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첩기행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 대전에서 활발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가 박석신은 자신의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대전의 원도심(구도심이 어울린다)인 중구 대흥동에 있는 박석신의  화랑 겸 문화공간 '문화공간 파킹'에 다녀왔다. 

화가 박석신은 지역에서 잘 알려진 화가이자 문화기획자 그리고 대흥동 문화거리의 지킴이로서 활동하고 있다. 화가 박석신의 배우자가 친구인 인연으로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꾸준한 활동으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지역방송에서 방송되는 화첩기행에 출연하고 있다.



문화공간 주차

지금은 구도심이지만 대전의 원도심의 대표는 선화동, 은행동, 대흥동을 꼽을 수 있다. 40대 이상의 대전사람들에게 대흥동은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대전의 중심이 중구에 있었던 90년대 중반까지 대전 문화의 중심지는 분명 대흥동이었다. 비록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전의 중심축이 서구 둔산동과 유성구로 옮겨졌고 내게도 생활권이 서구와 유성에 한정되어 대흥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추억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전은 새것보다는 역사가 담겨있는 스토리가 필요한 도시이다. 비록 지금은 문화적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상업과 문화가 동반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공생할 때 대흥동의 생명이 이어질 것이고 대전이 부족한 문화자산의 젖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역사깊은 대전여중 앞에 있는 문화공간 파킹은 80년대 유명했던 대전의 세시봉 '팔로미노'가 있던 건물 주차공간을 개조한 자리에 있다. 지금은 1층에 로디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고 있는 이 건물이 '80년대 대전의 아마추어 명가수 신승훈이 통기타를 치며 희야, 라밤바를 열창하던 곳이고 촛불잔치를 부른 이재성이 노래를 했었던 팔로미노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컨트리가수 이정명씨가 운영했던 대전의 명소 '팔로미노'에서 많은 가수들이 탄생했는데 당시 신승훈의 인기는 대단하여서 대전시내 많은 업소와 학교축제를 휩쓸었는데 전성기 목소리로 신승훈이 부르는 희야에 대전의 젊은이들이 열광했었다.  

지금은 추억의 팔로미노는 이 건물 근처의 대전여중 앞 건물 2층으로 이사했고 일년에 몇차례 가보면 여전하신 가수 이정명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구 팔로미노 건물의 반지하공간을 화가 박석신이 운치있게 개조하여 갤러리 및 크로키 수업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계량기도 작품으로 변신했다.


화가 박석신

화가 박석신은 1997년에 처음 보았다.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했는데 오래되어서 기억이 멀다. 

그리고 친구 기라를 문병갔을때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화첩기행 사회자인 그를 보면서 그 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고, 화가의 부인이자 친구인 기라와의 인연으로 그의 작품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림세계가 남다르다. 


             ▲ 박석신 화가의 테라코타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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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브라보 재즈라이프

라틴계음악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라는 멋진 이름에 반해서 음반을 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노예들이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뿌리인 것은 알려져 있다.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 흑인노예의 후예들이 탄생시킨 재즈가 미국의 대표 음악이 되었고, 쿠바에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전통음악이 타락한 쿠바 사회에 맞물려 쿠바재즈가 시작되었다. 새롭게 알게된 것은 쿠바재즈가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 마력이 있다는 것과 이런 노인들이 세상을 달관한 음악을 연주하는 놀라움이 교차되었다.

한국재즈, 들어는 보았지만 생소하다. 알고있는 재즈뮤지션, 류복성, 이정식, 웅산, 나윤선 정도이다. 남무성님의 재즈만화 3권을 보며 옆문으로 입문한 재즈이지만, 재즈 1세대들인 노검객들의 둔탁하지만 농염한 연주에는 감동이 있다. 남겨진 숙제는 1세대 재즈뮤지션들을 기록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도 재즈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 재즈공연 보기가 어렵다. 재즈바라는 간판으로 영업하는 곳에서도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1999년 영화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유사하다. 그래도 영화는 감동이 있고 재미도 있었으며 우리 재즈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블로그도 틈틈히 자료를 모아서 한국 재즈뮤지션에 대한 기록을 올려보고 싶기도 하고, 아울러 재즈공연에 대한 기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거라고 판단된다. 직장내에서도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청취장소가 부족하여 동호인들끼리 개인집에서 음악감상을 하시는데 4,50대 사회주축인 분들의 문화생활이 너무 빈곤하다.


▲ 브라보 재즈 라이프 포스터(이판근, 류복성, 김수열, 조상국, 김준, 박성연, 신관웅, 이동기, 강대관, 강태환, 최선배)


 

                ▲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약칭은 BVSC이다.)


혁명과 음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1959년 성공하였다. 1900~1950년대  혁명전의 쿠바는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국가 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의 역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독재정권하에서 수도 아바나는 타락과 환락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환락의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쿠바음악의 최전성기로서 사교클럽이 번성하였고 당시 수도 아바나의 가장 대표적인 사교클럽이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이다. 우리나라의 예인중에서 기생출신이 많은 것도 비슷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가, 권번과 요리집, 요정같은 무대가 있었기에 예악도 같이 발달하는 현상.

사회주의적 성향인 카스트로 정권에서 사교클럽이 배타되었고 여기에서 주로 연주되던 전통적 쿠바재즈는 침체하였다. 역시 사회주의와 재즈는 어울리는 단어들의 조합은 아니다. 쿠바음악이 세상으로 알려진 전기는 냉전시대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쇠퇴 그리고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음반인 PD R.쿠더와 영국음반사 월드 서킷 사장 N.골드가 쿠바 음악가들의 합주를 녹음하기 위해 1995년 쿠바를 찾았고, 쿠바재즈에 심취한 쿠더는 이듬해 다시 쿠바를 찾아 쿠바 전역에 흩어져 있던 노인 연주자들, 즉 콤바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이브라임 페레르를 주축으로 하여 기타 멤버인 오초아, 포르투온도 등을 영입하여 과거 최고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팀을 만들어 '월드 서킷·논서치'라는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였고, 그 뒤는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세계적인 쿠바음악 붐을 일으키며 6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무려 12만장이 판매되었다.  




                                ▲ 콤바이 세군도


세군도

장 쿠바사람 같이 생긴 세군도는 1907년 생이다. 생존했다면 올해(2013년) 107세. 쿠바의 여러 그룹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였고, 쿠바혁명 뒤에는 담배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참고하자면 쿠바는 에스파냐계, 흑인노예, 토종원주민의 혼혈이 섞여 있다.




                         ▲ 오마라 포르투온도


오마라 포르투온도

년 전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본 조화에서 국민가수 000이라는 꼬리표를 보았다. 스스로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가수가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오마라는 쿠바의 국민가수이자 국보급 가수이다. 80노인이 국민가수로 불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그녀는 1930년 수도 아바나생이다. 10대 중반에 댄서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오랑**과 비슷하다고 첫 인상을 말해주는데 국민가수에게 죄송스럽긴해도 그런것 같기도 하다.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인 '필링(feeling)의 피앙세 미스 오마라 브라운'으로 불리며 쿠바 전역에 명성을 날렸고, 여성보컬 그룹 콰르테토 라스 다이다'에서도 활약하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유일한 여성멤버로서 독특한 음색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였는데, 잘 들어보면 트롯에도 잘 어울릴 듯한 음색이다. 샹송같기도하고 포르투칼 파두의 색깔도 있다. 밀바가 노래부르는 것 같기도 한데 이분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는 우리 정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창단 멤버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쿠바스타일 피아노연주자 루벤 곤잘레스(2003년 사망)


루벤 곤잘레스

2001년 한국공연을 하기도 한 그는 의대생이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연주활동을 하는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길옥윤선생과 유사한 여정이다. 그는 자신만의 피아노스타일을 완성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대외적인 명성은 역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쿠바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받들어 졌다.

우리의 길옥윤선생은 박춘석선생 등과 같은 국민작곡가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주름잡던 분이신데 명성에 비하여 자기관리에 철저하지는 못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이 사업과는 맞지 않는데 지금처럼 경영이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지원되던 시절이 아닌 주먹구구식 경영이 이루어지던 때, 그의 사업실패는 충분한 예견이 된다. 사업실패 후 피신한 일본에서의 구라브(클럽) 운영하였는데 그의 클럽을 찾았던 한 분이 잡지에 기고를 한 것을 보았다. 대음악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는데 길옥윤선생은 암발병후에 임종을 우리나라에서 맞기 위해 귀국하였고 쓸쓸히 사라졌다. 언젠가는 이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한편 루벤 곤잘레스의 연주는 정확한 타이밍이 일품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그는 음악을 시작한 지 50년만에 첫 자신만의 앨범인 Introducing...Ruben Gonzalez을 발표하였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루벤 곤잘레즈를,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훌륭한 피아노 솔리스트"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는데 그는 실질적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음악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 리드 싱어 이브라힘 페레르(2005년 8월6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브라힘 페레르

이브라힘 페레르는 14살때부터 직업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쿠바혁명 후 잊혀졌으나 199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오라마스는 1911년생이다. 15세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90세가 넘어서까지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멤버들이 많아서 여기서 줄인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밤해변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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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악단

계룡산 3대 사찰인 신원사 경내에 있는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산신각이 중악단이다. 산신각이 사찰내에 있는 것은 불교에 녹아있는 토속신앙의 자연스러운 형태이기도 하고 구원과 기복의 구분보다는 삶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픈 인간다움의 표현일 수 있다.

계룡산 과 무속신앙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과거 전국에서 가장 무속인들이 많았던 곳이 계룡산이고 지금도 공주시 반포면에서 계룡면쪽으로는 곳곳에 신을 모신 굿당들을 볼 수 있다. 계룡산에서 야간산행을 하면 기를 받기위해 치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을 볼 수 있다. 영험한 신령이 약해지면 계룡산에서의 기를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전국 3곳의 신령한 명산에 산신각을 만들어 국가의 제를 지냈는데, 북쪽 묘향산에는 상악단, 나라의 중심이자 한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신도안 근처 계룡산자락에 중악단을 그리고 남쪽 명산 지리산에 하악단을 만들어 나라를 위한 제사를 산신에게 지냈던 것이다.

현재 북한에 있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은 조선시대에 멸실되었고, 계룡산 중악단은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중악단 내부 - 산신령이 위엄이 없다



신원사에 가보자

대전에서 공주쪽으로 가면 공암을 지나면서부터 계룡산이 보인다. 무속적인 뉘앙스가 있는 계룡산은 웅장하지도 호방하지도 않은, 볼수록 아름다운 갸냘픈 여성미를 보여주는 수려한 산이다. 계룡산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라는 유명한 삼대사찰이 있다. 지금은 도예촌으로 유명한 상신리에도 과거에는 고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이 없고 우리들 기억속에는 동학사와 갑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계룡산을 가려면 대부분 대전에서 공주방면으로 가다가 박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주차장이 있는 동학사방면으로 가는 게 일반적 여행코스이다. 주차장과 가까와서 접근성이 좋은 동학사는 처음본 사람은 황당할 정도로 계룡산과 어울리지 않는 멋없음에 실망을 하게 만든다. 6.25 전쟁때 절의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 원이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절의 부족한 품격에 대찰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동학사인지 모르고 절을 지나가곤 한다. 

멋없는 동학사이지만 청도 운문사, 김천 청암사와 함께 비구니를 교육하는 대표적인 강원이다.  


      ▲ 박정자를 검색하면 연극배우가 나온다. 박정자는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던 이 마을에 정자 나무가 많아서 유래되었다.

갑사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국어책의 수필 갑사가는 길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가 맺어준 인연의 남매의 전설이 있는 남매탑 이야기와 잘 버무려진 갑사의 추억은 갑사라는 임팩트가 강한 절 이름과 어울려져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가장 어울리는 절은 '신원사'라고 할 수 있다. 무속신앙, 울긋불긋하고 치렁치렁한 옷, 그리고 칼춤을 추는 무속인, 기복신앙 등과 잘 버무려진 계룡만의 이야기가 있는 절이라고 생각 된다.

계룡산에 오면 계룡의 이야기를 찾기보다는 동학사를 들러보고 식당에서 동동주를 걸치고 산으로 직행하는 운치없음보다는 잔걸음으로 신원사를 둘러보고 계룡산의 묘미를 읽어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그리고 중악단에서 그리 신통해보이지 않는 산신령께 한 마디 건내보는 즐거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