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학번 이상봉선배님댁 방문


'사진'에 대한 관심은 중학교때부터 이다. 

아버지에게서 올림푸스 카메라를 선물받고 붉은 빛 암실에서 흑백사진 인화를 하는 내모습을 상상했었는데, 그리고 보니 대학에서 사진동아리에 가입하는 용기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

 

충남대 사진예술반은 THE ANGLES (앵글스)라고 부른다. 69년 창립했으니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88년 3월 입회했을 때 기억나는 선배분들이 대학원생이던 80학번 이상봉(교원대 교수), 한승희(공주대 교수) 선배, 군입대가 늦어져서 군휴학기간이 4년이 된 81학번 이원봉(대덕대 교수), 최재헌(연변과기대 교수), 82~83학번 이승호, 김진평(재캐나다), 한경희, 배연성(충청대 교수), 송인서, 84 남정수, 85 성소영, 유영우, 86 박진석(일본 해상보안대학 교수) 선배 등이다.


늦가을이 깊어가는 일요일 오후 한국교원대 이상봉교수께서 청주에 있는 교원대 뒤 본인 자택으로 앵글스 OB회원들을 초대했다.  





                        늘 씩씩하신 85학번 성소영 누님




교원대에 근무하시며 이곳에 꽤 오래전에 자리 잡으셨다고 하신다. 군입대 전에 보고 처음이니 25년 만이다. 오늘은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특별 이벤트로 유영우 선배님의 공연이 있었고, 기념으로 동영상 촬영...





 


좋았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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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시장) 서울치킨  (0) 2014.01.25

워싱턴 D.C.


2014년 9월 말 미국출장

인천에서 워싱턴까지 직항은 워싱턴 덜레스 공항 (Dulles International Airport, IAD)에 착륙한다.

델라스공항은 익숙한데 덜레스는 글쎄!!!

공항으로 픽업나온 여행사 렌트카가 믿음직스럽다. 10기통 개솔린, 엄청난 파워로 우리를 모셔준다.





워싱턴 D.C.는 공무원의 도시이다. 

도착과 함께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관공서 투어를 시작했다.

미술관, 국회의사당, 펜타곤, FBI, 백악관









백악관 앞은 시위대가 열심히 자기주장을 한다. 질서를 지키는 건 좋은데 그다지 임팩트 부족으로 효과적이진 않아 보였다.

여러 나라 방송기자들이 백악관을 배경으로 뉴스화면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뉴스도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화면이 많았던 것 같다. 



제퍼슨기념관

백악관을 내려보는 헌법의 아버지 제퍼슨이 꾸짓는다. 

행정부, 입법부 똑바로 해...






투어버스도 다니고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박원순시장의 화환도 보인다. 너무 낡아서 꽃만 남겨놨으면 좋겠다.





Lincoln Memorial and  “I Have a Dream”

링컨기념관앞에서 워싱턴기념탑이 보인다. 

우리의 소재승 군은 열심히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인공호수 바닥은 이렇다.




이 곳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연상하게 된다. 

이 영화는 1963년 워싱턴대행진을 모티브로 삼았고... 




당시 워싱턴대행진에 20만명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아래 사진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에서 매년 1월 3째주 월요일은 국경일이다. 자신의 생일이 국경일이 될 만큼 미국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마틴루터킹 목사는 평화적인 흑인인권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을 한 분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에서 20만명의 군중들에게 연설한 'I have a dream'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로 기억되고 있는데, 영상이 남아있다.

물론 이분 40전에 암살되셨다.





미국 '임을 위한 행진곡' We Shall Overcome

존 바에즈가 불렀다. 당시 존바에즈와 밥딜런이 행사에 참가했는데 밥딜런 참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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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 서울치킨


90년부터 92년까지 군생활의 대부분을 강원도 인제의 13보급대대 경리로 보냈다. 보급대대 경리가 하는 일이 그다지 난이도가 높지는 않아서 주로 국민은행에서 대금수령, 병사보수지급, 부대운영비지출 등을 했는데 이런 일보다는 필요시 언제라도 부대 외부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 좋았었고 더 좋았던 것은 결산을 위해 인제에서 원주로 출장이라도 갈 때는 삼류영화를 보고 원주의 대표시장인 중앙시장을 구경하는 재미였다.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대전에도 대전역에서 왼편으로 대전의 대표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이 있는데 대전역이라는 교통의 우월함으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친구 대현이가 추천한 중앙시장에서 유명한 치킨집이 서울치킨이다. 통닭집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알랭들롱을 닮은 주인아저씨가 항상 분주하시다.

 

서울치킨을 잘 정리한 블로그가 있어서 링크했다. 


http://blog.naver.com/126043?Redirect=Log&logNo=140189477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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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스 - 바베큐파티  (0) 2014.10.27

앵글스(충남대 사진예술반) O.B. 신년모임


앵글스 오비의  2014년 신년모임은 대부분 動보다는 靜을 추구하는 특성에 맞게 

대전 근교의 대청호 주변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둘레길을 걷는 일정이다.

모임장소는 동구 추동의 식당 '더리스'인데 초행길이다.

토요일 오후에 익숙치 않은 길이 멀기도 했지만 약속시간을 1시간이나 착각하고 

못된 게으름이 발동하여 1시간 30분이나 지각을 했다.

 



멕시칸 요리사가 보이긴 했는데 일하는 솜씨가 구색맞추기 같아 보였다. 

다른 멕시칸 가수 아저씨는 이 겨울에 야외무대에서 열창 중.




묽이 맑다. 

이 곳의 물이 대전시민들의 음용수로 사용되고 있고 주변에 취수장이 있다고 한다. 

배스나 붕어도 많겠구나 했는데 대청호에서도 상수원보호구역은 낚시 금지.

덕분에 을씨년스러운 날씨이지만 넉넉한 여유로움이 있고 자연이 잘 보호되어 있다






후배 둘을 빼고는 전부 80년대 학번이다. 80년대 스럽게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으로 보니 제일 왼쪽의 경희선배님은 김환기 화백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연구소에 근무하시면서 30년 이상 사진작업을 하고 계시는 경우선배님은 며칠 후 할아버지가 되셨다. 






다음 행선지는 근처 주산동 연꽃마을이다.

연꽃마을이라고 해도 이 겨울에 연꽃이 피어날 수 는 없는 일이어서 연밭은 을씨년 스럽다. 

대전 근교에는 대부분 은진 송씨 가문의 재실이 자리잡고 있다. 

연꽃마을 주변도 역시나 한옥형태의 집들은 전부 송씨들 재실로 보인다.




연꽃마을에는 대청호 화가인 송영호님의 화실이 있다. 

앞마당에서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지나가는 길손들이 한 번을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http://blog.daum.net/naho49/



100년이 넘는 시골집을 개조하여 작업실로 사용하시는 송영호 화백은 

유화를 그리시다가 10여년 전부터 대청호 풍경을 수채화로 담고 계신다. 

화가가 내어주는 커피를 마시고 마을 뒷편 절경을 감상하러 이동.







산 정상에서 수만년간 세상을 내려보던 화강암들이 대청댐으로 인하여 물속에 갖혀버리는 날벼락을 맞았다. 

공룡알처럼 보이는 저 바위는 풍화작용 및 반복 침수현상으로 수십년 동안 껍질을 내어 주고 있다. 

언제가는 저 화강암 알도 모래가 되어 흐르고 굴러 바다로 가면

어느 한 놈은 해수욕장의 모래가 되고 어느 한 놈은 아파트의 벽이 되어 바위로 살던 그 시절을 그리워 하며 아 옛날이어를 외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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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옥천) 옥천성당

2013. 8. 1. 22:43


(옥천성당) 24년전에 왔었다.


1989년 여름은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20주년 기념전시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20살 어리숙한 판단력에 행사준비가 버거웠는데, 행사준비도 어렵지만 아직 사진에 대한 테크닉이 부족하여 여러 곳을 다니며 무턱대고 셔터를 누르던 때였다.


전시회 사진 작품마감 시간은 빠르게 다가오는데 동아리 선배가 옥천으로 가자고 했었다. 옥천가는 길 반가왔다. 

대전역에서 몇백원의 기차운임을 내고 비둘기호를 탔다.  옥천역까지 약 20분이었다.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회원들하고 삼양리 언덕에 있던 옥천성당에 올랐다.

빨간 장미가 흐드러져 여름 성당과의 조화가 아름다웠던 옥천성당에서 지금은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강지수선배가 모델이 되어 앵글속으로 들어왔다.


그 사진은 후에 군휴가를 나온 84학번 임ㅇㅇ선배님이 군부대에 걸어 놓겠다고 액자로 만들어서 가지고 가셨다. 

상상한다. 그후로 오랜동안 부대원들의 연인으로 남았을 지수선배를...

 

             ▲ 화강암을 사용한 구조물은 우리나라 건물과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옥천성당은 초기에는 신자가 많지 않던 시골성당이었고, 붉은 벽돌을 사용한 아산의 공세리성당에 비하면 풍기는 멋이 소박하다. 분명히 공세리성당이 화사하고 근사한 모습이긴 하지만 밝은 하늘색으로 칠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옥천성당의 소박함이 더 편안하고 카톨릭과 어울려 보인다. 

















         ▲ 1989년에도 이 작은 길을 걸어 올라갔었다.









            ▲ 성당 앞에 옥천여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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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는 충청도 영동 양산에 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여러 사정으로 짧게 보낼 수 밖에는 없는 사정이다. 

근 몇년간 안구정화 한다며 해운대 인파속에 섞여보았는데, 이번 여름 휴가는 직장 동료들의 교육일정과 중복되어서 7월을 포기하고, 8월 1, 2일 양일을 이용해서 집에서 밀린 책정리를 해 보았다.

 

책만 보면 좋았는데, 책장사 책과 양서를 구분하는데 근 10년이 걸렸다. 분류별 주제를 정하여 선별된 장서 3,000권이면 개인서고를 구성할 수 있다는데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지질이 나쁜 오래된 책을 보면 눈 건강에 좋을리도 없지만 하루종일 재채기를 하고 책에서 뿜어나오는 냄새도 집 환경에는 좋지 않다. 


영국사는 1,000년 넘는 역사가 있는 고찰로서 충북의 남부 3군중에서 보은의 법주사, 옥천의 용암사와 함께 영동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영국사라는 이름때문에 잉글랜드를 연상하지만 충북 영동 양산면에 있다.  대전에서는 영동IC에서 접근하는 것 보다 옥천에서 접근하는게 빠른데 옥천 이원면의 묘목시장에서 멀지 않다. 대부분 시골풍경이 논밭에 작물이 심어져 있는데 옥천 이원면은 우리나라 최대 묘목단지 답게 도로주변 논밭에 각종 묘목들이 가득하고, 덕분에 풍경이 시원하고 목가적이다.   


일부 비포장도로와 양면통행이 불가한 좁은 산길이 산중고찰에 대한 운치를 돋게 해주기도 하지만 지금 공사중인 포장이 빨리 완공되었으면 한다. 누교지라는 저수지를 지나 계곡을 쫒으면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이 상당히 넓고 잘 조성되어 있다. 물론 주차료와 입장료도 없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명산인 계룡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수려하고 여성스러운 자태가 있다. 영국사 주변은 마치 계룡산 초입부처럼 약간은 붉은 빛이 도는 화강암으로 된 고봉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고목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유명 사찰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고 사찰 앞은 난전 분위기를 띄우고 있고 무개념 관광객들로 수도분위기를 찾기 어려운데 비하여 '영국사'에서 받는 첫 느낌은 사찰다운 사찰이다. 



만세루를 오르는 계단은 투박하고 세월의 때를 간직했지만 화강암을 기계절삭해서 만든 계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손으로 가공하고 세월이 닦아놓은 자연스러움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주차장에서 만세루를 통해서 대웅전으로 올라 갈 수 있다. 만세루에서 보이는 대웅전이 약간 작게 보인다. 

영국사라는 명칭의 기원이 국태민안을 뜻한다고 적혀있다. 과감하게 호국불교를 내세우는 사찰보다는 부처님 말씀에 가까울 것 같다.   









상층부가 허전해 보이는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을 사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석탑이다. 아마 탑의 재료인 호강암은 주변에서 채취했을 것 같다.  석탑의 최고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아닐까...  





우리민족의 전통종교인 샤며니즘과 중국에서 수입된 불교가 결합하여 탄생한 산신각이다.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이 탐닉하는 목표중의 절대적인 가치이기에 민생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형태로 발전했다. 






아득히 먼 서쪽에 있다는 극락세계를 법당으로 옮긴 것이 극락보전이다. 대부분 절에서 대웅전 주변에 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서방정토의 주인이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평소에 무심코 둘러보던 곳인데 이 곳도 각종 규칙이 있어서 내부는 극락정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니 사전에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 반야와 백구


         ▲ 참선 장소여서 유일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암.



영국사 주변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가까운 거리에 부도와 탑이 있다. 아무리 천년고찰이어도 스님들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렇게 정숙하게 유지되기 힘들텐데 이 날도 스님 한 분이 열심히 대웅전을 걸레질 하고 계셨다. 












 


아이에게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다. 아이의 소원은 수학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영국사 주차장을 나오면 입구에 민가가 몇채 있다. 아마도 절과 공존하는 장소인 것 같다. 오랜만에 명산고찰을 보았다. 이런 수준 높은 사찰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충청북도 영동이라는 위치가 주 원인일 것이다. 어쩌면 그 덕분에 잘 보존되었겠지만, 혹시 시간이 된다면 영국사를 들러보는 것도 좋은 여행의 추억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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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산) 공세리성당

2013. 5. 26. 18:07


내포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앞자를 따서 유래한 명칭이다. 충청도는 과거 공청도로 불리기도 했는데 공청도의 공은 충청남도의 대표 도시인 공주를 지칭하고 있다. 공주는 과거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청이 있던 도시였지만 1932년 충청남도청이 인근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충청남도의 주도권은 대전으로 옮겨져 온 것이다. 

80년 넘게 대전에 자리잡고 있던 충청남도청이 광역시로 분리된 대전에서 2012년 내포신도시라고 명칭된 홍성 홍북과 예산 삽교 경계지역으로 이전했다. 새롭게 조성되는 도시를 내포신도시로 명칭한 것은 충청남도의 역사적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내포라는 명칭을 듣기는 했지만 익숙하지는 않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는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맥으로 가야산의 앞 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고 한다'라고 썼다.  여기에서 10고을은 홍성(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예산(덕산, 예산), 당진(신창, 면천, 당진) 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포는 홍주목의 관활지인 충청남도 남부에서 경기 평택까지 통칭한다고 할 수 있다. 

내포에는 삽교호 방조제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공식방문지였던 삽교방조제는 과거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온천인 온양온천과 연계하여 신혼여행지로 유명했던 역사가 있다. 

내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미곡을 배경으로 예산에는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13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이 예산에 설립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대원군과 남연군묘 도굴사건

대원군의 부친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었지만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흥선대원군이 야인시절 내포지역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젊은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파락호로 과장되어 알려져 있다.  기방출입을 하며 욕을 당하거나 '상갓집 개' 라고 비웃음 당하며 생활했다는 야사들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대원군을 한나라 유방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게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근거가 부족하며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그가 안동김씨 세력을 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왕실의 대표성을 갖는 인물로서 꾸준히 왕가와 접촉이 있었고 재산이 적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흥선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왕조이지만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왕가의 일족으로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안동김씨와 노론세력의 독점적 권력과 횡포를 뒤집어 보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차분히 준비된 그의 노력이 철종의 죽음을 앞두고 신정왕후와의 정치적 결합을 성공시켜 고종을 즉위시킴으로써 조선후기 마지막 사회적 변혁을 시도해 보았으며 방심하고 있던 안동김씨 세력에게 최소한의 복수를 한 것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취한 개혁정책들이 비록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임오군란 때 구식군인들은 대원군을 구원자로 보았음은 그가 민중에게는 구원자로 보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고종 5년에 발생한 독일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을 들어본 기억들이 있다. 총인원 140명이 참가한 국제도굴단이면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다. 미국의 사주로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기획한 이 사건은 조선에서 이익을 거둘 목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친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시체와 부장품을 가지고 조선의 통상개방 협상용으로 사용하려고 한 저질 행각이었다. 이 사건은 주범 오페르트, 미국인 전주 젠킨스, 프랑스 선교사 페롱, 그리고 조선인, 백인, 말레이시아인 필리핀인 중국선원 등 총 140명의 대규모 도굴단이 구성되었는데, 묘지를 도굴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 일이 얼마나 추악한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요즘의 대기업 약탈적 약자에 대한 횡포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이 사건의 출발은 국제도굴단이 행담도(서해안 행담도휴게소가 있는 그 섬)에 차이나호를 착륙시키면서 시작된다. 행담도가 이런 유래가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비교적 수심이 깊은 행담도에 착륙한 북독일국적의 차이나호는 그레타호를 부선으로 가지고 왔고 도굴범들은 부선을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덕산에 도착한 후 러시아군병으로 위장하여 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그러나 석회로 다져진 무덤의 특성과 묘지기등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에 실패하고 도주한 사건이다. 이때 길안내를 맡은 조선인은 선교사의 말을 따른 천주교인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쇄국정책이 강화되고 애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의 삵꾼 역활을 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의 폐해가 크다.

공세리성당

사랑은 추억을 타고 흘러가지만 우리는 대전역에서 KTX를 타고  25분, 천안아산역에 도착한다. 허무하게 짧은 시간이어서 잠시의 여유도 갇기 힘들다. 커피한잔을 호호 불어가며 도착한 천안아산역에서 생각해보니 아산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과거 아산은 아산현충사가 대표하는 도시였는데 요즘 생각나는 것은 삼성아산공장, 선문대학교, 순천향대학교, 온양온천, 아산만방조제 정도이다. 

출장중에 근교의 명승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번 출장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고 천주교 성지로 이름 높은 공세리성당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박세리도 아니고 공세리라는 명칭이 특이하기도 하고 정감이 가는데 아산출신 최ㅇㅇ님께서  내포지역(당시는 아산, 서산, 한산, 청주, 옥천, 보은회인 등 포함한 40개 마을)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이 있던 자리여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설명해 준다. 

충남지역에는 오래된 성당들이 많은 데 중국을 통한 서해안 으로의 천주교 전파가 그 이유인 것 같다. 김대건 신부가 내포(당진) 출신이라는 것은 이날 알았지만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신부의 부친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김대건 신부와 같이 유학하였던 두번째 조선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도 홍주 다락골(지금의 청양 화성) 출신이라고 하니 충청남도 서쪽은 초기 천주교가 전파에 주도적인 역활을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성당인 공세리성당은 본래 '공세리공소'였던 곳을 신자가 급증하자 1895년 6월 드비즈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 공세리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1922년 현재의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이 완성되었고 그뒤로 강당, 별관, 기타 증축 등이 이루어 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주차장에서 언덕 위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운치있다.




                    ▲ 성당에는 300년이 넘는 나이의 보호수가 많이 있어서 성당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 고딕양식의 본당



                 ▲ 내포의 평야지대와 멀리 아산만이 보인다

.


















                  ▲ 박씨 순교자 3형제(박의서, 원서, 익서)를 추모하는 비




                   ▲ 32인의 순교자 현양비외 기념부조물






                                       ▲ 성지순례를 오신 어르신들이 많았다.


언덕위에 위치한 공세리성당은 멀리서 보면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있지만 운치가 있고 소박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는 곳이다. 성당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충청도 시골 모습인데 주차장부터는 너무 멋진 성당이 나타난다. 사실 공세리성당은 예전부터 드라마나 CF에 자주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김태희가 주연한 아이리스도 이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보다는 조선시대부터 한국 천주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으며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는 천주교 성지인 공세리성당은 우리에게 차분안 휴식을 안겨주는 산소같은 곳이다. 평일이었는데도 성지순례라고 표시된 관광차들이 많이 보이고 안드레아, 마리아 등등의 이름표를 붙인 어르신들이 많이 방문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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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여행의 백미는 이화원(이허위안)


두 남동생이 중국에 정착한 지 15년이고, 덕분에 중국방문이 일상화 되었다. 

중국은 방문이 거듭 될 수록 진한 매력이 있다.  중국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있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지역이 보물같은 곳이다.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목표는 약 10년 전 부터이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정보부족으로 일단 가까운 곳부터 쉽게 시작하는 방법을 택했다. 해안도시부터 내륙으로 예정을 해는데 방대한 지역의 여행은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모되므로, 직장에 매여있는 현실에 맞게 매년 1, 2차례 동북부부터 차근차근 내려오고 있다.


2007년 초여름 상하이에서 김ㅇㅇ님을 지인의 소개로 만났었다.

모 그룹사의 상하이지사장을 지내신 분인데,  회사를 사직하시고 상하이에서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해박한 중국역사의 지식과 달변을 바탕으로 약 20년간 중국 여행온 분들의 가이드를 많이 해주셨다고 한다.

이 분 도움으로 중국 근대와 현대가 중첩된 상하이의 진수만을 즐길 수 있었고, 중국 정통 삭스핀(게살스프 아니고)을 제대로 맛보았다(처음 먹는 사람들은 비린 맛에 제대로 먹지 못했다). 

 

상하이에서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중국인들이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엔 천당, 땅엔 소주, 항주)라고 부르는 소주(쑤저우)에 갈 수 있다. 요즘도 중국인들은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뇐다고 하는데, 상하이 여행중에 동방명주에만 갈 수 는 없는 일이어서 쑤저우를 관광하면서 가이드를 맡아주신 김ㅇㅇ님의 적극 추천으로 중국 정원의 자존심으로서 피서산장, 유원, 이화원과 함께 중국 4대 명원 중 하나인 졸정원을 관람했다.


졸정원이라는 이름은 '한거부라는 시의 한 대목인 '졸자지위정'에서 따온 것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실각시킨 베이징 권세가들을 비꼬는 말이다. 졸정원은 일본 정원만큼 인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편안한 스타일도 아니다. 

중국 정원의 3대 특징은 수목, 물, 암석이라고 한다. 졸정원은 이중에서 물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으로서 정원의 절반이 호수로 이루어 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6월의 남부지방의 습한더위와 엄청난 수의 중국관광객들 속에서 정신도 없었지만 졸정원에서 감탄사를 남발하는 중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졸정원을 나와 한산사로 이동하면서 4대 명원으로 꼽히기에는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에 가장 중국다운 유적지를 물었을 때 가이드 김ㅇㅇ 님은 중국미의 정수를 보려면 천안문, 자금성, 만리장성이 아닌 이화원이라고 단언했다.

만리장성보다는 이화원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적지라는 것이 의외였는데, 서태후가 애용했던 황실 별궁과 정원으로 알려져 있는 이화원을 그해 가을 중국출장중에 반나절의 시간을 활용해서 가 볼 수 있었다.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금나라의 행궁으로 처음 조성된 이화원은 엄밀히 본다면 만주족의 유적지이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북경의 용수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곤명호를 확장하였고, 1750년 청나라 건륭제 때 대폭 확장되어 실질적인 청나라의 황실정원이 되면서 청의원으로 불렸다. 

2차 아편전쟁(1860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약탈하고 파괴하였으나 이후 서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시 서태후는 자신의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하여 중국 해군 북양함대의 자금 은 30만냥을 유용해서 이화원을 재건하였고 그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주로 이곳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

1990년 의화단의 난으로 이화원이 파괴되었으나 1902년 서태후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었다.

 

이화원 입구에서 그 거대함에 놀랐는데, 총면적의 3/4를 차지하는 인공호수인 쿤밍호(昆明湖)는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광대한 크기여서 바다처럼 보인다. 항저우(杭州)에 있는 시호(西湖)을 모방하였다는데 시호보다 더 화려하다.

 

 

거대한 인공호수와 인공산, 아름다운 건물

 

청조의 패망하고 1924년 이화원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90년이 더 지난 후에 이화원 관광을 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청조의 마지막과 서태후의 포스를 연상해보면서 화려한 중국미를 볼 수 있는 것은 이화원 여행의 맛이다.

하루 안에 다 볼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화원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이화원 관광이 시작된다. 만수산(완셔우산(萬壽山))은 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인데 높이가 60m라고 한다.

건축물과 조형물의 화려함에 감탄을 하게 되지만 이 멋진 유적지가 서태후를 위한 그녀만의 공간이었다고 하니 유럽의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동양의 서태후를 누님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

만수산 정상에 있는 불당 즈후웨이하이(智慧海)에서는 이허위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낙수당(런서우디엔, 樂壽堂), 서태후만을 위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덕화원(더허위안(德和園)),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파이윈디엔(排云殿) 등이 유명하다.

 

이화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축물은 창랑(長廊)이다. 길이 778m,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인 창랑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1만 4천여점의 회화가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어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베이징에 가면 가장 먼저 가보아야 하는 장소는 만리장성도 아니고 자금성도 아닌 이화원이다. 중국여행을 한다면 중국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이화원에서 중국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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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이관과 오삼계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인 중국 허베이성 산하이관(산해관)은 산과 바다가 모여있는 곳이어서 산해관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동쪽 끝이며 험준한 지형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며 베이징과 가까운 군사적 중요성때문에 명나라시절 만족이 세운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오삼계가 지휘하는 명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함락당하자 오삼계는 자신이 방어하던 주적 청나라와 연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토벌한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적장이 적을 섬멸하는 꽃놀이 패를 가지고 베이징에 무혈입성한 만주족 장군들은 베이징 주민들을 전부 몰살하고 심양에 수도를 삼으려고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오삼계의 배신이 명나라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산해관은 베이징과 가깝다. 가깝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국토종단보다 먼 거리이지만 베이징에서만 둘러보는 만리장성이 아니고 만리장성의 시작점이자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이곳을 보는 것도 중국여행의 백미가 될 듯 하다. 일단 올해 방문을 계획해 보기로 하고 탕산대지진을 알아보자. 



탕산대지진


인하대학교에 유학을 온 '상'씨 성의 중국학생이 있다. 허베이성 산해관이 근처가 집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탕산대지진에 몇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 물어보았더니 표정이 영 반가와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작년에 탕산대지진을 소재로 한 '대지진'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지만 재난을 영웅담으로 미화시켜 극복하는 헐리우드식 상투적인 스토리가 남아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당시의 지진피해의 처절함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가지고 있던 지진트라우마는 넘어선 것 같다. 

나중에 중국학생  '상'군이 자신의 조부도 그 때 작고하셨다고 말을 해준다. 이런 실수다. 


베이징은 허베이성에 있다. 베이징과 인접해 있는 항구도시가 천진이고 베이징과 천진 윗쪽에 탕산시가 있다. 1976년 7월 28일 03시 42분 54초, 중국 허베이성하(河北省) 탕산(唐山) 펑난(丰南)일대에 강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관동대지진은 점심때 발생하여 불이 많이 났고 폭동으로 발전하여 조선인 학살을 포함하여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탕산대지진은 새벽에 그것도 광산 일대와 인구 밀집지역에 지진이 집중되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도시를 벗어난 외곽에는 붉은벽돌로 대충지은 집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뼈대도 없이 벽돌로만 지어진 이런 허술한 집들이 무너지지 않는게 신기해 보일 정도인데, 70년대 당시 이런 집들이 대부분이었던 인구 100만명의 도시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다. 지진으로 사망자만 24만명(65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이 넘었으며, 100만명 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가 1976년이다. 이 해에 중국에서는 대사건이 많았다. 주은래 총리 사망, 주덕 원수 사망, 모택동주석 사망, 4인방의 체포와 문화대혁명의 종말 등등 이다. 76년에 탕산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모택동(毛泽东)은 피해관련 보고서를 여러번 세심하게 검토하는등 이재민 구호작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며,  8월 4일 당산(唐山)에 도착한 구호인력은 본격적인 재해 구호 활동을 시작했고, 지진 구호 본부를 설립, 10만명이 넘는 인민해방군, 2만명의 의료진과 지원인력등을 재해지역에 투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았던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재난극복 영웅담이다. 

사망 2달전 모택동은 판단력에 문제가 많았고 중국인의 아버지 총리 주은래는 사망하였으며 정국은 사인방의 폐해가 극심했을 때이다. 대지진 후 폭동이 발생한 일본과는 다르게 탕산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지 않고 구조작업이 이루어 졌다. 제대로 구호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인력에 의존한 게 현실인데 부실한 정치와 사회적 안전망 부족에 항상 애꿎은 인민들이 피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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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악단

계룡산 3대 사찰인 신원사 경내에 있는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산신각이 중악단이다. 산신각이 사찰내에 있는 것은 불교에 녹아있는 토속신앙의 자연스러운 형태이기도 하고 구원과 기복의 구분보다는 삶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픈 인간다움의 표현일 수 있다.

계룡산 과 무속신앙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과거 전국에서 가장 무속인들이 많았던 곳이 계룡산이고 지금도 공주시 반포면에서 계룡면쪽으로는 곳곳에 신을 모신 굿당들을 볼 수 있다. 계룡산에서 야간산행을 하면 기를 받기위해 치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을 볼 수 있다. 영험한 신령이 약해지면 계룡산에서의 기를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전국 3곳의 신령한 명산에 산신각을 만들어 국가의 제를 지냈는데, 북쪽 묘향산에는 상악단, 나라의 중심이자 한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신도안 근처 계룡산자락에 중악단을 그리고 남쪽 명산 지리산에 하악단을 만들어 나라를 위한 제사를 산신에게 지냈던 것이다.

현재 북한에 있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은 조선시대에 멸실되었고, 계룡산 중악단은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중악단 내부 - 산신령이 위엄이 없다



신원사에 가보자

대전에서 공주쪽으로 가면 공암을 지나면서부터 계룡산이 보인다. 무속적인 뉘앙스가 있는 계룡산은 웅장하지도 호방하지도 않은, 볼수록 아름다운 갸냘픈 여성미를 보여주는 수려한 산이다. 계룡산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라는 유명한 삼대사찰이 있다. 지금은 도예촌으로 유명한 상신리에도 과거에는 고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이 없고 우리들 기억속에는 동학사와 갑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계룡산을 가려면 대부분 대전에서 공주방면으로 가다가 박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주차장이 있는 동학사방면으로 가는 게 일반적 여행코스이다. 주차장과 가까와서 접근성이 좋은 동학사는 처음본 사람은 황당할 정도로 계룡산과 어울리지 않는 멋없음에 실망을 하게 만든다. 6.25 전쟁때 절의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 원이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절의 부족한 품격에 대찰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동학사인지 모르고 절을 지나가곤 한다. 

멋없는 동학사이지만 청도 운문사, 김천 청암사와 함께 비구니를 교육하는 대표적인 강원이다.  


      ▲ 박정자를 검색하면 연극배우가 나온다. 박정자는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던 이 마을에 정자 나무가 많아서 유래되었다.

갑사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국어책의 수필 갑사가는 길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가 맺어준 인연의 남매의 전설이 있는 남매탑 이야기와 잘 버무려진 갑사의 추억은 갑사라는 임팩트가 강한 절 이름과 어울려져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가장 어울리는 절은 '신원사'라고 할 수 있다. 무속신앙, 울긋불긋하고 치렁치렁한 옷, 그리고 칼춤을 추는 무속인, 기복신앙 등과 잘 버무려진 계룡만의 이야기가 있는 절이라고 생각 된다.

계룡산에 오면 계룡의 이야기를 찾기보다는 동학사를 들러보고 식당에서 동동주를 걸치고 산으로 직행하는 운치없음보다는 잔걸음으로 신원사를 둘러보고 계룡산의 묘미를 읽어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그리고 중악단에서 그리 신통해보이지 않는 산신령께 한 마디 건내보는 즐거움도--





기장시장은 해물시장

부산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기장시장이다. 멸치나 짚불장어로 유명한 대변항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장시장에 가면 갈치의 유혹이 있다. 기장시장 초입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장이 아니고 예장인 기장교회를 지나서 시장으로 들어가면 내게는 일본어 보다 이해가 늦게 오는 진한 부산사투리를 사용하는 상인들의 호객(초청)이 있다. 가장 많이 파는 생선은 수입산 킹크랩이다. 바다 갑각류 알러지가 있는 내게는 그림의 떡이고 덕분에 우리 가족들도 킹크랩을 기대하지는 않고, 기장시장에 오면 늘 들르는 시장내 성화상회에서 아주머니가 추천하는 기장미역을 사고 시장구경을 한다. 




갈치구이/찌게의 지존 못난이식당

충청북도는 통금도 빗겨간 내륙지방이다. 내륙에서 갈치요리는 항상 구이나 졸임이었지 싱싱한 갈치요리는 본적도 상상해본적도 없다. 그래서 갈치하면 늘 비늘이 벗겨지고 눈이 풀려서 동태와 사촌간인 갈치만 보았는데 어머니의 갈치구이는 김창완이 노래하는 엄마와 고등어만큼 맛있고 좋았던 기억이다.

산갈치는 10년전에 서해안 보구치낚시할 때 대낮에 내 낚시대에 물려 준 멍청한 갈치가 처음이다. 청개비를 물고 온 바보갈치였지만 은빛몸매는 늘씬한 치어리더 같았다. 물론 아름다움은 잠깐이고 토막이 되어 횟감으로 사라졌지만 아름답고 맛있었다가 나의 기억이다.

2000년 할머니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시간강사를 할 때 지역유지이신 교수분께서 사준신 갈치찌게를 처음 먹어 보았다. 경북을 경계로 하여 신선도의 문제로 윗 지방은 졸임을 먹지만 아래지방으로 갈수록 국물의 양이 많아져서 부산으로 가면 찌게가 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안동 간고등어도 신선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탄생하였는데 같은 유래일 것이다. 논현동 진동횟집에서 내온 미역국에 갈치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미역국은 소고기나 굴로 끓이는 것으로 알고 있던 상황에서 신기했던 기억도 있지만 역시 음식은 주변의 로컬푸드가 최고의 맛을 가져오는 것 같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갈치구이나 '찌게집은 많지만 내가 느껴본 맛중에는 잊을 수 없는 BEST OF BEST였다. 식당은 시골시장에 어울리는 규모와 건물이었고 늘 받는 화투번호표를 가지고 기다리면 사전 주문을 하면 기다리는 시간은 거의 같다. 싼가격은 아니지만 1인분은 1.5인분정도의 양이다. 6인이 4인분정도 시키면 적당하고 주문량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누가 못난이 에요 하고 물었을 때, 갈치를 굽던 여사장님이 내가 못난이에요 하고 답을 하신다. 시원시원하신 분이다. 그 뒤로 몇 차례 더 가보았는데 장사가 잘 되는지 못난이 사장님의 얼굴에 여유가 묻어난다. 미국에 간 이웃들도 한국에 오면 못난이식당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맛이기 때문이다. 먼 길이지만 매년 나를 식객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곳이다.




여행

하코네 온천 달걀

2012. 12. 30. 19:50

일본여행중에 방문한 하코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복학전까지 남은 8개월간 무엇을 해야하나 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할 때 만난 대학 동아리 선배 박ㅇㅇ형이 내게 일본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선배는 그냥 한 말인데 아직 단순했던 내가 간다고 하는 바람에 그해 가을 3개월간 일본에 체류하게 되었고 어설픈 일본어 회화를 익히게 되어 지금도 잘 이용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92년 당시 일본에 같이 갔던 박ㅇㅇ형은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국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몇년 전 일본출장중에 시간을 내어 도쿄에서 유학중인 류여사님하고 같이 한 하코네여행이다.  

한국사람들은 규슈쪽 온천을 많이 찿아서 인지 도쿄근처에 있는 가나가와현에 있는 최고의 온천유락지인 하코네는 유명세에 비하여 한국인들이 많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과 많은 온천, 그리고 잘 조성된 철도를 이용한 여행은 좋은 기억이었다. 하코네에서 관광객들이 손에 들고있는 다마고봉지를 보고 우리도 유황다마고를 샀다. 검정색 껍질과는 다르게 안쪽은 황금색이다. 맛은 고소하다. 




유황은 종교적으로 지옥과 연결되는데, 지옥불에서 울부짓는 영혼들과 유황이 끓는 지옥이 두려워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분들을 생각해보면 이 곳에서는 그런 유황이 뿜어내는 신비로움을 몸으로 느끼며 유황이 선물하는 유황달걀을 맛볼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황가스로 가득한 산악지대를 넘어가야만 하코네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죄 많이 지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단체여행을 오면 정신개조 될 듯하다. 






대전에는 100년 역사의 유성온천이 알려져 있고 나도 유성에 살지만 일반 대중탕과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유성은 온천보다는 유흥업소가 많이 있는 것이 특색이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유명 온천은 온천에 집착하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에 상업화 되었는데, 독일사람은 맥주공장을 먼저 만들고 일본 사람들은 온천개발부터 한다고 하더니 당시 남한에서의 유명 온천인 동래온천, 해운대온천, 유성온천, 온양온천 등은 당시에 개발이 되었다. 지금은 코걸이귀걸이 온천법을 악용한 사이비온천이 남발되어 온천욕의 의미가 퇴색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하코네는 온천자원의 풍부함과 함께 훌륭한 자연경관을 조화롭게 이용하여 우리나라 온천하고는 비교불가인 자연친화적이며 온천같은 온천을 할 수 있다

가이드 북에 나와있는 천산온천을 들어갔다. 입구에서 노천탕으로 가야하나 실내에서 목욕을 해야하나 등을 잠시 고민했는데 입장해보니 전부 노천이다.



23살 첫 일본여행때 신칸센을 타고 도쿄에서 교토로 가면서 아따미를 보았다. 바닷가 보이는 온천마을이다. 온천욕에 매력을 느꼈던 내가 기대하는 추운 겨울 눈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면서 즐기는 노천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박ㅇㅇ교수가 여름휴가 초대를 했는데  뜨거운 여름이라도 아따미 온천에 가보고 싶다.




내 고향은 옥천

대전을 떠나서 살 인연이 아닌지 직장도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달청 직원분들이 고향을 물어보면 무심코 대전이라고 답하지만 추억이 필요한 질문에는 옥천이라고 답한다. 어머니의 고향 옥천은 어린시절 좋은 기억들만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대전에 살면서 더 이상 추억이 밀려올 여지가 없지만 아련히 좋았던 기억이 많다. 그때 친구들과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다. 

10여년전 인터넷 동창사이트가 대한민국을 들어놓았다가 내려놀때 소식이 궁금했던 특별한 인연의 초등학교 친구 주남종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남역에서 만나고 그 후로도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홀연히 사라지고는 이젠 친구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년 전에 힘든 일이 많았을 때 옥천에서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격변기 80년 삼양초 옆에 아버지가 지었던 벽돌집은 누군가가 살고 있었는데 기초를 부실하게 하여 지반침하가 되는지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었다. 당시 대문이 3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는데 집이 너무 작다. 

내친김에 70년대 중반에 지었던 집에도 가 보았는데 산중턱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작은 언덕정도 였고 오래된 집이 너무 깨끗했다. 문패를 보니까 당시에 아버지에게 집을 인수하신 분이 지금도 살고 계신 것 같았다. 부모님이 지금의 나보다 적은 나이에 흙벽돌을 직접 찍어서 지은 집을 너무 잘 보존해 주셔서 고마웠다. 당시 집앞에 봉분이 있어서 그 위에서 뛰어 놀았는데 평지가 되었고, 집 근처 공동묘지는 식품공장이 되었고 그 공동묘지에서 무서운 줄 모르고 잘 놀았다.


옥천 구읍

2012년 여름 미국에서 박유미 여사님이 오셨을 때 원자력연구원 이용희실장님의 장계리 주택 건축현장을 구경하고 오는 길에 옥천 구읍에서 식사를 했다. 옥천읍은 신읍과 구읍으로 나누어 진다. 

1900년경 철도역 건설을 반대한 구읍주민들덕에 1905년 신읍에 옥천역이 생겼고 이후 구읍은 군이라는 작은 행정구역내에서도 발전이라는 세속의 범주에서 벗어나 생활의 큰 변화가 없었다. 덕분에 일제시대이전의 대부분의 건축물이 구읍에 있고, 옛스러운 멋도 있다.

구읍에는 초대 공화당 의장이었던 정구영 고택, 애국지사 김규흥 선생 고택, 김기태 고택, 복원된 육영수여사 생가, 옥천의 자랑인 정지용 시인의 생가(복원), 한옥으로 지어진 옥천여중 교무실, 죽향초등학교 등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옥천 구읍에 가면 민망스러운 곳이 바로 시멘트로 발라놓은 실개천이다. 정지용이라는 큰 문화자산을 가진 옥천군에서 억지스럽게 생가복원을 하였지만 지용이 읆조린 실개천은 지금은 그냥 개천이다. 잡지에서 구읍의 실개천을 정지용시인과 억지 연결하여 미화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지금의 사방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개천을 정시인이 보았다면 하고 생각하니 참 민망하다. 




옥천 구읍에서 마당 넓은 집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이 되어버린 구옥의 초입에서 예전 기억이 났다. 이곳은 80년대 후반까지는 분명히 부친 친구분이신 백선생님 집이었다.  

대학 1,2학년 때도 자주 들러서 인사했던 내겐 좋았던 기억의 장소이다. 어느 날인가 오른쪽에 있던 사랑방에서 곤하게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이 곳이 식당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착잡하기도 하고 옛 기억이 아쉽기도 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옥천여자중학교(옥천여자전수학교) 교무실로 사용되었다. 한옥이 교무실이라고 하니 지금의 기준으로는 어색하지만 한옥이 학교로 사용된 귀중한 자료이다. 고 육영수여사가 옥천여중에서 짧지만 가정 교사생활을 하셨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이 건물에서 근무하셨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읍과 인연이 있는 유명인사가 많다. 하계리 출신 정지용 시인, 초대 공화당 의장이신 정구영 변호사, 육영수 여사, 가수 김현식 등이다. 김현식은 서울사람이지만 모친이 옥천출신이시고 초등학교때 옥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현식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타리를 보면 서울 삼청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잠시 옥천 구읍 죽향초등학교를 다녔다.

김현식이 외로움으로 방황할 때 누나에게 옥천에 살 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곤 했다고 하는데 위에 설명한 식당으로 사용되는 옥천여중 교무실이 김현식이 옥천에서 살던 집으로 소개되었다. 옥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추억을 남기는 진한 매력이 있다.


▲ 옥천죽향초등학교 보존건물


정지용-육영수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옥천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이다. 1909년 사립학교로 개교한 창명학교가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로 1941년 죽향국민학교로 바뀐 뒤 100년의 역사를 지니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육영수여사, 정지용시인이 동문이다. 1936년 지어진 죽향공립보통학교 교사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죽향초등학교 교정 오른쪽에 남았다. 지상 1층 규모의 일식 목조 건물에는 긴 복도에 3개 교실이 들어서 있다. 불과 15년 전까지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는데 현재는 교육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육영수여사 휘호탑, 정지용 시비, 죽향리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 육영수 여사 생가

초등학교때 육영수 여사 생가로 소풍을 갔었다. 70년대 10살 어린이 눈에는 집에 연못이 있는 가장 커 보이던 집이었다. 80년대 육여사 생가가 폐가가 되어서 몇몇 지역분들이 복원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추진되지 못했었다. 다행히 최근에 복원된 생가는 예전같은 세월감은 없지만 멋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옥천군에서 문화적 자산을 잘 활용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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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서방 장가가는 날 

중국 전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2002년 칭타오부터 시작한 중국여행이 조금씩 내륙으로 향한다.

2012년 1월 첫 연가는 중국 산동성 여행으로 시작한다.  

인하대학교에 중국인 학생들이 많은 건 중국과 가까워서이다. 

인하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중국인 유학생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평소에 나를 잘 따르던 중국후배  '왕이원' 군이 고향인 중국 산동성 일조시에서 열리는 자신의 결혼식에 간곡히 초대한다. 

전형적인 중국인 얼굴인 왕서방의 모습이 친동생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중국 결혼식을 보고 싶기도 하고, 칭타오에서 10년째 거주하고 있는 막내 동생이 새롭게 사업을 한다기에 시간을 내 보았다. 

산동성 일조시는 칭타오시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데도 승용차로 3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중국은 대륙이니 가깝다고 하자.

두 남동생도 중국에서 결혼식을 치루었다. 중국 결혼식을 몇 번 보았는데 주례는 없었다. 우리나라도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 늘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결혼식을 집안잔치로 즐긴다. 

사회자가 진행하는 결혼식인데, 역시 중국답게 주변이 붉은 색, 금색, 용으로 야외식장이 꾸며진다. 축의금봉투도 붉은 색이다. 우리도 부의 외에는 흰 봉투보다는 붉은 색 봉투를 사용하면 좋겠다.

1월 야외결혼이라니 우리 상식하고는 맞지 않지만 하여간 결혼식은 잘 진행되었고 결혼식과는 별도로 결혼식의 필수행사인 사전 카퍼레이드가 있다. 고급 승용차를 줄을 세워서 도로를 질주하는 결혼 세레모니는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에게는 빠질 수 없다.

결혼식을 마치고 중국의 진수  폭죽이 터졌다. 거의 전쟁터이다... 

잘 살아라 왕서방..


      

  

중국에서 아는 사람을

대전에 산다. 서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런데 중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인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혼식장에서 인하대 경영학과 이경환교수 부부를 만났다. 제자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서 중국까지 오셨는데 인하대에서 학위를 하고 산동성 모대학에 교수로 있는 중국제자 부부도 합세했다. 피로연장이 중국 동문회가 되었다.  

덕분에 중국에서 대학원 동문회를 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고 낮부터 동문들과 함께한 바이주에 정신이 몽롱해졌으니 이번 중국여행의 백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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