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는 충청도 영동 양산에 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여러 사정으로 짧게 보낼 수 밖에는 없는 사정이다. 

근 몇년간 안구정화 한다며 해운대 인파속에 섞여보았는데, 이번 여름 휴가는 직장 동료들의 교육일정과 중복되어서 7월을 포기하고, 8월 1, 2일 양일을 이용해서 집에서 밀린 책정리를 해 보았다.

 

책만 보면 좋았는데, 책장사 책과 양서를 구분하는데 근 10년이 걸렸다. 분류별 주제를 정하여 선별된 장서 3,000권이면 개인서고를 구성할 수 있다는데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지질이 나쁜 오래된 책을 보면 눈 건강에 좋을리도 없지만 하루종일 재채기를 하고 책에서 뿜어나오는 냄새도 집 환경에는 좋지 않다. 


영국사는 1,000년 넘는 역사가 있는 고찰로서 충북의 남부 3군중에서 보은의 법주사, 옥천의 용암사와 함께 영동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영국사라는 이름때문에 잉글랜드를 연상하지만 충북 영동 양산면에 있다.  대전에서는 영동IC에서 접근하는 것 보다 옥천에서 접근하는게 빠른데 옥천 이원면의 묘목시장에서 멀지 않다. 대부분 시골풍경이 논밭에 작물이 심어져 있는데 옥천 이원면은 우리나라 최대 묘목단지 답게 도로주변 논밭에 각종 묘목들이 가득하고, 덕분에 풍경이 시원하고 목가적이다.   


일부 비포장도로와 양면통행이 불가한 좁은 산길이 산중고찰에 대한 운치를 돋게 해주기도 하지만 지금 공사중인 포장이 빨리 완공되었으면 한다. 누교지라는 저수지를 지나 계곡을 쫒으면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이 상당히 넓고 잘 조성되어 있다. 물론 주차료와 입장료도 없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명산인 계룡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수려하고 여성스러운 자태가 있다. 영국사 주변은 마치 계룡산 초입부처럼 약간은 붉은 빛이 도는 화강암으로 된 고봉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고목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유명 사찰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고 사찰 앞은 난전 분위기를 띄우고 있고 무개념 관광객들로 수도분위기를 찾기 어려운데 비하여 '영국사'에서 받는 첫 느낌은 사찰다운 사찰이다. 



만세루를 오르는 계단은 투박하고 세월의 때를 간직했지만 화강암을 기계절삭해서 만든 계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손으로 가공하고 세월이 닦아놓은 자연스러움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주차장에서 만세루를 통해서 대웅전으로 올라 갈 수 있다. 만세루에서 보이는 대웅전이 약간 작게 보인다. 

영국사라는 명칭의 기원이 국태민안을 뜻한다고 적혀있다. 과감하게 호국불교를 내세우는 사찰보다는 부처님 말씀에 가까울 것 같다.   









상층부가 허전해 보이는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을 사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석탑이다. 아마 탑의 재료인 호강암은 주변에서 채취했을 것 같다.  석탑의 최고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아닐까...  





우리민족의 전통종교인 샤며니즘과 중국에서 수입된 불교가 결합하여 탄생한 산신각이다.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이 탐닉하는 목표중의 절대적인 가치이기에 민생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형태로 발전했다. 






아득히 먼 서쪽에 있다는 극락세계를 법당으로 옮긴 것이 극락보전이다. 대부분 절에서 대웅전 주변에 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서방정토의 주인이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평소에 무심코 둘러보던 곳인데 이 곳도 각종 규칙이 있어서 내부는 극락정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니 사전에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 반야와 백구


         ▲ 참선 장소여서 유일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암.



영국사 주변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가까운 거리에 부도와 탑이 있다. 아무리 천년고찰이어도 스님들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렇게 정숙하게 유지되기 힘들텐데 이 날도 스님 한 분이 열심히 대웅전을 걸레질 하고 계셨다. 












 


아이에게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다. 아이의 소원은 수학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영국사 주차장을 나오면 입구에 민가가 몇채 있다. 아마도 절과 공존하는 장소인 것 같다. 오랜만에 명산고찰을 보았다. 이런 수준 높은 사찰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충청북도 영동이라는 위치가 주 원인일 것이다. 어쩌면 그 덕분에 잘 보존되었겠지만, 혹시 시간이 된다면 영국사를 들러보는 것도 좋은 여행의 추억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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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회(토요일 인생을 즐기는 모임)

박홍주 여사의 50하고도 몇 번째 생일이다. 서로의 생일을 열심히 축하해주는 토인회 전통에 따라 인천에서 인하대 이동원교수님이 내려오셨고 기타 토인회식구들하고 광섭씨 부부가 옥천 대청댐이 보이는 장계리의 뿌리깊은 나무에서 모였다.

지금도 토요일은 항상 가슴이 설레인다. 오전 수업이 있던 예전 학교에서도 토요일이 주는 편안함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대흥동에서 친구들고 어울리던 토요일 오후의 기억을 잊기는 힘들것 같다. 

오랜만에 옥천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을 달렸다. 유성에서 옥천 ic까지는 약 20분 소요된다. 5분을 더 가면 금강유원지에 갈 수 도 있다. 경부고속도로 최고의 난공사였다는 옥천터널 옆에는 경부고속도로 당시에 순직한 분들의 위령탑이 있다.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 단기간 내에 고속도로를 만든 분들 이시다. 잊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추억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정겹다.



아직은 푸르름이 부족하다. ‘뿌리깊은 나무’ 레스토랑 입구에서 전원주택을 소개하는 책에서 보았던 장계리 와이어패널 주택이 보인다. 독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몇년전에 부모님 집을 지으면서 참고하려고 유심히 보았었는데 건축비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 집처럼 수려한 전경을 가진 장소를 찾는 것이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숙제이다.



'뿌리깊은 나무'라고 하는 잡지가 있었다. 이 상호명도 잡지에서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는데 하여간 옥천의 뿌리깊은 나무는 전원 레스토랑이고 1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금강변 장계리는 대청댐 수몰전까지는 금강이 흐르는 유원지로서 옥천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잔자갈과 금빛 모래가 있던 장계리 금강변에서 여름이면 옥천 보은 사람들이 강수욕을 하곤 했던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가족들이 여기에서 물놀이 했었는데 그 날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강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레스토랑과 커피숍의 분리되어 있다. 입구 오른편에 커피숍이 보이는데 관리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초록이 감싸주면 운치가 있겠지만 짜임새 있는 풍경은 아니다. 2년 정도 계획적으로 관리해주면 색깔있는 장소로 변할 수 있는데, 사랑이 필요하다.


꽃이 피었다. 봄이 된 것을 잊고 있었다. 계절은 변하고 또 변하는데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이 수레는 파스텔톤으로 나무에 색을 입혔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올드한 느낌의 건물이다. 각을 많이 잡아준 유럽 산속 건물같고 내부는 루바로 장식했다. 실내인테리어는  일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전원레스토랑에 부담없이 어울린다.

보은 집을 지으면서 알게된 것은 지붕 경사도의 중요성이다. 우리나라 집들의 지붕경사는 뒷 배경에 보이는 산의 경사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눈에 부담이 적다. 알프스의 집들을 연상해보면 빼쪽한 지붕이다. 왠지 멋있어 보이는 그림같은 집이지만 조금만 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다. 알프스는 엄청난 적설량에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경사를 높여서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그럴 우려가 없으므로 20~30도 정도의 수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당연희 수평이 수직보다는 안정적인 구조이고 시각적으로도 편안하다. 



스테이크로 점심식사를 하고, 생일케잌은 이곳에서 준비한 치즈케잌으로 축하를 해드렸다. 오늘 식사 계산은 부군이신 최박사님이 하시고..


저녁에는 도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가볍게 물오른 이희정여사의 핸드드립커피를 대접했다. 시작은 커피였으나 와인, 코냑, 발렌타인까지 동원되어 늘 그러하듯이 12시까지 난상토론장이 되었다. 사이좋은 두 분은 시인 이이체의 부모님이시다. 내 생일선물로 정경화 LP를 보내셨는데 아직 LP세팅 실력이 부족하여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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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청암 송건호 선생

2013. 3. 10. 20:20


충청도 옥천 그리고 한겨레신문

백범 김구선생이 우리나라에 끼친 가장 큰 사회적 공헌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이비)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질문받았을 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정답인 '김구선생을 존경합니다' 라는 답을 주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근대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할만한 인물을 마땅히 떠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지식인이라고 알아왔던 사람들의 변절, 그리고 젊은 날의 용기와 기백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었던 노명망가들이 사회에서 버려진다는 두려움과 노욕이 겹쳐 판단력을 상실한 기행적인 퇴행이 거듭되면서 아름다운 결말 이루기 쉽지 않은 사회가 되었고, 지식전달의 매체가 다양화 되면서 얼치기 지식인들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게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갑자기 질문한다면 누구라고 답을 할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난 분이 한겨례신문 사장이셨던 송건호 선생이었다. 청암 송건호 선생이 파킨슨씨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움과 함께 나와 같은 옥천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동향이면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시던 당당한 모습에서 느끼던 뿌듯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청암 송건호

대전은 과거 대전천을 경계로 하여 중구와 동구로 나뉘어 있었다. 대덕군에 속해있던 산내, 구도리, 흑석리, 유성출장소, 신탄 등등 추억의 이름들은 대전이 광역화되면서 대전에 흡수되어 사라진 지명이 되었다. 한편 은진은 논산시에 있다. 은진미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연상되며, 대전 그리고 대덕군에는 그래서인지 은진 송씨들이 많이 살았고, 같은 반 친구들 중에도 송씨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옥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중에 육씨들이 비교적 많았는데 이들이 옥천육씨라는 것은 성장해서 알았다. 과거 대전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면 꼭 출마하시던 친구 외삼촌인 송oo님도 은진송씨 문중표에 많은 기대를 하셔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선거에는 단골 출마를 하셨는데 항상 아쉽게 결과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었다고 들었다.

예상과 같이 송건호 선생은 본관이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대덕군에 살았던 은진송씨인것을 보면 같은 혈족일 것이다. 대덕 동면에 사시던 증조부께서 옥천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하였고,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증약)에서 부 송채찬과 모친 박재호 사이에 3남 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약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고향 옥천에서 해방을 맞은 송건호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자유언론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픽션을 잘 쓰는 작가급 기자들이 판을치는 요즘의 한국언론에서 자유언론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6,70년대 당시에는 송건호 같은 기백이 넘치는 기자들이 있을 때 였다. 송건호는 대학재학시절부터 대한통신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래 19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과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5년 편집국장, 1969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74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신체제는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하였고(백지광고사태),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송건호의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과 사회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씨알의소리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신군부에 의하여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풀려났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 말을 발행하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왜곡없는 날카로운 보도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독재정권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이른바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겨레신문 창간과 죽음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988년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느낀 민주인사,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기자들,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이 앞장서 새로운 신문의 창간 준비 작업에 나섰고, 1987년 10월 30일 3,344명이 창간발간인 대회를 열어 한겨레 창간을 공표하였으며, 1988년 2만여 명이 출연한 50억 원을 국민주로 하여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자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선을 거쳐 1991~93년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폭행 등의  고문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씨병이 발병하여 7년간 투병생활 후 별세하였다. 투병하는 모습을 방송해서 본적이 있었는데 기백이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병약한 노인이 고통받고 있었다. 사망 후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위패는 고향인 충북 옥천 군북면 감노리에 있는 보륜사에 있다.


한겨레는 어디로

1988년 당시 정론지를 표방한 한겨례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경향신문과 함께 충성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이면서 현재 조중동에 맞서는 4대 신문으로 자리잡았으나 규모의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은 아쉬움이다. 지금은 초기의 신문사 설립방향을 잃은 것이 아닐 까 하는 우려를 많이 받고 있는데, 부디 송건호 선생의 유지하였던 정론관을 잃지 말고 좌우의 날개 짓으로 날아가는 새의 왼날개가 되어 균형을 잡아 주기를 기대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지용과 백석

옥천에서 유년시절 기억이 깊어서 일까! 

옥천출신 정지용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향토색이 넘치는 그의 시구가 좋다. 그가 구사하는 향토적 언어 속에 있는 장소들이 시간을 흘러 변해갔어도 나의 유년시절과 일부라도 중첩되지 않을 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80년대 말 지용의 시가 해금되었을 때 옥천에서 지용제를 준비하시던 부친 친구분의 설명을 통해서 처음 지용을 알게되었는데 이젠 옥천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되었다.

지용과 대비되는 시인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불리는 평안도 정주출신 백석(백기행)이다. 사슴처럼 긴 목과 오목조목한 귀공자 같은 얼굴의 식민지 시인 백석을 돌이켜볼때 꼭 기억해야할 다른 한 사람은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나타샤 김영한(자야)이다.

백석에게는 모범생같은 지용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묘한 센티멘탈이 있다. 조각 같은 얼굴과 뛰어난 文材를 가진 영어교사 백석에게서 나타샤와의 사랑은 그의 시속으로 더 빠져들게 한다. 성북동 대원각이 백석의 시한줄만 못하다고 하신 나타샤(북구의 소녀)의 인터뷰 기사가 있다. 

넘 볼 수 없는 눈물나는 사랑이다.

오늘 투병중인 진곤씨 병문안을 위해 창원가는 길에 국문과 출신 김학민 박사가 낭송한 백석 싯귀에 다들 감동하셨다. 다음에 만나면 길상사와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겠다.

                                                   ▲ 말년의 백석과 가족들(미소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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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옥천

대전을 떠나서 살 인연이 아닌지 직장도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달청 직원분들이 고향을 물어보면 무심코 대전이라고 답하지만 추억이 필요한 질문에는 옥천이라고 답한다. 어머니의 고향 옥천은 어린시절 좋은 기억들만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대전에 살면서 더 이상 추억이 밀려올 여지가 없지만 아련히 좋았던 기억이 많다. 그때 친구들과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다. 

10여년전 인터넷 동창사이트가 대한민국을 들어놓았다가 내려놀때 소식이 궁금했던 특별한 인연의 초등학교 친구 주남종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남역에서 만나고 그 후로도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홀연히 사라지고는 이젠 친구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년 전에 힘든 일이 많았을 때 옥천에서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격변기 80년 삼양초 옆에 아버지가 지었던 벽돌집은 누군가가 살고 있었는데 기초를 부실하게 하여 지반침하가 되는지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었다. 당시 대문이 3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는데 집이 너무 작다. 

내친김에 70년대 중반에 지었던 집에도 가 보았는데 산중턱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작은 언덕정도 였고 오래된 집이 너무 깨끗했다. 문패를 보니까 당시에 아버지에게 집을 인수하신 분이 지금도 살고 계신 것 같았다. 부모님이 지금의 나보다 적은 나이에 흙벽돌을 직접 찍어서 지은 집을 너무 잘 보존해 주셔서 고마웠다. 당시 집앞에 봉분이 있어서 그 위에서 뛰어 놀았는데 평지가 되었고, 집 근처 공동묘지는 식품공장이 되었고 그 공동묘지에서 무서운 줄 모르고 잘 놀았다.


옥천 구읍

2012년 여름 미국에서 박유미 여사님이 오셨을 때 원자력연구원 이용희실장님의 장계리 주택 건축현장을 구경하고 오는 길에 옥천 구읍에서 식사를 했다. 옥천읍은 신읍과 구읍으로 나누어 진다. 

1900년경 철도역 건설을 반대한 구읍주민들덕에 1905년 신읍에 옥천역이 생겼고 이후 구읍은 군이라는 작은 행정구역내에서도 발전이라는 세속의 범주에서 벗어나 생활의 큰 변화가 없었다. 덕분에 일제시대이전의 대부분의 건축물이 구읍에 있고, 옛스러운 멋도 있다.

구읍에는 초대 공화당 의장이었던 정구영 고택, 애국지사 김규흥 선생 고택, 김기태 고택, 복원된 육영수여사 생가, 옥천의 자랑인 정지용 시인의 생가(복원), 한옥으로 지어진 옥천여중 교무실, 죽향초등학교 등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옥천 구읍에 가면 민망스러운 곳이 바로 시멘트로 발라놓은 실개천이다. 정지용이라는 큰 문화자산을 가진 옥천군에서 억지스럽게 생가복원을 하였지만 지용이 읆조린 실개천은 지금은 그냥 개천이다. 잡지에서 구읍의 실개천을 정지용시인과 억지 연결하여 미화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지금의 사방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개천을 정시인이 보았다면 하고 생각하니 참 민망하다. 




옥천 구읍에서 마당 넓은 집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이 되어버린 구옥의 초입에서 예전 기억이 났다. 이곳은 80년대 후반까지는 분명히 부친 친구분이신 백선생님 집이었다.  

대학 1,2학년 때도 자주 들러서 인사했던 내겐 좋았던 기억의 장소이다. 어느 날인가 오른쪽에 있던 사랑방에서 곤하게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이 곳이 식당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착잡하기도 하고 옛 기억이 아쉽기도 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옥천여자중학교(옥천여자전수학교) 교무실로 사용되었다. 한옥이 교무실이라고 하니 지금의 기준으로는 어색하지만 한옥이 학교로 사용된 귀중한 자료이다. 고 육영수여사가 옥천여중에서 짧지만 가정 교사생활을 하셨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이 건물에서 근무하셨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읍과 인연이 있는 유명인사가 많다. 하계리 출신 정지용 시인, 초대 공화당 의장이신 정구영 변호사, 육영수 여사, 가수 김현식 등이다. 김현식은 서울사람이지만 모친이 옥천출신이시고 초등학교때 옥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현식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타리를 보면 서울 삼청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잠시 옥천 구읍 죽향초등학교를 다녔다.

김현식이 외로움으로 방황할 때 누나에게 옥천에 살 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곤 했다고 하는데 위에 설명한 식당으로 사용되는 옥천여중 교무실이 김현식이 옥천에서 살던 집으로 소개되었다. 옥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추억을 남기는 진한 매력이 있다.


▲ 옥천죽향초등학교 보존건물


정지용-육영수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옥천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이다. 1909년 사립학교로 개교한 창명학교가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로 1941년 죽향국민학교로 바뀐 뒤 100년의 역사를 지니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육영수여사, 정지용시인이 동문이다. 1936년 지어진 죽향공립보통학교 교사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죽향초등학교 교정 오른쪽에 남았다. 지상 1층 규모의 일식 목조 건물에는 긴 복도에 3개 교실이 들어서 있다. 불과 15년 전까지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는데 현재는 교육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육영수여사 휘호탑, 정지용 시비, 죽향리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 육영수 여사 생가

초등학교때 육영수 여사 생가로 소풍을 갔었다. 70년대 10살 어린이 눈에는 집에 연못이 있는 가장 커 보이던 집이었다. 80년대 육여사 생가가 폐가가 되어서 몇몇 지역분들이 복원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추진되지 못했었다. 다행히 최근에 복원된 생가는 예전같은 세월감은 없지만 멋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옥천군에서 문화적 자산을 잘 활용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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