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ung Wha Chung plays Bruch violin concerto No.1 (1974)






정경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만주족 

역사적으로 만주는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주 동부지역을 뜻한다. 중국 대륙의 주 지배민족을 지금의 한족이라고 한정해 본다면 한족의 시각에서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사례는 몽고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청나라 등, 수 차례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시절에 중국영토의 대부분이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황제, 금나라, 누르하치, 여진, 팔기군, 서태후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만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를 세운 민족이자 우리와는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민족이 과거에 고조선, 발해, 고구려의 역사를 내세우며 만주가 한 때는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영토였다고 주장해도 과거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영토로 한정되었고 그나마 분단국가가 되어 대륙의 섬이 되었지만, 중국은 비록 이민족의 지배를 당했어도 지금의 광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공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보다는 운이 좋다.

 

국사시간에 읍루, 말갈, 여진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자세히 알 기회가 없었고 가르치는 국사선생님들도  발해라는 나라외에는 잘 설명을 못 했었다. 우리가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배우면서도 의문시되었던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고 말갈은 발해의 주력 구성원이었다고 배웠었다. 동북지방에서 우리민족과 여진족이 어울려 살았고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귀화를 많이 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과 상당히 동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인하대학교에는 유독 외국학생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지리적 연관때문인지 중국학생들이 많이 있다. 대학원 수업에서 만난 만주족 후배학생 '샤뢰' 를 보면서 만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샤뢰와 대화를 나눌 수록 한족보다는 확연히 우리민족과 더 가까운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런 관심이 이어져서 최근에 만주족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만주족의 역사-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돌베게) 이다.  


만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샤뢰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그 유명한 산해관 근처가 집이다. 동북 3성은 만주족의 본거지였고 지금도 만족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내용중에 중국미인은 동북 3성에 많이 있다고 한다. 동북3성의 여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얼굴이 갸름하고 흰 피부와 늘씬하고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 남방인 항주에 미인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동북미인이 지금의 미인기준과 잘 맞는 것 같다.


중국은 큰 나라답게 지역별로 사투리도 가지각색이다. 우리나라같이 작은 면적의 나라도 지역별 사투리의 분포도가 높은데 중국의 사투리 차이는 더욱 크기 때문에 광둥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 말이다.

그런데 중국의 표준어는 동북 3성 그중에서도 하얼빈쪽 말이 기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샤뢰는 중국어는 잘 하지만 만주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멸된 언어에 속하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는데 샤뢰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만족들 중에도 많지 않다고 알려준다. 중국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만주어를 알아야 한다. 청조시대의 수 많은 기록이 만주어로 남아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고 한다. 


샤뢰가 우리나라 영화 '활'을 보면서 영화속 만주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너무 신기했다고 하는데 함경도 북방은 사실 조선이 국경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성계가 여진족으로 의심받기도 하며 설령 그가 여진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하중에 이두란(이지란)이라는 여진족 심복이 큰 공을 세워 이씨 성을 받은 기록이 있고 용인에 많이 있는 청해 이씨의 시조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여진족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 여진족 출신 이지란(퉁두란)


물론 우리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역사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불가능한 주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에 단일민족이 한명이라도 있을 까 싶다. 어쩌랴 피는 섞이고 물은 바다에서 합쳐지는 것을...


만주족 출신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랑랑'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수도 봉천(심양)에서 태어난 만주족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인기 피아니스트로서 중국의 국보급 연주자이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1m는 밀려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랑랑이 사용하는 피아노가 바로 스타인웨이 이다. 


                    ▲ 만주족(여진족) 청년 '랑랑'


   - 그런데 피아노 대가들은 전부 스타인웨이를 사용한다.


피아노가 1억원이 넘는 가격에

우리나라에서 스타인웨이(앤손) 피아노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사람은 재벌회장도 아니고 피아노연주자도 아니고 예술의 전당 관계자도 아니고 지방문화예술회관 관계자도 아닌 조달청 국제물자국 외자장비과 악기담당 직원이다. 전국적으로 수요가 많을 때는 1년이면 10대 이상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하기도 하는데 이 제품들은 대부분 각 지방의 문화예술회관으로 공급된다.


직장에서 외자근무를 하면서 우연히 피아노를 구매한 적이 있다. 2번은 스타인웨이이고 1번은 백스타인 이었다. 당시 환율로 대당 1억 3천 이상으로 기억되었던 독일 함부르크산 스타인웨이 D시리즈 피아노에 관심이 생겨서 한국 에이전트였던 코스모스악기에 피아노에 대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받아놓았었다. 

국내 피아노연주자들이 가장 연주하기 원하는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기 때문에 각 지자체의 예술의 전당같은 문화회관은 다른 대안 없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요청하였고,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미국산은 연주자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미국산 스타인웨이가 독일산보다 저렴했지만 절대 선택하지 않고 전부 독일 함부르크산을 희망했었다.


스타인웨이는 독일사람이다.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내에서 먼저 생산을 했는데 나중에 세워진 유럽공장의 품질이 더 우수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역시 미국은 무기가 전공이다.  


블라드미르 호로비츠,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조율사를 비행기로 싣고 다니며 연주하신 분인데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이 분이 사랑한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다. 


                      ▲ 까칠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와 스타인웨인피아노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 소리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클래식 FM의 피아노연주를 듣는 것이고 조금만 시간여유가 있다면 집에 있는 대가들의 피아노곡 음반을 듣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은 대부분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되었으니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왔던 피아노 소리의 주인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인 것이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할 때 기억나는 것은 스타인웨이 전용의자가 우리집에 있는 피아노보다 비쌌고, 억대의 피아노를 구매하는 개인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아이는 클라리넷 부는 걸 좋아한다.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é)


엘가의 첼로협주곡(Elgar Cello Concerto)하면 떠오르는 영국의 여류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지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Jacqueline du Pré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집안은 영국령 채널제도(프랑스 북서해안 인근의 영국령 제도) 출신이다. 프랑스식 이름이어서 프랑스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채널제도를 지도로 보니 이름의 기원이 아마도 프랑스에 인접한 지리적 요인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노교사였고 재클린도 피아노와 음악적 기초를 모친으로 부터 배웠으나 재클린이 4살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 중 첼로소리를 가려 듣고(one of those) 첼로를 가지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클린 뒤 프레의 부모는 재클린이 5살이 되었을 때 런던첼로스쿨(London Cello School)로 보냈고, 2년 뒤에는 길드홀 음악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공부를 하게 했다. 재클린은 1955년 부터 윌리엄 플리스에게 사사했으며 16세에 위그모어 홀(Wigmore Hall)에서 첼로연주자로 공식 데뷔하였다. 

그녀는 1960년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기도 하고, 1962년에는 프랑스에서 폴 토르틀리(Paul Tortelier)에게 그리고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첼로계의 대마왕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첼로의 대가들에게 학습하는 좋은 기회였으나 역시 그녀의 최고 스승은 플린스이다. 


                                ▲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와 재클린



영국은 유럽의 중심에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의 자존감은 낮은 곳이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은 독일 이민자이고 그 이후로 연상되는 음악가는 마땅치 않다. 아마도 비틀즈 이전까지 음악의 변방이었기에 엘가는 소중한 영국 음악가로 대접받는다. 이런 엘가를 세상 밖으로 들어올린 사람은 역시 영국의 재클린이라고 할 수 있다. 엘가의 첼로협주곡 연주로 재클린은 주목을 받았다. 

존 바르톨리 경(Sir John Barbirolli)의 연주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65년 레코딩이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쉽게 드어온 곡은 아마도 이때의 녹음일 것이다. 또한 그녀는 1965년 카네기홀 무대에 데뷔하여 역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아날 도라티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미국인들에게 첼로가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연주경력은 10여년 정도로서 매우 짧지만 대가로서 인정받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재클린 & 바렌보임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클래식 음악계의 유명한 스토리이다. 스타첼로연주자이자 클래식음악계의 샛별로 자리잡은 재클린은 1966년 다니엘 바렌보(Daniel Barenboim)을 만났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바렌보임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고 있는 신성이었다. 누가 먼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재클린은 그와의 결혼을 결정하였고 키작은 유대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의 물리치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결혼을 하였다.

두사람이 만난지 6개월만에 올린 결혼식은 제3차 중동전쟁중이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치뤄졌다. 

전쟁중의 천재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의 결혼은 결국 불행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대단한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이때 결혼식 증인과 결혼기념연주의 지휘를 비호감 지휘자 주빈 메타가 맡았다고 한다.

국민요정이 강행한 유대인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차가움에 대한 탈출이고, 음악적 동지에게 느끼는 사랑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재클린은 부모와 관계가 소원하였고 형제들과의 불화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상황들이 결혼의 충분한 원인이 었을수 있다. 연주활동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농사 짇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는 재클린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결혼을 하면 동반자에게 받는 편안함에 마음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들의 결혼은 음악적 정서를 깊고 섬세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풍부한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피아노 바렌보임, 첼로 재클린, 바이올린 이츠하크 펄만, 비올라 핀커스 쥬커만, 제2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 쥬빈 메타(지휘자 쥬빈 메타와 동일인) 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The Trout'와 같은 많은 실내악곡을 연주하였다. 

위 연주는 동영상으로 쉽게 볼 수 있는데 최고수들의 젊은 시절 모습과 함께 동영상중에 조명해주는 바렌보임의 결혼반지와 재클린의 드레스는 이들이 부부연주자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재클린은 바렌보임과의 협주를 통해서 뛰어난 연주활동을 하였고 훌륭한 레코딩을 남겼지만 한정된 레파토리로 인하여 현대 클래식 음악에 큰 영향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녀의 팬들은 그정도 수준의 재클린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행과 죽음


1971년부터 재클린은 팔의 힘이 빠지고 손가락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연주횟수가 줄었고 그녀의 마지막 연주는  1973년에 있었다. 그녀의 병명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중추신경계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이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도 다발성경화증이었는데 그녀는 비록 뒤틀린 몸이지만 살아나서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재클린은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몸에 마비가 더해가는 불행이 온 것이다. 그녀는 연주활동을 포기한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생활을 하였고 팔과 다리가 굳어지며 온 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다가 1987년 10월 19일 42세로 사망했다. 

역시 신은 잔인한 분이시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나쁜 사람일까


다니엘 바렌보임의 '무언가'를 들어보면 꼭 지휘자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주활동으로 바쁜 그는 예전 가수 이0이나 권투선수 누구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병든 부인을 버린 나쁜 인간의 반열에 올라있다. 

병든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하고 재클린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하는 야사가 정설로 변하여 대부분의 기록들은 바렌보임을의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재클린에 대한 관계에서 비난이 앞선다.

바렌보임은  유대인이지만 반유대주의자로서 괴테의 작품을 따 시작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 갈등지역의 연주자들을 모아서 창단했으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콘서트를 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임진각에서도 공연을 갖은 기록이 있다.

재클린이 투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때 바렌보임이 냉혈한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렌보임이 미국 오케스트라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유럽 파리에 남아서 지휘활동을 한 있던 이유가 런던에 있는 재클린의 병간호때문 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유대계 러시아 바이올리스트 기돈 크래머의 전 부인이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의 만남은 바렌보임을 천하의 바람둥이로 몰아 붙이는 좋은 소재가 되었지만 여성편력이 경력이 되는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한다면 그가 그만한 비난의 대상인지는 찬성하지 않는다. 


                  ▲ 다니엘 바렌보임과  엘레나 바쉬키로바 


음악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바렌보임에게 엘레나와의 동거생활과 두 아이의 탄생은 비난하기보다는 음악을 위한 차선이었다고 억지 변명을 해주고 싶다. 왠지 그가 밉지 않다. 







                              ▲ 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하는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묘비(런던의 유대인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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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io & Music

정경화

2013. 3. 31. 18:00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간 이원숙 여사

2011년 정경화명화명훈 남매의 모친인 이원숙여사가 작고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여사는 함경남도 원산출신의 인텔리 여성으로서, 유명한 원산 루시여고를 거쳐 배화여고와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뒤 여성으로는 드물게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다. 시대를 앞서가신 분으로서 한국전쟁때 트럭을 구하여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간 일화는 유명하다.

정경화는 동양인 최초의 클래식계의 스타이다. 원래 피아노를 배웠으나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었으며 1960년 12세 때 미국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그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교육자 중 한 명인 이반 갈라미안 문하에서 사사했다.

이원숙여사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62년 전 가족과 함께 도미하였다. 그녀는 강한 생활력으로 워싱턴과 시애틀에서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운영하였으며 7남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쳤다. 지휘자인 정명훈, 첼로연주자이자 음악감독인 정명화와 바이올린의 정경화 남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레빈트릿콩쿠르

2001년 사망한 미국의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미국 음악계의 대부로서 ‘아메리카-이스라엘 문화재단’을 통해 유대인 음악인의 지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67년 줄리어드음악학교의 이반 갈리미언의 동갑내기 제자인 정경화와 유대인 핀커스 쥬커만은 레빈트릿콩쿠르에서 일전을 겨루었다. 클래식음악계가 사실상 유대인들의 앞마당인 상황에서 당시 콩쿠르는 아이작 스턴이 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인 주커만이 우승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시 19살의 정경화는 신들린 연주로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우승자로 정경화를 추천하였으나, 연주도중 활을 놓치는 실수를 범한 핀커스 쥬커만을 우승시키기 위하여 위원장인 아이작 스턴이 재연주를 권유하여 사상초유의 공동우승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정경화는 1970년 바이올린 솔리스트가 갑작스럽게 결장을 하자 런던에서 앙드레 프레빈 지휘의 런던 교향악단을 반주로 하여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것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와 미국 등지에서 그녀를 일약 인기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었다. 


                                           ▲ 누구일까?


                                           ▲ 원조 이은미





                             ▲ 조미미여사


                                     ▲ 앙드레프레빈과 공항에서..


    




















루돌프 제르킨

클래식 음악계에서 유대계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금융과 군사적 패권을 차지하고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뚜렷히 내세울만한 문화적 자산이 없는 미국에서, 그나마 메이드인유에스에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재즈는 흑인노동자들의 고통의 창조물로서 탁월한 감성적 우월함에도 이 유럽이주민들에게 유럽의 고급문화 그 중에서도 고전음악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의 유럽탈출 및 미국으로의 대거 유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주지하듯이 고전음악은 유럽이 주도하였으며, 20세기 이전까지 미국에서의 고전음악은 없다고 할 수 있고, 유대인 음악가들의 미국 이주가 본격화 된 20세기 초부터 미국의 고전음악이 활발해 졌고, 유대계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미국은 탈출구이자 문화적 불모지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유럽문화를 동경했던 미국에서 대도시별로 교향악단들이 창단되었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이 미국산 연주자로서 명성을 높이기 전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에서 태어난 유대인 지휘자들이 대도시 악단을 고전음악 불모지인 미국에 클래식음악 붐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지휘자들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피에르 몽퇴, 모리스 아브라바넬,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아서 피들러, 조지 셸, 유진 오르먼디, 안탈 도라티, 게오르그 솔티 등으로서 미국 클래식음악의 초석을 세웠고, 미국은 전쟁덕에 어부지리로 대지휘자들을 영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클라라 하스킬이 신체적 장애와 유대인로서의 한계로 인하여 나치시대 절망의 시기를 보낸 것은 유명하다. 1903년에 유럽의 보헤미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운이 좋은 음악가였다. 아돌프 부쉬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그들은 32년간 협주를 하였으며, 루돌프 제르킨은 아돌프 부쉬의 딸이자 바이올리스트였던 이레네(Irene)와 1935년 결혼하여 부쉬가문의 일원이 되어 아돌프 부쉬와 그의 형인 지휘자 프리츠 부쉬(Fritz Busch), 동생인 첼리스트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 제르킨과 이레네의 아들 숀(호르니스트), 그리고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Peter Serkin)과 함께 음악 가족을 형성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제르킨은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1939년 미국으로 부쉬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음악적 명성과 유대계 음악인들의 도움으로 커티스(Curtis)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축제 중 하나인 말보로 음악축제를 주재하였다. 그는 평생을 학생들을 가르키면서 연주생활을 하였는데 제르킨이 부쉬의 영향력을 벗어나 세계적인 독주연주자로서 알려진 것은 1952년 아돌프 부쉬가 세상을 떠난 후 부터이다.

 - 최고의 인기피아니스트인 중국의 랑랑도 커티스음악원에서 음악장학생으로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맨으로 거듭낳았다고 한다.



훌륭한 연주자라면 뛰어난 기교와 뜨거운 감성이 이상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호로비츠같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끊임없이 피아노와 씨름하면 연구했으며, 고전 음악 레퍼토리부터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레퍼토리, 그리고 막스 레거의 후기낭만주의 음악과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의 현대 레퍼토리를 두루 연주했다. 그의 전성기는 50~70년대이다. 비록 그의 실황음반은 극히 드물지만 명쾌하고 투명한 그 연주가 나는 좋다.


 

Johanna Martzy (요한나 마르치)

요한나 마르치는 루마니아 태생의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마르치는 섬세하고 기품있는 연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지네트 느뵈, 이다 헨델 등과 함께 1950년을 전후해서 연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6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는 예뇌 후바이(Jeno Hubay,1858-1937)가 원장으로 있던 음악원에 입학하여 후바이가 사망한 1937년까지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후바이는 마르치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3세에 치른 공연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리스트의 친구인 명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를 기념한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23세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였다. 이 무렵부터 유럽과 미국 공연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64년 존 프리차드(John Prichard)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런던 연주회를 마쳤을 때 '타임즈'는 그녀의 연주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르치는 빼어난 주법을 구사하는 위대한 연주자다. 그녀는 서정적인 음악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을 때나 역동적인 부분에 힘을 불어넣을 때,언제나 전력을 다해 연주한다. 첫 번째 악장의 트리플-스토핑(triple stopping)부분은 번득이는 힘을 담고 있었다. G현과 D현으로부터 그가 뽑아내는 톤의 정열적인 긴장감은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이 진행되면서 고요한 부분을 흔치 않은 고귀함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음악적인 기질이 폭넓기 때문이다. 가끔 잘못된 음을 짚기도 하지만 재치있게 처리를 해내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불평을 하겠는가? 느린 아다지오 악장의 탁월함은 어떤가. 고음부에는 마르치만의 비단결같은 순결함이 있고 격조 높은 부분에는 잘 통제된 감정과 유연함이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서 머뭇거리듯 연주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곧 제맛을 되찾았다. 주제부에는 힘찬 리듬을 담아냈고,옥타브 주제의 가락은 힘차고 믿음직스러웠으며 코다의 16분음표에서는 발랄함을 보여주었다."]

 

요한나 마르치는 새털같은 따스한 감성, 고전주의적인 양식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기교의 과시없이 정신적 깊이로 바흐를 풀어낸 그녀의 명연중의 명연이다. 마르치는 1979년 8월 13일,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예스24에서 인용)



 

   ▲ 멘델스존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음반이다. 우아하면서 갸냘픈 연주에 빠져든다. 아끼는 음반목록 1번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브라보 재즈라이프

라틴계음악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라는 멋진 이름에 반해서 음반을 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노예들이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뿌리인 것은 알려져 있다.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 흑인노예의 후예들이 탄생시킨 재즈가 미국의 대표 음악이 되었고, 쿠바에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전통음악이 타락한 쿠바 사회에 맞물려 쿠바재즈가 시작되었다. 새롭게 알게된 것은 쿠바재즈가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 마력이 있다는 것과 이런 노인들이 세상을 달관한 음악을 연주하는 놀라움이 교차되었다.

한국재즈, 들어는 보았지만 생소하다. 알고있는 재즈뮤지션, 류복성, 이정식, 웅산, 나윤선 정도이다. 남무성님의 재즈만화 3권을 보며 옆문으로 입문한 재즈이지만, 재즈 1세대들인 노검객들의 둔탁하지만 농염한 연주에는 감동이 있다. 남겨진 숙제는 1세대 재즈뮤지션들을 기록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도 재즈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 재즈공연 보기가 어렵다. 재즈바라는 간판으로 영업하는 곳에서도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1999년 영화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유사하다. 그래도 영화는 감동이 있고 재미도 있었으며 우리 재즈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블로그도 틈틈히 자료를 모아서 한국 재즈뮤지션에 대한 기록을 올려보고 싶기도 하고, 아울러 재즈공연에 대한 기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거라고 판단된다. 직장내에서도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청취장소가 부족하여 동호인들끼리 개인집에서 음악감상을 하시는데 4,50대 사회주축인 분들의 문화생활이 너무 빈곤하다.


▲ 브라보 재즈 라이프 포스터(이판근, 류복성, 김수열, 조상국, 김준, 박성연, 신관웅, 이동기, 강대관, 강태환, 최선배)


 

                ▲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약칭은 BVSC이다.)


혁명과 음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1959년 성공하였다. 1900~1950년대  혁명전의 쿠바는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국가 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의 역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독재정권하에서 수도 아바나는 타락과 환락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환락의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쿠바음악의 최전성기로서 사교클럽이 번성하였고 당시 수도 아바나의 가장 대표적인 사교클럽이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이다. 우리나라의 예인중에서 기생출신이 많은 것도 비슷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가, 권번과 요리집, 요정같은 무대가 있었기에 예악도 같이 발달하는 현상.

사회주의적 성향인 카스트로 정권에서 사교클럽이 배타되었고 여기에서 주로 연주되던 전통적 쿠바재즈는 침체하였다. 역시 사회주의와 재즈는 어울리는 단어들의 조합은 아니다. 쿠바음악이 세상으로 알려진 전기는 냉전시대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쇠퇴 그리고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음반인 PD R.쿠더와 영국음반사 월드 서킷 사장 N.골드가 쿠바 음악가들의 합주를 녹음하기 위해 1995년 쿠바를 찾았고, 쿠바재즈에 심취한 쿠더는 이듬해 다시 쿠바를 찾아 쿠바 전역에 흩어져 있던 노인 연주자들, 즉 콤바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이브라임 페레르를 주축으로 하여 기타 멤버인 오초아, 포르투온도 등을 영입하여 과거 최고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팀을 만들어 '월드 서킷·논서치'라는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였고, 그 뒤는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세계적인 쿠바음악 붐을 일으키며 6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무려 12만장이 판매되었다.  




                                ▲ 콤바이 세군도


세군도

장 쿠바사람 같이 생긴 세군도는 1907년 생이다. 생존했다면 올해(2013년) 107세. 쿠바의 여러 그룹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였고, 쿠바혁명 뒤에는 담배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참고하자면 쿠바는 에스파냐계, 흑인노예, 토종원주민의 혼혈이 섞여 있다.




                         ▲ 오마라 포르투온도


오마라 포르투온도

년 전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본 조화에서 국민가수 000이라는 꼬리표를 보았다. 스스로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가수가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오마라는 쿠바의 국민가수이자 국보급 가수이다. 80노인이 국민가수로 불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그녀는 1930년 수도 아바나생이다. 10대 중반에 댄서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오랑**과 비슷하다고 첫 인상을 말해주는데 국민가수에게 죄송스럽긴해도 그런것 같기도 하다.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인 '필링(feeling)의 피앙세 미스 오마라 브라운'으로 불리며 쿠바 전역에 명성을 날렸고, 여성보컬 그룹 콰르테토 라스 다이다'에서도 활약하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유일한 여성멤버로서 독특한 음색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였는데, 잘 들어보면 트롯에도 잘 어울릴 듯한 음색이다. 샹송같기도하고 포르투칼 파두의 색깔도 있다. 밀바가 노래부르는 것 같기도 한데 이분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는 우리 정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창단 멤버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쿠바스타일 피아노연주자 루벤 곤잘레스(2003년 사망)


루벤 곤잘레스

2001년 한국공연을 하기도 한 그는 의대생이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연주활동을 하는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길옥윤선생과 유사한 여정이다. 그는 자신만의 피아노스타일을 완성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대외적인 명성은 역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쿠바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받들어 졌다.

우리의 길옥윤선생은 박춘석선생 등과 같은 국민작곡가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주름잡던 분이신데 명성에 비하여 자기관리에 철저하지는 못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이 사업과는 맞지 않는데 지금처럼 경영이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지원되던 시절이 아닌 주먹구구식 경영이 이루어지던 때, 그의 사업실패는 충분한 예견이 된다. 사업실패 후 피신한 일본에서의 구라브(클럽) 운영하였는데 그의 클럽을 찾았던 한 분이 잡지에 기고를 한 것을 보았다. 대음악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는데 길옥윤선생은 암발병후에 임종을 우리나라에서 맞기 위해 귀국하였고 쓸쓸히 사라졌다. 언젠가는 이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한편 루벤 곤잘레스의 연주는 정확한 타이밍이 일품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그는 음악을 시작한 지 50년만에 첫 자신만의 앨범인 Introducing...Ruben Gonzalez을 발표하였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루벤 곤잘레즈를,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훌륭한 피아노 솔리스트"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는데 그는 실질적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음악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 리드 싱어 이브라힘 페레르(2005년 8월6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브라힘 페레르

이브라힘 페레르는 14살때부터 직업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쿠바혁명 후 잊혀졌으나 199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오라마스는 1911년생이다. 15세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90세가 넘어서까지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멤버들이 많아서 여기서 줄인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밤해변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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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신이 들린 여자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13번 미츠코 우치다의 환상적인 연주를 들었다.

신들렸다.

모짜르트 스페셜리스트 그러나 니혼진이며 비호감 외모라는 한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유명한 피아노선생님도 잘 모르고 있어서 의외였지만 그녀의 연주에 집중해보면 좋은 소리로 보답한다.

미츠코의 연주는 과대 포장된 연주자들과 비교하면 과유불급이라 하겠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보다는 열정적인 삼바나 탱고가 더 연상되는 나라, 내게는 ‘몬테스 알파’로 친숙한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1903년생이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를 칠레 당국은 1911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한 아라우는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3~1918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직계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lause)의 지도를 받았다. 

위대한 스승 크라우제는 아라우에게 기술적인 기교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라우가 대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다양한 방면의 문화적 소양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아라우는 스승이 원했던 리스트의 승계자로서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호로비츠,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라우는 스승인 크라우제의 타계 후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11세)에 이루어졌다. 이후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과 같은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였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그는 1930년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하였으며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칠레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익군사정권치하의 조국 칠레에서는 연주초청에 응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198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교향악단과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인터뷰하였는데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6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타계했을 때 독일낭만주의 맥이 끊어졌다고 애통해 한 칠레사람 아라우 그는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섬세한 유대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그는 쇼팽, 베토벤, 리스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을 남겼다. 베르나르드 하이딩크의 지휘로 암스테르담 콘세르헤보관현악단(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과 연주한 음반, 50년대 후반 알세오 갈리에라가 연주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음반, 1986년 콜린 데이비스와의 음반이 알려져 있다.







판석

빈티지오디오는 진동을 파하려고 한다.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 밑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도산 판석 사진이다. 

빈티지 오디오 기기 밑에 받쳐놓은 판석들이 멋있어 보였고 진동방지에도 좋을 것 같아서 판석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까 하는 고민했는데 익산 판석공장에서 쉽게 구했다.  총 10장을 만들었는데 육중한 무게에 가정용 카트가 휘어져 버렸다.

판석은 주로 건물 외벽용으로 사용하지만 색상이 수려한 것은 실내 인테리어 용으로 이용된다. 

우리가 흔히 건물 외벽에 사용된 석재를 대리석이라고 부르는데 오용이고 건물외벽용은 화강암 또는 수입 현무암이다. 

대리석은 산성비와 화학적으로 반응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외벽에 사용이 불가능하며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화강암

한국다움에 화강암이 포함될 수 있다. 화강암은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한국스러운 돌이다. 

석가탑, 미륵사지 석탑, 정림사지 석탑, 다보탑, 석굴암, 다듬이돌, 절간의 지줏돌, 묘비석, 광화문 바닥판석의 공통점은 모두 화강암이다. 

전라북도 익산, 경상남도 거창, 경기도 포천 등에서 많이 생산되는 화강암은 석영, 운모, 장석의 혼합체로서 가공성이 우수하여 훌륭한 석재 가공품의 재료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특히 익산의 황등석은 철분이 적어  최고의 품질로 인정 받는다.

벡제 석탁들이 1500년이 지난 현재도 철분에 의한 색상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백제 석공 장인들의 신라로 유입 석굴암, 불국사 등의 석재 문화재의 탄생에 기여했을 것이다.

우리 국토의 25% 이상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풍화 등으로 부스러진 화강암은 모래가 되어 강으로 흘러가고 국토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금수강산의 원천은 화강암이다. 

정수기 없이 살기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지만 화강암의 정수작용이 맑은 물을 만들어 준다.  화강암은 한국이다...


대리석

우리가 화강암을 오용하여 대리석이라고 부르지만 무뉘가 아름다운 대리석은 원래 중국 대리지방에서 나오는 석재이어서 대리석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국내에서도 일부 생산되었지만 색상이 단조롭고 양이 적어서 경제성이 없다. 중국의 석재 가공기술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흙과 나무가 풍부했던 우리나라는 흙을 이용한 건축이 발달했지만 돌이 풍부한 중국은 석재를 이용한 건축이 발달되었다. 중국 호텔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실내외 인테리어가 대부분 석재로 되어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대리석은 생산량이 부족하여 대부분 이태리나 중남미에서 원석을 수입을 하여 중국 최대 석재단지인 하문이나 산동성 평도 등에서 가공을 하여 전 세계로 수출을 하고 있다.


오석

가끔 오디오 받침용 오석판매가 중고장터에 나오는데 한 번도 오석을 볼 수는 없었다. 가끔은 물처리를 해서 광택을 입힌 것들이 검정색으로 보이 긴 했지만 대부분 화강암 이었고 현무암도 일부 보였다. 오석은 검정색 돌 즉 까마귀색이 나는 돌을 뜻하는데 학교나 관공서 입구에 있던 큰 검정색 표지석이나 서예용 벼루에 사용되는 것을 연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령벼루가 유명한데 보령이나 웅천에 가면 아직 석재공장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은 오석 광산에서 채취되는 원석의 양이 미미해서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무암

기타 석재로서는 제주도 현무암이 있는데 강도가 낮은 단점이 있지만 기공이 많고 외관이 수려하여 장식용으로 사용하면 깊이 있는 외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외부 반출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요즘 건물에 사용되는 현무암은 대부분 중국 수입석이다. 현무암의 미세기공은 훌륭한 정수작용을 해서 제주 삼다수를 만들어 주는 제주의 영물이다.

음향기기용 받침대로는 어떤 돌이든 사용가능한데, 화강암도 물갈기 처리를 하면 광택이 높아지고 색상도 진해져서 외관이 수려해진다. 그러나 화강암보다는 기타 무늬가 수려한 석재를 두께 3cm, 옆면 라운드를 주어서 만들어 사용하면 인테리어 효과도 얻을 수 있다. 

Audio & Music

세셈트리오

2013. 1. 18. 00:02



왕년의 유명 트리오

셈 트리오의 대표곡은 '나성(羅城)에 가면'이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에는 흑백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세셈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카바사라는 멕시코 악기를 흔들면 시원한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던 동덕여대 성악과 출신의 권성희, 쉐그린 전언수의 형 전항 그리고 홍신복으로 구성되어 당시에 접하기 어려운 라틴계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었고 후에 전언수가 홍신복 대신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팀의 리더는 권성희가 아니고 음대생이던 그녀를 발굴한 전항이다. 

시골아이가 당시 미국이라는 천조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니 나성(羅城)이 어디인지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불러대는지 궁금했었는데, 막상 LA가 로스앤젤레스이고 그 로스앤젤레스를 '나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웃음이 나왔다.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메리카 이민이래 미국에 정착한 수많은 한인중에서 보편적인 좋은 잡을 가지고 주류사회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서 곤궁한 삶을 이겨보거나 정신적 자유를 찾 찾으러 간 나성에서 청소, 세탁, 의류판매, 스토어, 자바시장 봉제, 등등으로 이방인의 고단함을 겪었을 교포들을 재미교포 사업가라고 우러러 보던 시절의 향수인 것 같다.  미국에 대한 동경만 가득하고 정보가 부족했던 그 시절 여자 연예인들이 미국교포와 결혼한 사례가 많은데 미국에 가면 동경하는 교포사업가분이 결국 옷장사, 식당, 세탁소가 주업이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겠다. 

이 작품도 고 길옥윤선생의 작품이다. 이 분 참 대중가요에 남긴 씨가 많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그분은 가시고 이분들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변해가는데 7080에서 본 모습은 여유가 있었고 노래는 더 좋았다.

이런 분들이 공연할 장소가 7080이나 가요무대 말고도 더 많았으면 그리고 대전에서도 공연이 있었으면 한다.




              ▲ 오랜만에 들어본 현이와 덕이 음반이다. 세련지는 않았지만 장덕만의 색깔이 있다. 한번은 보고 싶었는데. 


 천재는 왜 불행할까

장덕과 장현 남매, 현이와 덕이로 기억되는 한국의 카펜터즈는 90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 잊혀져가던 이들 남매는 최근 장덕이 작곡하였던 주옥같은 노래들이 되살아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내 기억속에서도 다시 떠올려졌다.

남매의 부친은 개성고보와 연세대를 나온 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고 장규상, 모친은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나온 재미 서양화가 이숙희 여사라고 한다. 예술적이 관점으로 보면 클래식음악가와 서양화가의 만남은 이상적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서양화가가 추구하는 삶과 철학적인 남자의 삶은 달랐던지, 남매의 부모는 장덕이 9살때 이혼을 하였고 남매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다. 철학과 종교가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긍정적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면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더구나 종교와 이상에만 존재하는 삶에 가족들이 함께하기는 어렵고 정상적인 가족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구도자로서 실천적 철학을 꿈꾼 ‘뿐철학자’ 장규상에게 가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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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 젊은날의 이숙희, 말년의 장규상



뿐철학

장덕과 장현은 부모로 부터 이어진 예술적 재능과 함께 장현은 바이올린을 장덕은 피아노를 공부하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고, 부모의 갈등과 부친의 기행 등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가 이들 남매의 조숙함과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는 삶을 원했던 모친에 비하여 부친 장규상의 기인적 삶과 철학에의 심취는 분명 가정불화를 낳았다. 수시로 집을 비우거나 양로원, 고아원에 대한 무료공연 그리고 지인의 빚보증 등 지금으로 보면 빵점아빠의 모든 것을 갖춘 부친에 대한 갈등이 있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이 흥인국민학교 2학년때 이혼을 하게 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두 남매는 같은 집에 살지 못하고 각각 고모와 지인의 집에 맡겨진다. 지금은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덜하지만 당시에 감수성이 예민한 남매가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인생의 짐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규상을 검색해보면 ‘뿐철학’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볼 수 있고, 제자가 수천 명이라고도 나오는데 자기 성찰과는 반대로 현실 도피적인 철학이 남겨 준 현실은 10대 남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하겠다. ‘뿐철학자’ 장규상을 따라 결국 남매는 도봉산의 한 사찰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학교를 가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으며 지냈다고 하는 이 기간들을 생각 해 보면, 이 후 수차례 일어나는 장덕의 자살기도는 그녀의 극도의 센티멘털한 감수성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도 있는 삶의 괘적이다.


한국의 카펜터즈

1974년 장덕은 서울사대부중에 다니던 중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남매가 겪는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부친과의 관계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있던 이숙희 여사는 한국의 카펜터즈 듀엣을 결성하게 해 준다. 1975년 장현과 장덕 남매는 드래곤랫츠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 데뷔하였고, 당시부터 장덕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는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었다.

장덕은 안양예고를 졸업했다. 1977년 입학한 장덕은 그 유명한 소녀와 가로등을 작사작곡하여 진미령의 노래로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출전하였다. 당시는 국제가요제가 유행하여 각 국에서 경쟁적으로 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장덕은 3년 연속으로 입선하는 재기를 보여주었다.

장덕과 오빠 장현은 훌륭한 음악듀오였지만 분명 음악적 재능은 장덕이 앞섰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남매는 당시의 여건상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없었고 음악적 재능과 함께 귀여운 외모였던 장덕은 팬들에게 납치를 당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결국 장덕은 솔로로 독립하였고 장현은 락그룹사운드 ‘현이와 거룩한 성’을 결성하여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재혼으로 받은 충격과 부친과의 갈등 그리고 가출 소동 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던 장덕은 결혼한 오빠 장현의 집에서 독립하였는데 혼자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위기였고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였다.


미국생활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던 장덕의 미국생활은 3년정도 였다. 딸의 불안한 생활과 자살기도를 걱정하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을 설득하여 1979년 10월 LA로 불러들인다. '나성에 가면'의 나성에서 당시 비주류였던 한국사람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백인들이 기피하는 자영업이었다. 장덕이 미국에서 어떤 일을 했을 까 궁금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사회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탈출구이기도 했다. 안양예고를 졸업한 장덕은 LA의 델몬트칼리지 음악과에 입학하였다가 테네시대학에 편입하여 음악을 전공하였다. 장덕은 짧은 결혼생활의 기록이 있는데  1981년 컨트리음악의 성지인 내쉬빌에서 교회오빠인 교포와 결혼을 하였다. 그 후 리패밀리라는 가족그룹을 결성하여 음악활동(교회나 교포사회 공연)을 하였으나 1983년 가을 이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성장기의 아픈 기억은 치유가 힘든가 보다. 내가 겪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도 성장기의 상처가 남긴 치유할 수 없는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방송에서 보았던 80년대 장덕의 쾌활함이 있었다. 뒤에 숨겨진 아픔도 많았겠지만 그런 장덕이 좋았다.

장덕은 귀국 후 너무 많이 변화된 대중음악계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졌으나 이번에도 오빠의 도움이 있었다. 장덕의 재기를 위하여 장현은 1985년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였고 타고난 재능과 보조개와 단발머리로 기억되는 상큼한 외모의 장덕은 "나너 좋아해 너나 좋아해" "이제 안녕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장덕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녀가수로서 지금은 원로가수급인 이선희, 정수라와 더불어 '바지 삼총사'로 불렸다. 장덕은 또한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김진아의 '묻지 말아요' 등 히트곡을 양산하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불행한 남매

장현은 장덕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진정으로 장덕을 아끼고 평생을 보호자로서 자기 희생을 한 오빠이다. 그는 장덕을 위하여 밤무대 출연을 정리하고 장덕,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을 소속가수로 하는 코아기획이라는 음반매니지먼트회사를 운영했다.

장현은 그 후 혀가 붓고 호흡장애를 겪다가 설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 음악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혀의 일부를 절단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다른 언론에서는 치료를 거부하고 안수기도 등 종교적 완치를 고수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는데, 설암은 대부분 발병증상을 인지하기 어려워서 상당히 악화된 후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오빠의 보호자가 된 장덕은 심각한 불면증을 겪었고, 친구집에서 지내던 장덕은 마포 염리동 진주아파트에서 기관지확장제, 수면제 과다복용 등에 의한 약물중독으로 사망하였고 사망과 같은 해 8월 16일 장현도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96년 봉천동 자책에서 부친 장규상도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덕은 그녀의 재능보다 비극적인 가족사가 먼저 회자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최근 그녀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되면서 주옥같은 명곡들이 부활하고 있다. 장덕은 출중한 능력을 가진 아티스트였지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2% 부족한 음악적 완성도와 아티스트임에도 인기에 연연했던 조급했던 모습들이 장덕의 존재감을 떨어뜨리고 단명하는 불행을 가져왔다.



강원도, 군입대의 추억

89년 12월에 우편으로 보내 온  군입대영장에는 도트프린터로 1990년 2월 6일 102보충대라고 찍혀 있었다. 102보충대는 강원도 춘성군(춘천시)에 있었고, 대전에서 춘천가는 버스편을 몰라서 대전역에서 서울역으로 다시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89~90년도 2012년 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 찬바람이 불던 청량리역에서 흘끔 본 신문에 장덕 요절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1990년 2월 4일 장덕이 죽었다. 









크리스마스 캐롤

어린 범진이가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캐롤을 듣고 있으면 따라서 부른다. 

겨울이면 즐겨 듣게되는 캐롤음반 3개를 골라보았는데 예수님 팔아서 이익 추구하는 상술로 제작했다기 보다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예수탄생을 감사하게 되는 아트로 승화된 캐롤... 

1. 레온타인 프라이스, 2. 조안 서덜랜드, 3. 에디 히긴스 트리오


레온타인 프라이스과 카라안의 베를린필이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리사이틀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전성기시절 카라안과 함께한 크리스마스 리사이틀 앨범이다. 격조있고 촉촉한 음색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항상 들어도 차분한 기분을 얻는데 좋은 작품이 어떤 것이지를 알 수 있다.


조안 서덜랜드표 옥구슬 크리스마스 캐롤


옥구르는 소리의 서덜랜드표 캐롤. 호감형 외모가 아니지만 즐거운 목소리다.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재즈 크리스마스 캐롤



히긴스가 작고하여 다시는 이런 연주가 들려질 수 없지만 최고의 재즈크리스마스 앨범이다.


※ 레온타인 프라이스 앨범을 직장 아줌마 동료들에게 선물했는데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