대 유명했던 대전의 세시봉 '팔로미노'가 있던 건물 주차공간을 개조한 자리에 있다. 지금은 1층에 로디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고 있는 이 건물이 '80년대 대전의 아마추어 명가수 신승훈이 통기타를 치며 희야, 라밤바를 열창하던 곳이고 촛불잔치를 부른 이재성이 노래를 했었던 팔로미노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컨트리가수 이정명씨가 운영했던 대전의 명소 '팔로미노'에서 많은 가수들이 탄생했는데 당시 신승훈의 인기는 대단하여서 대전시내 많은 업소와 학교축제를 휩쓸었는데 전성기 목소리로 신승훈이 부르는 희야에 대전의 젊은이들이 열광했었다.  

지금은 추억의 팔로미노는 이 건물 근처의 대전여중 앞 건물 2층으로 이사했고 일년에 몇차례 가보면 여전하신 가수 이정명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구 팔로미노 건물의 반지하공간을 화가 박석신이 운치있게 개조하여 갤러리 및 크로키 수업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계량기도 작품으로 변신했다.


화가 박석신

화가 박석신은 1997년에 처음 보았다.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했는데 오래되어서 기억이 멀다. 

그리고 친구 기라를 문병갔을때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화첩기행 사회자인 그를 보면서 그 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고, 화가의 부인이자 친구인 기라와의 인연으로 그의 작품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림세계가 남다르다. 


             ▲ 박석신 화가의 테라코타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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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회(토요일 인생을 즐기는 모임)

박홍주 여사의 50하고도 몇 번째 생일이다. 서로의 생일을 열심히 축하해주는 토인회 전통에 따라 인천에서 인하대 이동원교수님이 내려오셨고 기타 토인회식구들하고 광섭씨 부부가 옥천 대청댐이 보이는 장계리의 뿌리깊은 나무에서 모였다.

지금도 토요일은 항상 가슴이 설레인다. 오전 수업이 있던 예전 학교에서도 토요일이 주는 편안함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대흥동에서 친구들고 어울리던 토요일 오후의 기억을 잊기는 힘들것 같다. 

오랜만에 옥천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을 달렸다. 유성에서 옥천 ic까지는 약 20분 소요된다. 5분을 더 가면 금강유원지에 갈 수 도 있다. 경부고속도로 최고의 난공사였다는 옥천터널 옆에는 경부고속도로 당시에 순직한 분들의 위령탑이 있다.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 단기간 내에 고속도로를 만든 분들 이시다. 잊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추억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정겹다.



아직은 푸르름이 부족하다. ‘뿌리깊은 나무’ 레스토랑 입구에서 전원주택을 소개하는 책에서 보았던 장계리 와이어패널 주택이 보인다. 독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몇년전에 부모님 집을 지으면서 참고하려고 유심히 보았었는데 건축비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 집처럼 수려한 전경을 가진 장소를 찾는 것이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숙제이다.



'뿌리깊은 나무'라고 하는 잡지가 있었다. 이 상호명도 잡지에서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는데 하여간 옥천의 뿌리깊은 나무는 전원 레스토랑이고 1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금강변 장계리는 대청댐 수몰전까지는 금강이 흐르는 유원지로서 옥천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잔자갈과 금빛 모래가 있던 장계리 금강변에서 여름이면 옥천 보은 사람들이 강수욕을 하곤 했던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가족들이 여기에서 물놀이 했었는데 그 날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강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레스토랑과 커피숍의 분리되어 있다. 입구 오른편에 커피숍이 보이는데 관리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초록이 감싸주면 운치가 있겠지만 짜임새 있는 풍경은 아니다. 2년 정도 계획적으로 관리해주면 색깔있는 장소로 변할 수 있는데, 사랑이 필요하다.


꽃이 피었다. 봄이 된 것을 잊고 있었다. 계절은 변하고 또 변하는데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이 수레는 파스텔톤으로 나무에 색을 입혔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올드한 느낌의 건물이다. 각을 많이 잡아준 유럽 산속 건물같고 내부는 루바로 장식했다. 실내인테리어는  일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전원레스토랑에 부담없이 어울린다.

보은 집을 지으면서 알게된 것은 지붕 경사도의 중요성이다. 우리나라 집들의 지붕경사는 뒷 배경에 보이는 산의 경사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눈에 부담이 적다. 알프스의 집들을 연상해보면 빼쪽한 지붕이다. 왠지 멋있어 보이는 그림같은 집이지만 조금만 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다. 알프스는 엄청난 적설량에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경사를 높여서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그럴 우려가 없으므로 20~30도 정도의 수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당연희 수평이 수직보다는 안정적인 구조이고 시각적으로도 편안하다. 



스테이크로 점심식사를 하고, 생일케잌은 이곳에서 준비한 치즈케잌으로 축하를 해드렸다. 오늘 식사 계산은 부군이신 최박사님이 하시고..


저녁에는 도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가볍게 물오른 이희정여사의 핸드드립커피를 대접했다. 시작은 커피였으나 와인, 코냑, 발렌타인까지 동원되어 늘 그러하듯이 12시까지 난상토론장이 되었다. 사이좋은 두 분은 시인 이이체의 부모님이시다. 내 생일선물로 정경화 LP를 보내셨는데 아직 LP세팅 실력이 부족하여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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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달청에 근무한 기간은 약 12년 이다. 선배들에 비하여 미천한 근무경력이지만 12년 동안 11명의 청장이 있었고 전원 기획재정부 등 외부 기관 출신이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의 경험과 새로운 시각이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되기도 하지만 평균 1년 정도의 재임기간내에 이룰 수 있는 현안들은 많지 않다. 

결국 취임식과 업무보고 그리고 우리 청 설립의 본질을 벗어난 대외용 사업에 치중하는 문제들이 반복되었고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현 정권 출범 후 처음 이루어진 중앙부처 외청인사에서 조달청은 1997년이후 16년만에 내부에서 승진한 수장을 맞게 되었다.

신임 민형종 청장님은 차장재직시절 직장협의회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조달맨으로서 진정성을 가지시고 항상  부하직원이자 후배들에게 베푸시는 모습에 다들 고마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차장 퇴임하실 때 드리려고 직협에서 감사패를 준비했는데 내부 승진을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연기해 놓았다. 청장직을 아름답게 마치실 때 다시 드려야 겠다

외청을 각 부처의 인사적체 해결 도구로 이용하는 낙하산 인사를 막아보자고 대전청서공무원연합의 각 청 노조위원장하고 직협회장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행동을 하였는데 내부승진은 우리 청과 특허청만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신임 특허청장님은 국장시절 지경부에서 오셨다고 하니 실질적인 내부승진은 우리 청이 유일하다. 다른 청 노조위원장님들이 축하한다고 하시는데 미안한 마음 가득이다.

전문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요구와 조달청 업무의 특성상 국익에 도움이 되는 조달행정을 이끌 수 있는 조달 전문가의 발탁은 필연적이었는데 지난 두 정권에서 이루어 지지 않았던 내부승진이 이번 정부에서 이루어 졌다. 지금까지 청장들의 잦은 외부 임용으로 조직의 안정성에 문제가 많았으며 장기적인 내실보다는 한 건위주의의 보여주기 행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공공조달을 통한 효율적인 재정집행을 위하여 조달 업무에 정통한 내부인사의 발탁은 전문성 강화와 나라를 위하여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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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살포하는 염화칼슘이 도로의 파괴자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대전 청사 앞 월평동 도로가 지난 겨울 대량 살포된 염화칼슘의 후유증으로 수습중이다. 수분과 염화물에 의한 포트홀 현상에 의한 도로 균열은 당장 큰 위험을 부르지 않더라 하더라도 이륜 차 등에는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탱탱한 피부가 좋듯이 건강하고 상처없는 도로가 시야 건강에도 좋다. 올해부터라도 대전시는 염화칼슘을 사용을 금하고 1차적으로 물리적 제설, 부가적으로 친환경 제설제를 사용하는 청정 대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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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청암 송건호 선생

2013. 3. 10. 20:20


충청도 옥천 그리고 한겨레신문

백범 김구선생이 우리나라에 끼친 가장 큰 사회적 공헌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이비)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질문받았을 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정답인 '김구선생을 존경합니다' 라는 답을 주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근대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할만한 인물을 마땅히 떠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지식인이라고 알아왔던 사람들의 변절, 그리고 젊은 날의 용기와 기백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었던 노명망가들이 사회에서 버려진다는 두려움과 노욕이 겹쳐 판단력을 상실한 기행적인 퇴행이 거듭되면서 아름다운 결말 이루기 쉽지 않은 사회가 되었고, 지식전달의 매체가 다양화 되면서 얼치기 지식인들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게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갑자기 질문한다면 누구라고 답을 할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난 분이 한겨례신문 사장이셨던 송건호 선생이었다. 청암 송건호 선생이 파킨슨씨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움과 함께 나와 같은 옥천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동향이면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시던 당당한 모습에서 느끼던 뿌듯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청암 송건호

대전은 과거 대전천을 경계로 하여 중구와 동구로 나뉘어 있었다. 대덕군에 속해있던 산내, 구도리, 흑석리, 유성출장소, 신탄 등등 추억의 이름들은 대전이 광역화되면서 대전에 흡수되어 사라진 지명이 되었다. 한편 은진은 논산시에 있다. 은진미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연상되며, 대전 그리고 대덕군에는 그래서인지 은진 송씨들이 많이 살았고, 같은 반 친구들 중에도 송씨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옥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중에 육씨들이 비교적 많았는데 이들이 옥천육씨라는 것은 성장해서 알았다. 과거 대전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면 꼭 출마하시던 친구 외삼촌인 송oo님도 은진송씨 문중표에 많은 기대를 하셔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선거에는 단골 출마를 하셨는데 항상 아쉽게 결과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었다고 들었다.

예상과 같이 송건호 선생은 본관이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대덕군에 살았던 은진송씨인것을 보면 같은 혈족일 것이다. 대덕 동면에 사시던 증조부께서 옥천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하였고,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증약)에서 부 송채찬과 모친 박재호 사이에 3남 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약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고향 옥천에서 해방을 맞은 송건호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자유언론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픽션을 잘 쓰는 작가급 기자들이 판을치는 요즘의 한국언론에서 자유언론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6,70년대 당시에는 송건호 같은 기백이 넘치는 기자들이 있을 때 였다. 송건호는 대학재학시절부터 대한통신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래 19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과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5년 편집국장, 1969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74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신체제는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하였고(백지광고사태),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송건호의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과 사회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씨알의소리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신군부에 의하여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풀려났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 말을 발행하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왜곡없는 날카로운 보도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독재정권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이른바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겨레신문 창간과 죽음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988년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느낀 민주인사,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기자들,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이 앞장서 새로운 신문의 창간 준비 작업에 나섰고, 1987년 10월 30일 3,344명이 창간발간인 대회를 열어 한겨레 창간을 공표하였으며, 1988년 2만여 명이 출연한 50억 원을 국민주로 하여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자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선을 거쳐 1991~93년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폭행 등의  고문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씨병이 발병하여 7년간 투병생활 후 별세하였다. 투병하는 모습을 방송해서 본적이 있었는데 기백이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병약한 노인이 고통받고 있었다. 사망 후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위패는 고향인 충북 옥천 군북면 감노리에 있는 보륜사에 있다.


한겨레는 어디로

1988년 당시 정론지를 표방한 한겨례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경향신문과 함께 충성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이면서 현재 조중동에 맞서는 4대 신문으로 자리잡았으나 규모의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은 아쉬움이다. 지금은 초기의 신문사 설립방향을 잃은 것이 아닐 까 하는 우려를 많이 받고 있는데, 부디 송건호 선생의 유지하였던 정론관을 잃지 말고 좌우의 날개 짓으로 날아가는 새의 왼날개가 되어 균형을 잡아 주기를 기대한다. 




루돌프 제르킨

클래식 음악계에서 유대계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금융과 군사적 패권을 차지하고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뚜렷히 내세울만한 문화적 자산이 없는 미국에서, 그나마 메이드인유에스에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재즈는 흑인노동자들의 고통의 창조물로서 탁월한 감성적 우월함에도 이 유럽이주민들에게 유럽의 고급문화 그 중에서도 고전음악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의 유럽탈출 및 미국으로의 대거 유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주지하듯이 고전음악은 유럽이 주도하였으며, 20세기 이전까지 미국에서의 고전음악은 없다고 할 수 있고, 유대인 음악가들의 미국 이주가 본격화 된 20세기 초부터 미국의 고전음악이 활발해 졌고, 유대계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미국은 탈출구이자 문화적 불모지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유럽문화를 동경했던 미국에서 대도시별로 교향악단들이 창단되었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이 미국산 연주자로서 명성을 높이기 전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에서 태어난 유대인 지휘자들이 대도시 악단을 고전음악 불모지인 미국에 클래식음악 붐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지휘자들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피에르 몽퇴, 모리스 아브라바넬,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아서 피들러, 조지 셸, 유진 오르먼디, 안탈 도라티, 게오르그 솔티 등으로서 미국 클래식음악의 초석을 세웠고, 미국은 전쟁덕에 어부지리로 대지휘자들을 영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클라라 하스킬이 신체적 장애와 유대인로서의 한계로 인하여 나치시대 절망의 시기를 보낸 것은 유명하다. 1903년에 유럽의 보헤미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운이 좋은 음악가였다. 아돌프 부쉬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그들은 32년간 협주를 하였으며, 루돌프 제르킨은 아돌프 부쉬의 딸이자 바이올리스트였던 이레네(Irene)와 1935년 결혼하여 부쉬가문의 일원이 되어 아돌프 부쉬와 그의 형인 지휘자 프리츠 부쉬(Fritz Busch), 동생인 첼리스트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 제르킨과 이레네의 아들 숀(호르니스트), 그리고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Peter Serkin)과 함께 음악 가족을 형성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제르킨은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1939년 미국으로 부쉬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음악적 명성과 유대계 음악인들의 도움으로 커티스(Curtis)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축제 중 하나인 말보로 음악축제를 주재하였다. 그는 평생을 학생들을 가르키면서 연주생활을 하였는데 제르킨이 부쉬의 영향력을 벗어나 세계적인 독주연주자로서 알려진 것은 1952년 아돌프 부쉬가 세상을 떠난 후 부터이다.

 - 최고의 인기피아니스트인 중국의 랑랑도 커티스음악원에서 음악장학생으로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맨으로 거듭낳았다고 한다.



훌륭한 연주자라면 뛰어난 기교와 뜨거운 감성이 이상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호로비츠같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끊임없이 피아노와 씨름하면 연구했으며, 고전 음악 레퍼토리부터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레퍼토리, 그리고 막스 레거의 후기낭만주의 음악과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의 현대 레퍼토리를 두루 연주했다. 그의 전성기는 50~70년대이다. 비록 그의 실황음반은 극히 드물지만 명쾌하고 투명한 그 연주가 나는 좋다.


 

Johanna Martzy (요한나 마르치)

요한나 마르치는 루마니아 태생의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마르치는 섬세하고 기품있는 연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지네트 느뵈, 이다 헨델 등과 함께 1950년을 전후해서 연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6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는 예뇌 후바이(Jeno Hubay,1858-1937)가 원장으로 있던 음악원에 입학하여 후바이가 사망한 1937년까지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후바이는 마르치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3세에 치른 공연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리스트의 친구인 명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를 기념한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23세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였다. 이 무렵부터 유럽과 미국 공연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64년 존 프리차드(John Prichard)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런던 연주회를 마쳤을 때 '타임즈'는 그녀의 연주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르치는 빼어난 주법을 구사하는 위대한 연주자다. 그녀는 서정적인 음악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을 때나 역동적인 부분에 힘을 불어넣을 때,언제나 전력을 다해 연주한다. 첫 번째 악장의 트리플-스토핑(triple stopping)부분은 번득이는 힘을 담고 있었다. G현과 D현으로부터 그가 뽑아내는 톤의 정열적인 긴장감은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이 진행되면서 고요한 부분을 흔치 않은 고귀함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음악적인 기질이 폭넓기 때문이다. 가끔 잘못된 음을 짚기도 하지만 재치있게 처리를 해내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불평을 하겠는가? 느린 아다지오 악장의 탁월함은 어떤가. 고음부에는 마르치만의 비단결같은 순결함이 있고 격조 높은 부분에는 잘 통제된 감정과 유연함이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서 머뭇거리듯 연주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곧 제맛을 되찾았다. 주제부에는 힘찬 리듬을 담아냈고,옥타브 주제의 가락은 힘차고 믿음직스러웠으며 코다의 16분음표에서는 발랄함을 보여주었다."]

 

요한나 마르치는 새털같은 따스한 감성, 고전주의적인 양식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기교의 과시없이 정신적 깊이로 바흐를 풀어낸 그녀의 명연중의 명연이다. 마르치는 1979년 8월 13일,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예스24에서 인용)



 

   ▲ 멘델스존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음반이다. 우아하면서 갸냘픈 연주에 빠져든다. 아끼는 음반목록 1번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브라보 재즈라이프

라틴계음악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라는 멋진 이름에 반해서 음반을 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노예들이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뿌리인 것은 알려져 있다.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 흑인노예의 후예들이 탄생시킨 재즈가 미국의 대표 음악이 되었고, 쿠바에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전통음악이 타락한 쿠바 사회에 맞물려 쿠바재즈가 시작되었다. 새롭게 알게된 것은 쿠바재즈가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 마력이 있다는 것과 이런 노인들이 세상을 달관한 음악을 연주하는 놀라움이 교차되었다.

한국재즈, 들어는 보았지만 생소하다. 알고있는 재즈뮤지션, 류복성, 이정식, 웅산, 나윤선 정도이다. 남무성님의 재즈만화 3권을 보며 옆문으로 입문한 재즈이지만, 재즈 1세대들인 노검객들의 둔탁하지만 농염한 연주에는 감동이 있다. 남겨진 숙제는 1세대 재즈뮤지션들을 기록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도 재즈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 재즈공연 보기가 어렵다. 재즈바라는 간판으로 영업하는 곳에서도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1999년 영화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유사하다. 그래도 영화는 감동이 있고 재미도 있었으며 우리 재즈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블로그도 틈틈히 자료를 모아서 한국 재즈뮤지션에 대한 기록을 올려보고 싶기도 하고, 아울러 재즈공연에 대한 기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거라고 판단된다. 직장내에서도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청취장소가 부족하여 동호인들끼리 개인집에서 음악감상을 하시는데 4,50대 사회주축인 분들의 문화생활이 너무 빈곤하다.


▲ 브라보 재즈 라이프 포스터(이판근, 류복성, 김수열, 조상국, 김준, 박성연, 신관웅, 이동기, 강대관, 강태환, 최선배)


 

                ▲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약칭은 BVSC이다.)


혁명과 음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1959년 성공하였다. 1900~1950년대  혁명전의 쿠바는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국가 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의 역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독재정권하에서 수도 아바나는 타락과 환락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환락의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쿠바음악의 최전성기로서 사교클럽이 번성하였고 당시 수도 아바나의 가장 대표적인 사교클럽이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이다. 우리나라의 예인중에서 기생출신이 많은 것도 비슷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가, 권번과 요리집, 요정같은 무대가 있었기에 예악도 같이 발달하는 현상.

사회주의적 성향인 카스트로 정권에서 사교클럽이 배타되었고 여기에서 주로 연주되던 전통적 쿠바재즈는 침체하였다. 역시 사회주의와 재즈는 어울리는 단어들의 조합은 아니다. 쿠바음악이 세상으로 알려진 전기는 냉전시대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쇠퇴 그리고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음반인 PD R.쿠더와 영국음반사 월드 서킷 사장 N.골드가 쿠바 음악가들의 합주를 녹음하기 위해 1995년 쿠바를 찾았고, 쿠바재즈에 심취한 쿠더는 이듬해 다시 쿠바를 찾아 쿠바 전역에 흩어져 있던 노인 연주자들, 즉 콤바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이브라임 페레르를 주축으로 하여 기타 멤버인 오초아, 포르투온도 등을 영입하여 과거 최고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팀을 만들어 '월드 서킷·논서치'라는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였고, 그 뒤는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세계적인 쿠바음악 붐을 일으키며 6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무려 12만장이 판매되었다.  




                                ▲ 콤바이 세군도


세군도

장 쿠바사람 같이 생긴 세군도는 1907년 생이다. 생존했다면 올해(2013년) 107세. 쿠바의 여러 그룹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였고, 쿠바혁명 뒤에는 담배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참고하자면 쿠바는 에스파냐계, 흑인노예, 토종원주민의 혼혈이 섞여 있다.




                         ▲ 오마라 포르투온도


오마라 포르투온도

년 전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본 조화에서 국민가수 000이라는 꼬리표를 보았다. 스스로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가수가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오마라는 쿠바의 국민가수이자 국보급 가수이다. 80노인이 국민가수로 불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그녀는 1930년 수도 아바나생이다. 10대 중반에 댄서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오랑**과 비슷하다고 첫 인상을 말해주는데 국민가수에게 죄송스럽긴해도 그런것 같기도 하다.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인 '필링(feeling)의 피앙세 미스 오마라 브라운'으로 불리며 쿠바 전역에 명성을 날렸고, 여성보컬 그룹 콰르테토 라스 다이다'에서도 활약하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유일한 여성멤버로서 독특한 음색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였는데, 잘 들어보면 트롯에도 잘 어울릴 듯한 음색이다. 샹송같기도하고 포르투칼 파두의 색깔도 있다. 밀바가 노래부르는 것 같기도 한데 이분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는 우리 정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창단 멤버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쿠바스타일 피아노연주자 루벤 곤잘레스(2003년 사망)


루벤 곤잘레스

2001년 한국공연을 하기도 한 그는 의대생이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연주활동을 하는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길옥윤선생과 유사한 여정이다. 그는 자신만의 피아노스타일을 완성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대외적인 명성은 역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쿠바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받들어 졌다.

우리의 길옥윤선생은 박춘석선생 등과 같은 국민작곡가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주름잡던 분이신데 명성에 비하여 자기관리에 철저하지는 못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이 사업과는 맞지 않는데 지금처럼 경영이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지원되던 시절이 아닌 주먹구구식 경영이 이루어지던 때, 그의 사업실패는 충분한 예견이 된다. 사업실패 후 피신한 일본에서의 구라브(클럽) 운영하였는데 그의 클럽을 찾았던 한 분이 잡지에 기고를 한 것을 보았다. 대음악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는데 길옥윤선생은 암발병후에 임종을 우리나라에서 맞기 위해 귀국하였고 쓸쓸히 사라졌다. 언젠가는 이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한편 루벤 곤잘레스의 연주는 정확한 타이밍이 일품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그는 음악을 시작한 지 50년만에 첫 자신만의 앨범인 Introducing...Ruben Gonzalez을 발표하였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루벤 곤잘레즈를,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훌륭한 피아노 솔리스트"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는데 그는 실질적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음악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 리드 싱어 이브라힘 페레르(2005년 8월6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브라힘 페레르

이브라힘 페레르는 14살때부터 직업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쿠바혁명 후 잊혀졌으나 199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오라마스는 1911년생이다. 15세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90세가 넘어서까지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멤버들이 많아서 여기서 줄인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밤해변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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