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보다는 열정적인 삼바나 탱고가 더 연상되는 나라, 내게는 ‘몬테스 알파’로 친숙한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1903년생이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를 칠레 당국은 1911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한 아라우는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3~1918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직계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lause)의 지도를 받았다. 

위대한 스승 크라우제는 아라우에게 기술적인 기교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라우가 대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다양한 방면의 문화적 소양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아라우는 스승이 원했던 리스트의 승계자로서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호로비츠,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라우는 스승인 크라우제의 타계 후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11세)에 이루어졌다. 이후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과 같은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였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그는 1930년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하였으며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칠레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익군사정권치하의 조국 칠레에서는 연주초청에 응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198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교향악단과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인터뷰하였는데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6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타계했을 때 독일낭만주의 맥이 끊어졌다고 애통해 한 칠레사람 아라우 그는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섬세한 유대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그는 쇼팽, 베토벤, 리스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을 남겼다. 베르나르드 하이딩크의 지휘로 암스테르담 콘세르헤보관현악단(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과 연주한 음반, 50년대 후반 알세오 갈리에라가 연주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음반, 1986년 콜린 데이비스와의 음반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