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품질관리단 방문


공무원들에게는 중앙보급창으로 기억되는 

조달청 품질관리단이 용인시 수지구에서 경북 김천혁신도시로 이전했다.

1975년부터 삼성동 강남구청 별관자리에 있던 중앙보급창이 용인 수지에서 이젠 김천으로 이전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직장협의회에서 품질관리단과 같은 곳으로 이전한 조달교육원을 방문했다.

바쁜 연말 일정상 나하고 김영규가 동승했고 오랜만에 차량 운전을 했다.

 

금강휴게소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때 꼭 들르는 곳이다.

옥천에 위치하고 경치가 수려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릴 때 부모님과의 추억이 기억되어서 이기도 한데

이 곳에서 겨울 얼음은 처음 본 것 같다. 




대전 서구 정부대전청사에서 경부선 동김천 IC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동김천 IC를 나오면 약 2분 거리에 요즘 보기힘든 벽돌로 조적한 건물이 보인다.

일단 차량을 이용한 접근성은 GOOD

김천구미역에서는 도보로 약 20~30분 소요된다고 하니 역에서도 차량을 이용해야 할 것 같다. 




약 1만평 규모의 부지에 품질관리단, 조달교육원, 교육생 기숙동이 완공되었다.

문제는 주변이 벌판이라는 현실과 대형공공기관이 아직 입주하지 않아 자생적인 편의시설이  전혀 없다는 막막함이다.  즉, 담배사려면 차타고 10분을 열심히 달려야 한다.

복지대책이 필요할 듯!





입구에는 김천시민일동의 환영 플랭카드가 있고

우리 일행을 환영해주는 플랭카드도 붙어 있다.

이런 대 환영이!




1층 안내데스크(?)에는 화분들이 많고, 직장협의회에서 보낸 화분도 있는데 

꽃집아저씨가 '직장'을 마음대로 지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흑흑



      




조달청 최고의 구내식당은 여기


단장님과 대화의 시간을 마치고 마침 (일부러) 점심시간인 관계로 구내식당으로 직행했다

정말 궁금했다

품질관리단(교육원 포함)의 식당 밥맛이...

지방청 중에서는 경남지방조달청 구내식당이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품질관리단 식당에서 만나는 직원분들의 표정이 밝다.


단정하고 깔끔한 메뉴들이다. 미소로 대해주는 미녀 조리사분도 친절하시고..

아직은 교육생이 없어서 직원만을 대상으로 임시로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해도

대박이다. 특허연수원 식당보다 한수 위인 것 같다. 같이간 영규도 맛에는 동감..







식사 후에는 사무실 구경을 하는데 독립청사의 장점이 비교적 넓은 공간과 신축건물답게 깨끗한 실내 환경이 훌륭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실내에 설치된 탁구와 당구시설을 이용하는 직원분들이 보인다. 품질관리단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내부에서 충분한 직원위락시설이 있어야 겠다. 외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시험검사


요즘 품질관리단의 주력 대상품목은 가구라고 하더니 가구 시험 장비가 잘 세팅되어 있다.






그 외에 이화학 시험장비도 세팅 중이거나 완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시험은 장비의 우수성보다 오퍼레이터의 운용능력이 좋은 결과를 좌우한다.

그동안 쌓여진 노하우로 품질관리의 최고 기관으로 발돋움 하기를 기원하면서

짧은 방문이지만 좋았던 하루였다.



▶ 대학원 실험실에서 사용하던 낮익은 기기들도 보인다. 기기들은 대부분 최상위급 레벨의 제품들이다.






단장님과 함께


품관단에 오래 근무하시는 직원분들에게 단장님의 인기가 높다.

직협회원들을 대상으로 같이 근무하고 싶은 간부를 선정하면 상위권에 랭크되는 것은 

이상윤 단장님이 사람을 대하는 진심과 열정은 서로 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교육원으로 이동하기 전에 단장실을 방문하여 기관이전으로 고생하시는 이상윤 단장님과 사진촬영


다음 일정은 도보로 1분이 소요되는 조달교육원으로 이동, 안내는 이교문서기관께서 맡아 주셨다.



김지연


거의 30년 전이니 아둔한 머리에 기억이 흐릿하지만 

80년대 중반 부산지역  대학출신 가수들의 등장은 놀라웠다. 

동아대 이상우, 동의대 높은음자리, 바다새, 경성대 전유나까지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부산출신 가수들의 숫자도 많았지만

바다냄새 나는 노래들도 다 좋았던 것 같다.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쩔쩔매던 그 시절 부산출신 가수들이 이젠 50을 바라보고 있다.

이분들 노래를 쉽게 접할 수 있기도 하고 영상으로도 볼 수 있어서 반갑다. 


대전을 대표하는 가수는 충남대 출신 신승훈이다. 

목원대 음대 출신의 '이재성'은 촛불잔치로 큰 인기를 얻었고 좋은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특유의 개성있고 시원한 창법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재능에 비해서 운이 없던 것 같다.


자양동에 살던 친구들을 통해서 신승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대학에서 보이는 80년대 후반 신승훈은

이미 대전지역의 유명스타였다.


신승훈은 당시의 가수 등용문인 가요제 출신이 아니지만 

80년대 이미 대전의 유명 아마추어 가수로서 그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80년대 대전의 은행동, 대흥동이 번화가인 시절에 라이브공연을 하는 없소들이 많아서 

지역의 대학축제, 라이브공연장에서 쉽게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88년에 은행동에 있던 게르만호프에서 부활의 희야를 부르며 공연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에 대전지역 대학 축제는 훗날 충남대 개그동아리를 창설한 명사회자 윤환용의 사회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거의 졸도수준의 웃음을 선사하는 사회자의 진행속에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승훈이 부르는 '희야'와 '라밤바'는

축제의 하이라이트 였다. 


대전의 한남대학교에는 통기타 동아리 샤프랫이 있었고, 샤프랫 출신 '김지연' 은 한남대 국어교육과 87학번 이었던 것 같다.

몇년전에 여유만만이라는 프로에 나온 것을 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인지 통통해 졌다.

그녀를 처음 본 기억은 89년 충남대 공과대학 축제때였다. 어설픈게 기획한 한심했다 공과대학 축제 (당시에는 거의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났다)의 마지막 행사 공연장인 공대 2호관 가설무대에 등장한 초대가수가 김지연 이었고 그녀는 예뻤다.


약간 서늘해진 저녁날씨였다. 김지연은 자신의 최대 히트곡이 되는 '찬바람이 불면' 을 감칠맛 나는 음색으로 노래했고, TV드라마 주제곡으로 나온다고 했는데 그 뒤 최수종이 주연이었던 텔레비젼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주제곡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음반이 나오기 전이었고 몇달 뒤 군입대를 하면서 LP를 구하지 못했는데, 결국 올해 중고 LP사이트에서 한장 구매하고 턴테이블에 올려보았다.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은 다들 어렸던 그 시절...

 

배철수의 7080에 출연한 김지연을 볼 수 있었는데 살이 오른 모습에 세월이 흘러간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외모는 옛모습이 남아있지만 노래는 예전보다 못한 것 같았다.

새로운 음반과 지속적인 음악활동을 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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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시골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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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맞이


연휴가 길다고 느껴진다. 월화 휴가를 낸 동료들은 9일을 쉴 수 있으니 출근하면 후유증이 있겠다. 대전근처를 맴도는 나는 오랜 만에 대학친구들을 만나고 추석 전날 부모님께 ...



어머니가 잎으로 나물을 하신다고 심어놓은 아주까리  6~7살때 살던 집 앞에 아주까리가 많았던 기억이 났다. 










대추 열매 2개가 보인다. 2009년 대전시에서 개최한 식목행사에 갔을 때 대추묘목을 받았다. 며칠 전 같은데 벌써 열매가 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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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서갑 박병석의원

 

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에는 7개 청(관세청, 중기청, 특허청, 통계청, 산림청, 문화재청, 조달청)이 참여하고 있다. 관세청의 장준영 노조위원장이 회장으로 있으며 대전청사 직원들을 대표하여 대내외 활동을 하는데 2013년이 가장 활동이 활발하고 뚜렷한 성과를 얻고 있다. 연합체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지난 8월, 더위를 뒤로하고 대공연의 마당발인 특허청 김정훈노조위원장이 대전 서갑을 지역구로 하며 현재 국회부의장이신 박병석의원을 초대하여 각 청의 현안 사항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정부대전청사의 상당수 공무원들은 타지역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경우로서 대전청사와 구성원들은 대전시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퇴직 후에도 많은 분들이 대전에 정착하는 것은 대전이 주는 편안함과 텃세를 부리지 않는 대전사람들의 성향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대전청사내 각 기관에 많은 도움을 주시기를 기대하며, 식당앞에서 사진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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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옥천) 옥천성당

2013. 8. 1. 22:43


(옥천성당) 24년전에 왔었다.


1989년 여름은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20주년 기념전시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20살 어리숙한 판단력에 행사준비가 버거웠는데, 행사준비도 어렵지만 아직 사진에 대한 테크닉이 부족하여 여러 곳을 다니며 무턱대고 셔터를 누르던 때였다.


전시회 사진 작품마감 시간은 빠르게 다가오는데 동아리 선배가 옥천으로 가자고 했었다. 옥천가는 길 반가왔다. 

대전역에서 몇백원의 기차운임을 내고 비둘기호를 탔다.  옥천역까지 약 20분이었다.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회원들하고 삼양리 언덕에 있던 옥천성당에 올랐다.

빨간 장미가 흐드러져 여름 성당과의 조화가 아름다웠던 옥천성당에서 지금은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강지수선배가 모델이 되어 앵글속으로 들어왔다.


그 사진은 후에 군휴가를 나온 84학번 임ㅇㅇ선배님이 군부대에 걸어 놓겠다고 액자로 만들어서 가지고 가셨다. 

상상한다. 그후로 오랜동안 부대원들의 연인으로 남았을 지수선배를...

 

             ▲ 화강암을 사용한 구조물은 우리나라 건물과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옥천성당은 초기에는 신자가 많지 않던 시골성당이었고, 붉은 벽돌을 사용한 아산의 공세리성당에 비하면 풍기는 멋이 소박하다. 분명히 공세리성당이 화사하고 근사한 모습이긴 하지만 밝은 하늘색으로 칠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옥천성당의 소박함이 더 편안하고 카톨릭과 어울려 보인다. 

















         ▲ 1989년에도 이 작은 길을 걸어 올라갔었다.









            ▲ 성당 앞에 옥천여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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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는 충청도 영동 양산에 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여러 사정으로 짧게 보낼 수 밖에는 없는 사정이다. 

근 몇년간 안구정화 한다며 해운대 인파속에 섞여보았는데, 이번 여름 휴가는 직장 동료들의 교육일정과 중복되어서 7월을 포기하고, 8월 1, 2일 양일을 이용해서 집에서 밀린 책정리를 해 보았다.

 

책만 보면 좋았는데, 책장사 책과 양서를 구분하는데 근 10년이 걸렸다. 분류별 주제를 정하여 선별된 장서 3,000권이면 개인서고를 구성할 수 있다는데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지질이 나쁜 오래된 책을 보면 눈 건강에 좋을리도 없지만 하루종일 재채기를 하고 책에서 뿜어나오는 냄새도 집 환경에는 좋지 않다. 


영국사는 1,000년 넘는 역사가 있는 고찰로서 충북의 남부 3군중에서 보은의 법주사, 옥천의 용암사와 함께 영동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영국사라는 이름때문에 잉글랜드를 연상하지만 충북 영동 양산면에 있다.  대전에서는 영동IC에서 접근하는 것 보다 옥천에서 접근하는게 빠른데 옥천 이원면의 묘목시장에서 멀지 않다. 대부분 시골풍경이 논밭에 작물이 심어져 있는데 옥천 이원면은 우리나라 최대 묘목단지 답게 도로주변 논밭에 각종 묘목들이 가득하고, 덕분에 풍경이 시원하고 목가적이다.   


일부 비포장도로와 양면통행이 불가한 좁은 산길이 산중고찰에 대한 운치를 돋게 해주기도 하지만 지금 공사중인 포장이 빨리 완공되었으면 한다. 누교지라는 저수지를 지나 계곡을 쫒으면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이 상당히 넓고 잘 조성되어 있다. 물론 주차료와 입장료도 없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명산인 계룡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수려하고 여성스러운 자태가 있다. 영국사 주변은 마치 계룡산 초입부처럼 약간은 붉은 빛이 도는 화강암으로 된 고봉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고목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유명 사찰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고 사찰 앞은 난전 분위기를 띄우고 있고 무개념 관광객들로 수도분위기를 찾기 어려운데 비하여 '영국사'에서 받는 첫 느낌은 사찰다운 사찰이다. 



만세루를 오르는 계단은 투박하고 세월의 때를 간직했지만 화강암을 기계절삭해서 만든 계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손으로 가공하고 세월이 닦아놓은 자연스러움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주차장에서 만세루를 통해서 대웅전으로 올라 갈 수 있다. 만세루에서 보이는 대웅전이 약간 작게 보인다. 

영국사라는 명칭의 기원이 국태민안을 뜻한다고 적혀있다. 과감하게 호국불교를 내세우는 사찰보다는 부처님 말씀에 가까울 것 같다.   









상층부가 허전해 보이는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을 사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석탑이다. 아마 탑의 재료인 호강암은 주변에서 채취했을 것 같다.  석탑의 최고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아닐까...  





우리민족의 전통종교인 샤며니즘과 중국에서 수입된 불교가 결합하여 탄생한 산신각이다.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이 탐닉하는 목표중의 절대적인 가치이기에 민생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형태로 발전했다. 






아득히 먼 서쪽에 있다는 극락세계를 법당으로 옮긴 것이 극락보전이다. 대부분 절에서 대웅전 주변에 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서방정토의 주인이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평소에 무심코 둘러보던 곳인데 이 곳도 각종 규칙이 있어서 내부는 극락정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니 사전에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 반야와 백구


         ▲ 참선 장소여서 유일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암.



영국사 주변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가까운 거리에 부도와 탑이 있다. 아무리 천년고찰이어도 스님들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렇게 정숙하게 유지되기 힘들텐데 이 날도 스님 한 분이 열심히 대웅전을 걸레질 하고 계셨다. 












 


아이에게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다. 아이의 소원은 수학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영국사 주차장을 나오면 입구에 민가가 몇채 있다. 아마도 절과 공존하는 장소인 것 같다. 오랜만에 명산고찰을 보았다. 이런 수준 높은 사찰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충청북도 영동이라는 위치가 주 원인일 것이다. 어쩌면 그 덕분에 잘 보존되었겠지만, 혹시 시간이 된다면 영국사를 들러보는 것도 좋은 여행의 추억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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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용대리, 군축교, 신남



    양희은의 한계령(하덕규 작사/작곡)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80년대 말 까지도 군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 강원도 인제 그중에서도 원통은 기피지역 이었다. 오죽하면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유행어가 있기도 했는데, 기억을 돌이켜보면 인제보다는 신병들을 배를 태워서 소양호로 이동시켰던 양구의 2사단이 힘든 곳이었다. 


당시에 오지였던 원통은 이번에 44번 국도로 내려오면서 보니 오히려 인제읍보다 커 보였다. 원통 초입에 12사단 을지부대 사령부가 있었다. 12사단은 고 노무현대통령이 68년부터 34개월간 사병으로 군생활을 한 부대이다.  인제 신남에 있는 보급부대 경리였던 나는 부대 자금이나 사병봉급을 원통의 12사단 사령부에서 수령하는 사정으로 수시로 12사단에 출입했었는데 막상 이번에 보니 부대입구를 찾을 수 가 없었다. 우회도로가 생긴 탓도 있지만 지형지물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해가는 가 보다.

 

우리부대는 38선 아래 신남면에 있었다. 44번 국도가 위병소 앞으로 지나가는 교통이 비교적 좋은 곳이었고 여름이면 설악산으로 강릉으로 가는 차들이 줄을 이어서 외롭지 않았다. 부대에서 인제까지는 차편으로 20분정도의 거리였는데, 부대에서 신남면소재지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어다녔고, 신남면에서 인제읍까지는 지나가는 군용트럭을 얻어 타거나 시내버스로 가곤 했었다. 가끔은 인제에 미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는 군용 차량을 타면 인제까지 걸어가곤 했었다.

 

소양강 (구)군축교 아래는 항상 물이 차 있지는 않아서 평소에는 푸른 초원지대로 변한다. 그 초원에서 군부대들이 야영 훈련을 하곤 했는데 이등병때인 90년 초여름에 야외에서 훈련이라는 것을 해보면서 야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사진에 있는 김광락 대위는 지금은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고 군수품 계약관련으로 연락이 된다.

그때 훈련중에 첫날 초원을 가로지르며 갑자기 나타난 노루가 수백명 군인들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었다. 모두 소리지르고 노루를 따라 달리던 그때 그사람들이 생각난다. 군축교밑은 최근에는 루어낚시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90년에는 설악산 백담사에 전두환씨 부부가 유배중이었다. 90년 가을에 인제로 면회를 오신 부모님하고 백담사에서 전씨부부하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는데 찾아보니 전씨부부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90년 11월 초 소양강 군축교에서 대형버스추락사고가 일어났고,  당시 21명이 사망한 사고는 백담사에 유배중인 전두환씨 부부를 만나고 서울로 귀가하던 대구공고 재경후배부부들이 탄 관광버스가 군축교 아래로 추락하면서 발생했는데,  이 관광버스는 무자격 운전기사의 불법영업임이 밝혀졌고 피해를 당한 분들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해서 관광버스의 불법운행 실태를 일대 정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고 다음날  인제읍에 있는 국민은행에 가면서,  군축교 사고를현장을 보려고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인제읍까지 걸어갔는데 군축교 오른 편에 빠져있는 버스를 볼 수 있었다. 시신은 이미 수습해서 보이지 않았고 버스는 물에 대부분 잠겨있었는데 유실물이 없도록 그물로 버스주변을 감싸놓았었다. 물이 너무 맑고 진한색이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44번 국도를 타고 운전하면서 차창 밖으로 내가 가장 젊음이 넘쳤던 시절에 군 생활을 한 작은 부대를 다시 보니 옛 기억이 난다.




추억이 많은 하조대


어제 밤 여행 멤버들 모두 백사장을 걷지 않으면 후회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밤바다 하조대 해수욕장 백사장을 거닐었는데,  몇년 전 대전 토인회 멤버들이 강원도 여행을 했을 때, 이곳을 들렀고, 인하대 이동원교수님도 젊은시절 하조대의 추억을 기억했는데, 중소기업청 윤영희위원장님도 젊은 시절의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하조대는 추억을 남기는 곳인가 보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해수욕장이 아닌 하조대(정자)로 이동했다.  나는 충청도에 사는 지리적 여건으로 주로 서해바다를 찾지만 서해는 동해의 절경을 따라올 수 없음이다. 동해의 절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이곳 하조대는 멋진 백색 등대와 함께 풍경이 아름답다.











약 30분 정도면 하조대를 둘러 볼 수 있다. 주차장이 부족하여 차량이 밀리면 주차난이 있겠지만 해수욕장만 보고 가기에는 동해의 풍광과 바닷바람이 주는 기쁨이 크다. 





                   ▲ 오색약수에 물이 없다.





왜 자연용출수를 주로 약수라고 부르는 것일까!  약이 되는 물이 있다면 약국 병원은 어떻게 하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약수는 강원도의 오색약수와 충청도의 초정약수라고 할 수 있다. 약수가 무슨 효과를 볼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닌 것을 다들 알고 있다. 다만 그 유래와 독특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의 만족감이 심신을 맑게 해준다. 


1990년이다.  인제에서 군생활 중에 부모님하고 함께 오색약수에 왔을 때는 물이 이렇게 부족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약수는 고갈되어 용출량이 너무 적어서 한 모금 마시기에도 부족하였고 물을 떠가기에는 줄을 서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뭐든지 고갈되는 시대인데 오색약수도 고갈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현상인지 약수터의 명운이 달려있는 것 같다.

약수터 사방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자는 플랭카드를 붙여 놓았는데 자연을 망치는 케이블카보다는 약수의 수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먼저일 것 같다. 오색약수터에 오색약수는 없다.







오색지구에 태풍에 의한 수해가 발생하여 현재는 대부분 재정비를 하였다. 비교적 무난하지만 인공적인 복구가 자연스러움과 어울리지 않아서 통상적인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 같다.  새로운게 새로운게 아니고 낡은게 낡은 것이 아니다. 







관광지에는 대부부 산채요리를 하는 식당들이 많다. 호객행위는 맘에 들지 않지만 정갈한 데를 찾다가 소개를 받아서 찾아간 식당은 정갈한 음식솜씨와 주인 내외의 친철함이 알려진 곳이었는데 거의 먹지 못했다. 

대부분의 음식에 설탕을 넣었다. 담백한 산속음식을 기대했는데 단맛은 어울리지 않는다. 조리하시는 분이 음식에 설탕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으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너무 짜거나 설탕을 사용하는 식당은 피하는데 그래서 식당 소개는 하지 않기로 하고, 나의 20대 초반의 기억을 묻어 놓은 인제로 출발....   





주문진은 항구다


주문진(注文津)은 강릉시에 속해있으며 1940년 읍으로 승격했다고 한다. 대공연 일행들이 낙산사를 둘러보고 양양이나 속초보다는 주문진을 가는 것으로 합의하고 곧장 주문진항으로 달렸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동해의 항구답게 포구가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 




                   ▲ 우리나라 어느 항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수협 냉동창고



                   ▲ 주문진에서 조금만 노력한다면 항을 예쁘게 정비할 수 있을 것 같다.


                   ▲ 방실이인줄 알았는데 밤실이 


                   ▲ 동해는 참문어가 많이 보인다.


                   ▲ 내륙지방 사람들도 좋아하는 골뱅이


                   ▲ 수산시장 안내를 받고 있다




                   ▲ 동해안답게 문어, 오징어, 가자미 등이 보인다.  도루묵도 보이는데 알이 없다.


대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게는 피하고 싶었는데 나 빼고는 다들 좋아한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잘 골라서 먹어야 겠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맛이 좋을 것 같고..





양양에는 낙산사가 있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을 경험할 때면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진다. 

그 상식에 반하는 일이 직원들간의 갈등이고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욕심이면 다 덮고 사라지고 싶다. 

며칠간 동료들의 이기적 행동을 보면서 높아진 실망감을 피하려고 휴가를 내고 대전공무원연합의 강원도 여행겸 워크숍에 동참했다.


대전에서 가장 먼 곳은 제주도인데 접근이 어려운 여건상 이번 여행은 내륙에서 가장 원거리인 강원도 그것도 양양이나 고성이니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적합한 여행지이다. 


90~92년 강원도 인제에서 군생활을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올라오고 옛 기억을 되집어 보는 추억의 여행..   


차를 렌트했는데 청사까지 배달을 해준다. 8명이 탑승하고 고속도로로 4시간 정도 이동하여 비교적 쉽게 낙산사에 도착했다. 86년 3월 대덕고 수학여행때 처음 왔는데, 당시는 대전에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남녀 학생들이 함께 가는 수학여행이 드물었고 재미도 있었다. 그래서 인지 4개반 약 230명이 어울렸던 추운 3월의 수학여행은 추워도 춥지 않았다. 







              ▲ 동해는 물이 맑고 차다. 서해에서의 바다는 흙탕물과 갯벌인데 이 곳은 바위와 모래 그리고 철조망. 



              ▲ 홍련암






화강암 구조물은 가장 한국적이다. 이 난간 구조물은 낙산사와 어울리지 않아서 자세히 보니 모서리를 V컷 가공처리 했다.  

도로경계석도 V컷은 중국수입품에서만 나타나는데 이런 문화공간은 인간의 혼이 담겨있는 자연스러움이 필요하고 이런 주변구조물도 세세한 신경을 기울여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든다.



              ▲ 멀리 보이는 풍경은 쏠비치


              ▲ 2005년 산불로 유실되었다가 복원된 원통보전


인제에서 군복무하던 90년 가을에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을 때, 백담사와 낙산사를 구경했었다. 당시 백담사에는 전두환 이순자 부부가 유배중이었고, 이들 부부를 보기 위하여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들었고 나도 얼떨결에 비닐하우스안에서 애국하자는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2005년 강원지방의 대화재로 낙산사가 거의 전소되는 피해가 있었다. 화마의 피해는 엄청난 문화재의 손실이 있었고 몇년 후 에 토인회회원들하고 낙산사를 방문했을 때 아직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이번에 방문해보니 거의 복구가 되었고 아늑함도 느낄 수 있었다. 









              ▲ 관음지와 보타각, 보타전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유명 고찰에는 의상대사께사 창건했다는 기록을 적어 놓았는데 의상대사는 노래하는 스님보다 더 바쁘셨겠다. 많은 사찰들이 신라시대를 기원으로 하여 고승들이 창건한 역사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을 벗어난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낙산사는 신라시대를 기원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가족애를 느끼기에는 최고의 장소라고 하겠다.


 

Life is

거짓말

2013. 6. 30. 18:59



거짓말

 


예브게니 옙투셴코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천국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에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아이들느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네. 아이들도 인간이거든.

 

아이들에게 숱한 어려움에 대해 말해주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히 보게 해 줘야 하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장애와 난관에 대해 말해주게

 

마주치게 될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해주게

 

지옥 같은 일을 겪에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려주게

 

행복의 대가를 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서해안 바다낚시


대전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바다낚시 출조지는 서해, 그중에서도 서천의 마량포구, 홍원항, 보령의 대천항, 무창포, 오천, 그리고 당진시의 장고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낚시와 인생을 함께 하는 우리 청 낚시 선배님들은 돔류의 대상어가 부족한 서해안보다는 통영, 여수 등등 남해쪽으로 수시로 출조하지만, 서해바다는 서해바다는 낮은 수심, 뻘물 그리고 고패질을 하는 낚시방법 등 독특한 재미를 안겨주는 특성이 있다.


작년부터 조달청 낚시동호회도 젊은 회원들의 가입 및 참여를 유도하고 도를 닦기 보다는 가끔은 즐기는 낚시를 추구하기로 결정하고, 바다낚시 출조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서해쪽 항구는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부터 인기가 많은 탓인지 낚시배 예약의 불편함으로 당진, 태안 쪽 보다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서천군 마량, 홍원항을 찾고 있다. 각 항구 포구마다의 느낌이 다르고 특징도 있지만 서해바다는 그리 넓지 않고 충남쪽은 더 좁아서 출발지는 다르지만 매번 비슷한 장소에서 낚시를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서해안 출조(2013.6.)는 대전에서 서천, 당진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혜택을 보는 셈인데, 조달청 낚시동호회의 바다낚시는 다수 회원들이 대어를 잡을 수 있는 깊은 바다로의 출조의견을 모아서 작년 쭈꾸미낚시를 갔을 때 잘 협조한 해돋이낚시의 도움으로 홍원항 도깨비호를 임차해서 서해 외연도까지 출조했다.  













충청남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유인도인 외연도의 유래는 안개(해무)가 많아서 늘 연기에 쌓여있는 섬이라고 하는데 이 날도 역시 해무가 가득하다. 해무가 많으면 조황이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어서 걱정 되었다. 20명이 승선가능한 배를 총 16명이 승선한다고 예약을 했는데 전날 4명이 급한 일이 발생하여 불참하는 변고가 발생하여 총 12명이 출조했다. 서운하지만 참석한 회원들은 쾌적한 낚시가 가능해서인지 서운해 하지 않는다.


한국재발견에 외연도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가 소개됐다. 외연도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미리 쌓았다면 눈앞에 물고기만 보이고 외연도의 진가를 볼 수 없던 내 근시안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홍원항에서 새벽에 출발한지 약 1시간 30분 가량 항해를 하는 동안 대부분 선실에서 잠을 청했다. 좁은 선실이지만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는 낚시가 인생인 선배님들(고기ㅇ, 김현ㅇ 등)이 감탄스럽다.  오늘 승선한 도깨비호 선장님은 그동안 보아왔던 낚시배 선장과는 다른 서비스정신으로 뭉친 프로선장님이시다. 출조를 마칠때까지 진심으로 철저히 챙겨주시며 다들 조과에 만족할 때 까지 열심히 이동하셨다. 10여년간 승선한 바다낚시배 선장님중에 진정성과 실력 모두 최고였다.  





외연도 출조는 비교적 선비 지출이 많아서 인지 인근 바다에 낚시배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낚시배들이 연근해를 벗어 나지 않고 변죽만 올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큰 기대를 안고 온 출조인들에게 큰 씨알의 고기는 기대하기도 힘들고 실망하지 않을 정도의 조과를 올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무리 유가상승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서운했었다. 이번 출조는 제대로 바다낚시를 즐겨보자는 의견을 수용하여 여유가 많지 않는 동호회의 사정을 무시하고 비용 지출을 각오하고 마련한 자리이다.   





O.B. 라영주 선배님이 연질대로 대형 광어를 잡는 저력을 보여주셨는데, 조금 후에 양ㅇㅇ 회원이 대형 놀래미를 낚았다. 제주도에서는 어랭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45cm 가 넘는 놀래미는 처음 보았다. 다수의 기대속에 2시간 후에 횟감으로 사라졌다. 




이필열 회원이 낚은 우럭을 들어보였다. 외연도에는 이 정도 사이즈의 우럭이 대중적인 크기라고 한다. 부럽다.

 




예전에 타보았던 어설프게 고깃배를 개조한 낚시배가 아니다. 전동릴용 전원, 해수가 공급되는 쿨러, 낚시꽂이 등등 사용자 위주로 낚시배가 개조되었고 선장님은 개개인의 낚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줄이 엉켜도 부담이 없다. 




이 섬은 참돔 낚시가 잘 되는 변도라는 무인도이다. 양식장이 있고 갯바위 낚시는 금지되어 있다.





대형 삼식이(쏨뱅이)를 잡아 올린 양ㅇㅇ 회원 



곧바로 오늘의 우럭 최대어를 낚아올린 양ㅇㅇ 회원이다. 





낚시 경력 50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김현태 회원이 우럭을 잡고 기뻐하고 있다. 감성돔 낚시를 즐기는데 서해 배낚시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고 하신다. 






배에서 먹는 회는 특별한 맛이다. 숙성한 회가 좋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즉석에서 잡은 회맛을 당해낼 수 있을 까 싶다. 광어, 우럭, 놀래미를 듬성듬성 썰어놓은 회를 먹고 있는 동호회원들. 종이컵에 따라서 마시는 소주는 이 때가 최고의 맛이고 해풍에 정신이 맑아져서 쉽게 취하지도 않는다.  






부자간의 대화가 많지 않은 시대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낚시를 사랑하는 낚시인 중 한명인 조연찬 회원 부자는 낚시를 같이 다니는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4짜 우럭을 걸어 올렸다. 역시 검객부자 답다. 





오늘의 조황이다. 이미 뱃속으로 사라진 고기가 절반이지만 이 것을 제외해도 제법 성과가 좋고 무엇보다도 씨알이 굵어서 대부분 만족스러운데 도깨비호 선장님은 자신의 배를 타고 성과가 좋지 않다고 미안해하신다. 

다들 선장님이 마음에 드신다고 다음에 또 이분하고 출조하자고 한다. 서천에서 도깨비팬션도 같이 운영하시는 선장님(010-5041-5525)께 감사드린다. 





     



작은 포구에는 어시장이 형성된다. 바다낚시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어시장을 구경하며 수산물을 사는 재미도 상당하다. 홍원항에는 수산물시장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 가격도 상당히 저렴하였고 양식을 자연산으로 속여서 파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나 해서 도깨비호 선장님께 등대수산을 소개받아서 찾아갔는데 아주머니가 친절하고 연세가 많으신데도 충청도식 위트가 있으시다. 잡은 고기를 손질하면 킬로그램당 3천원인데, 자연산 대형광어를 손질해서 킬로그램당 2만원에 살 수 있다. 저녁 회식용으로 5킬로그램, 다른 분들은 가족회식용으로 광어를 사가지고 집으로 출발했다. 저녁회식은 늘 그러하듯이 유성 삼천포수산(042-824-8242)에서 홍원항 광어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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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산) 공세리성당

2013. 5. 26. 18:07


내포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앞자를 따서 유래한 명칭이다. 충청도는 과거 공청도로 불리기도 했는데 공청도의 공은 충청남도의 대표 도시인 공주를 지칭하고 있다. 공주는 과거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청이 있던 도시였지만 1932년 충청남도청이 인근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충청남도의 주도권은 대전으로 옮겨져 온 것이다. 

80년 넘게 대전에 자리잡고 있던 충청남도청이 광역시로 분리된 대전에서 2012년 내포신도시라고 명칭된 홍성 홍북과 예산 삽교 경계지역으로 이전했다. 새롭게 조성되는 도시를 내포신도시로 명칭한 것은 충청남도의 역사적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내포라는 명칭을 듣기는 했지만 익숙하지는 않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는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맥으로 가야산의 앞 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고 한다'라고 썼다.  여기에서 10고을은 홍성(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예산(덕산, 예산), 당진(신창, 면천, 당진) 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포는 홍주목의 관활지인 충청남도 남부에서 경기 평택까지 통칭한다고 할 수 있다. 

내포에는 삽교호 방조제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공식방문지였던 삽교방조제는 과거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온천인 온양온천과 연계하여 신혼여행지로 유명했던 역사가 있다. 

내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미곡을 배경으로 예산에는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13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이 예산에 설립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대원군과 남연군묘 도굴사건

대원군의 부친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었지만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흥선대원군이 야인시절 내포지역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젊은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파락호로 과장되어 알려져 있다.  기방출입을 하며 욕을 당하거나 '상갓집 개' 라고 비웃음 당하며 생활했다는 야사들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대원군을 한나라 유방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게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근거가 부족하며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그가 안동김씨 세력을 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왕실의 대표성을 갖는 인물로서 꾸준히 왕가와 접촉이 있었고 재산이 적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흥선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왕조이지만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왕가의 일족으로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안동김씨와 노론세력의 독점적 권력과 횡포를 뒤집어 보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차분히 준비된 그의 노력이 철종의 죽음을 앞두고 신정왕후와의 정치적 결합을 성공시켜 고종을 즉위시킴으로써 조선후기 마지막 사회적 변혁을 시도해 보았으며 방심하고 있던 안동김씨 세력에게 최소한의 복수를 한 것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취한 개혁정책들이 비록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임오군란 때 구식군인들은 대원군을 구원자로 보았음은 그가 민중에게는 구원자로 보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고종 5년에 발생한 독일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을 들어본 기억들이 있다. 총인원 140명이 참가한 국제도굴단이면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다. 미국의 사주로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기획한 이 사건은 조선에서 이익을 거둘 목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친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시체와 부장품을 가지고 조선의 통상개방 협상용으로 사용하려고 한 저질 행각이었다. 이 사건은 주범 오페르트, 미국인 전주 젠킨스, 프랑스 선교사 페롱, 그리고 조선인, 백인, 말레이시아인 필리핀인 중국선원 등 총 140명의 대규모 도굴단이 구성되었는데, 묘지를 도굴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 일이 얼마나 추악한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요즘의 대기업 약탈적 약자에 대한 횡포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이 사건의 출발은 국제도굴단이 행담도(서해안 행담도휴게소가 있는 그 섬)에 차이나호를 착륙시키면서 시작된다. 행담도가 이런 유래가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비교적 수심이 깊은 행담도에 착륙한 북독일국적의 차이나호는 그레타호를 부선으로 가지고 왔고 도굴범들은 부선을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덕산에 도착한 후 러시아군병으로 위장하여 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그러나 석회로 다져진 무덤의 특성과 묘지기등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에 실패하고 도주한 사건이다. 이때 길안내를 맡은 조선인은 선교사의 말을 따른 천주교인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쇄국정책이 강화되고 애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의 삵꾼 역활을 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의 폐해가 크다.

공세리성당

사랑은 추억을 타고 흘러가지만 우리는 대전역에서 KTX를 타고  25분, 천안아산역에 도착한다. 허무하게 짧은 시간이어서 잠시의 여유도 갇기 힘들다. 커피한잔을 호호 불어가며 도착한 천안아산역에서 생각해보니 아산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과거 아산은 아산현충사가 대표하는 도시였는데 요즘 생각나는 것은 삼성아산공장, 선문대학교, 순천향대학교, 온양온천, 아산만방조제 정도이다. 

출장중에 근교의 명승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번 출장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고 천주교 성지로 이름 높은 공세리성당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박세리도 아니고 공세리라는 명칭이 특이하기도 하고 정감이 가는데 아산출신 최ㅇㅇ님께서  내포지역(당시는 아산, 서산, 한산, 청주, 옥천, 보은회인 등 포함한 40개 마을)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이 있던 자리여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설명해 준다. 

충남지역에는 오래된 성당들이 많은 데 중국을 통한 서해안 으로의 천주교 전파가 그 이유인 것 같다. 김대건 신부가 내포(당진) 출신이라는 것은 이날 알았지만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신부의 부친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김대건 신부와 같이 유학하였던 두번째 조선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도 홍주 다락골(지금의 청양 화성) 출신이라고 하니 충청남도 서쪽은 초기 천주교가 전파에 주도적인 역활을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성당인 공세리성당은 본래 '공세리공소'였던 곳을 신자가 급증하자 1895년 6월 드비즈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 공세리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1922년 현재의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이 완성되었고 그뒤로 강당, 별관, 기타 증축 등이 이루어 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주차장에서 언덕 위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운치있다.




                    ▲ 성당에는 300년이 넘는 나이의 보호수가 많이 있어서 성당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 고딕양식의 본당



                 ▲ 내포의 평야지대와 멀리 아산만이 보인다

.


















                  ▲ 박씨 순교자 3형제(박의서, 원서, 익서)를 추모하는 비




                   ▲ 32인의 순교자 현양비외 기념부조물






                                       ▲ 성지순례를 오신 어르신들이 많았다.


언덕위에 위치한 공세리성당은 멀리서 보면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있지만 운치가 있고 소박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는 곳이다. 성당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충청도 시골 모습인데 주차장부터는 너무 멋진 성당이 나타난다. 사실 공세리성당은 예전부터 드라마나 CF에 자주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김태희가 주연한 아이리스도 이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보다는 조선시대부터 한국 천주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으며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는 천주교 성지인 공세리성당은 우리에게 차분안 휴식을 안겨주는 산소같은 곳이다. 평일이었는데도 성지순례라고 표시된 관광차들이 많이 보이고 안드레아, 마리아 등등의 이름표를 붙인 어르신들이 많이 방문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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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대회

조달청 본청은 대전에 있는 정부대전청사 3동에 있다. 기관의 역사는 약 60년이 넘었으며 전국적으로 직원의 수는 약 1천명이고 본청에는 약 4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사내 복지의 일환으로 다양한 동호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근 젊은 직원들이 많이 입사하면서 당구, 야구, 배드민턴, 탁구 등 스포츠 동호회가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조달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내 동호회는 낚시동호회와 산악회이다. 두 동호회 모두 약 40년이 넘는 역사가 있지만, 민물낚시에 대한 인기가 없어지면서 우리 낚시동호회도 회원수 감소를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해있다. 전국의 호수가 오염되고 어족자원의 남획으로 민물에 붕어가 사라지니 조사들의 흥미가 반감하고 젊은 층은 루어낚시에 관심을 갖다보니 민물낚시를 기간으로 하는 우리 낚시동호회는 이제 변방으로 밀리는 것 같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우리 청 낚시동호회원들은 양어장낚시, 경기낚시 등으로 불리는 낚시대회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연과 동화되는 낚시를 추구하는데 덕분에 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노출하지만 큰 불만들은 없다.  전국의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참가하는 제11회 중앙부처대항 전국공무원낚시대회가 공주 자연농원 낚시터에서 개최되었다. 자연농원낚시터는 경기낚시 대회가 많이 열리는 곳인데 입질이 까다로워서 일반 동호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곳이다. 

항상 전년도 우승 팀이 대회를 개최하는 룰에 따라서 올해는 전년도 우승팀인 농촌진흥청이 수고를 해주었다. 작년에는 그 전년도 대회에서 우승을 한 조달청에서 주최하여 당진시 전대리지에서 개최하였는데 이철환 당진시장님이 적극 협조하여 주셨고 당진시 공무원들도 휴일에 나오셔서 도움을 주셔서 고맙고도 미안했었다. 당진시의 도움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니 다른 일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낚시대회는 안전행정부의 재정지원이 이루어지는데 협조가 힘들어서 우승팀은 개최하면서 1등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행사지원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조달청 낚시동호회

조달청의 조가 잡을 조라고 우기는 분이 있다. 물건조달을 해야하는데 물고기만 잡는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신다. 최근에 뿌리없는 동호회가 장족의 발전을 해서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지만 대부분 성적을 다투는 리그전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낚시동호회는 물고기와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삶을 즐기는 행복한 동호회이다. 연령대가 높고 젊은 직원들이 부족하지만 다들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이기적인 직원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번 대회는 너무 급작스럽게 개최통보가 와서인지 전체적으로 참여자가 적다. 우리청에서는 오세홍, 조연찬, 고기철, 윤성원, 김성찬, 김한두, 이남주, 이강율, 최동진, 그리고 내가 출전했다.  


물고기는 다 어디로 갔지

경험적으로 경기낚시는 자리배정이 당일 성과의 핵심 포인트이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청은 자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입질 한 번 받지 못한 회원이 3명이나 된다. 전체적으로 몰황이기도 하고 너무 덥고 자리별 편차도 심해서인지 대회 중간에 다들 지쳐버렸다. 

 


             ▲일단 아침부터 먹고 시작합시다.

 

             ▲자리배정을 했다. 우리청 동호회는 이런 방식의 낚시는 선호하지 않는다.


             ▲과거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대회에서 개인 2위를 차지했던 최동진회원. 

               우리나라에 가장 낚시를 사랑하는 사람중의 한 명이다.


 
       ▲이번에 진급하시는 파평윤씨 윤성원 회원. 낚시 채비를 다루는 실력이 아트의 경지에 도달했다.
           물론 채비의 아티스트가 낚는 것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전 회장이신 오세홍 회원. 항상 넉넉하신 마음으로 동회회를 이끌어 주신다.  

            ▲낚시에 대한 애정으로 항상 행사를 빛내주는 이남주 회원.

            ▲품질관리단에서 참여하신 김한두회원. 요즘은 내림낚시를 주로 한다고...  


            ▲이름부터 낚시를 할 수 밖에 없는 고기 철 회원.  


            ▲이날 우리 청에서 가장 좋은 실적을 거둔 김성찬 회원. 


            ▲작은 체구이지만 낚시에서는 검객으로 불리는 조연찬 회원


            ▲말없이 세월을 낚으시는 이강율회원은 시작과 동시에 붕어를 낚었다. 


후기

농진청에서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웠고 급하게 준비해서인지 대회진행이 순조롭지 않았 보였다. 사회자가 낚시대회를 이벤트식으로 진행하면서 경기중간에 경품을 주는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 오히려 경망스럽고 가볍게 보여서인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 같다. 

이런 대회는 개최자에게 항상 고민이다. 민물낚시의 기본은 밤낚시인데 대낮에 하는 낚시 대회를 노지에서 열게되면 거의 고기를 잡을 수 없고 관리지에서 개최하면 낚시의 맛을 잃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입질 한번 받고 소식이 없다.

 










과거 보건복지부에서 개최한 대회(이천 각평지)는 당시 유시민 장관이 출전했었고(이분이 낚시광인것은 이때 알았다.) 몇년 전 예당지 대회에서는 대회시작할 때는 탤런트 여운계씨가 사망소식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오무렵에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분이 공무원들인 참석자들이 다들 당황했었던 기억이 있다(이때 조달청이 우승했다).  

11년의 역사가 쌓인 중앙부처대항 공무원낚시대회가 연합회 체제로 변신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 이고 우리 청도 적극 찬성이다. 매년 참석해보면 예전에 출전하셨던 낮익은 분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퇴직하신 경우이다. 퇴직자까지 초빙해서 대회를 열고 젊은 사람들도 적극 참여하는 축제가 되도록 모든 부처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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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여행의 백미는 이화원(이허위안)


두 남동생이 중국에 정착한 지 15년이고, 덕분에 중국방문이 일상화 되었다. 

중국은 방문이 거듭 될 수록 진한 매력이 있다.  중국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있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지역이 보물같은 곳이다.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목표는 약 10년 전 부터이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정보부족으로 일단 가까운 곳부터 쉽게 시작하는 방법을 택했다. 해안도시부터 내륙으로 예정을 해는데 방대한 지역의 여행은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모되므로, 직장에 매여있는 현실에 맞게 매년 1, 2차례 동북부부터 차근차근 내려오고 있다.


2007년 초여름 상하이에서 김ㅇㅇ님을 지인의 소개로 만났었다.

모 그룹사의 상하이지사장을 지내신 분인데,  회사를 사직하시고 상하이에서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해박한 중국역사의 지식과 달변을 바탕으로 약 20년간 중국 여행온 분들의 가이드를 많이 해주셨다고 한다.

이 분 도움으로 중국 근대와 현대가 중첩된 상하이의 진수만을 즐길 수 있었고, 중국 정통 삭스핀(게살스프 아니고)을 제대로 맛보았다(처음 먹는 사람들은 비린 맛에 제대로 먹지 못했다). 

 

상하이에서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중국인들이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엔 천당, 땅엔 소주, 항주)라고 부르는 소주(쑤저우)에 갈 수 있다. 요즘도 중국인들은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뇐다고 하는데, 상하이 여행중에 동방명주에만 갈 수 는 없는 일이어서 쑤저우를 관광하면서 가이드를 맡아주신 김ㅇㅇ님의 적극 추천으로 중국 정원의 자존심으로서 피서산장, 유원, 이화원과 함께 중국 4대 명원 중 하나인 졸정원을 관람했다.


졸정원이라는 이름은 '한거부라는 시의 한 대목인 '졸자지위정'에서 따온 것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실각시킨 베이징 권세가들을 비꼬는 말이다. 졸정원은 일본 정원만큼 인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편안한 스타일도 아니다. 

중국 정원의 3대 특징은 수목, 물, 암석이라고 한다. 졸정원은 이중에서 물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으로서 정원의 절반이 호수로 이루어 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6월의 남부지방의 습한더위와 엄청난 수의 중국관광객들 속에서 정신도 없었지만 졸정원에서 감탄사를 남발하는 중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졸정원을 나와 한산사로 이동하면서 4대 명원으로 꼽히기에는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에 가장 중국다운 유적지를 물었을 때 가이드 김ㅇㅇ 님은 중국미의 정수를 보려면 천안문, 자금성, 만리장성이 아닌 이화원이라고 단언했다.

만리장성보다는 이화원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적지라는 것이 의외였는데, 서태후가 애용했던 황실 별궁과 정원으로 알려져 있는 이화원을 그해 가을 중국출장중에 반나절의 시간을 활용해서 가 볼 수 있었다.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금나라의 행궁으로 처음 조성된 이화원은 엄밀히 본다면 만주족의 유적지이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북경의 용수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곤명호를 확장하였고, 1750년 청나라 건륭제 때 대폭 확장되어 실질적인 청나라의 황실정원이 되면서 청의원으로 불렸다. 

2차 아편전쟁(1860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약탈하고 파괴하였으나 이후 서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시 서태후는 자신의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하여 중국 해군 북양함대의 자금 은 30만냥을 유용해서 이화원을 재건하였고 그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주로 이곳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

1990년 의화단의 난으로 이화원이 파괴되었으나 1902년 서태후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었다.

 

이화원 입구에서 그 거대함에 놀랐는데, 총면적의 3/4를 차지하는 인공호수인 쿤밍호(昆明湖)는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광대한 크기여서 바다처럼 보인다. 항저우(杭州)에 있는 시호(西湖)을 모방하였다는데 시호보다 더 화려하다.

 

 

거대한 인공호수와 인공산, 아름다운 건물

 

청조의 패망하고 1924년 이화원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90년이 더 지난 후에 이화원 관광을 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청조의 마지막과 서태후의 포스를 연상해보면서 화려한 중국미를 볼 수 있는 것은 이화원 여행의 맛이다.

하루 안에 다 볼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화원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이화원 관광이 시작된다. 만수산(완셔우산(萬壽山))은 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인데 높이가 60m라고 한다.

건축물과 조형물의 화려함에 감탄을 하게 되지만 이 멋진 유적지가 서태후를 위한 그녀만의 공간이었다고 하니 유럽의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동양의 서태후를 누님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

만수산 정상에 있는 불당 즈후웨이하이(智慧海)에서는 이허위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낙수당(런서우디엔, 樂壽堂), 서태후만을 위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덕화원(더허위안(德和園)),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파이윈디엔(排云殿) 등이 유명하다.

 

이화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축물은 창랑(長廊)이다. 길이 778m,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인 창랑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1만 4천여점의 회화가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어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베이징에 가면 가장 먼저 가보아야 하는 장소는 만리장성도 아니고 자금성도 아닌 이화원이다. 중국여행을 한다면 중국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이화원에서 중국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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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꽃' 이다

 

'지난주 목요일, 2주일 전부터 대흥동 '문화공간 주차'에 전시되어 있는 내 이름작품을 찾으려고 대흥동으로 향했다. 친구 기라와 화가 박석신과 함께 저녁을 할 계획으로 시인 이이체의 모친인 조경희 여사와 이희정 여사를 모시고 간 대흥동 거리는 80년대 만큼의 활력은 없지만 둔산동 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대흥동만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꽃이다 전시회가 5월 26일 까지 예정되어 있다. 이미 종료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화가에게 몰랐다고 할 수는 없어서 두 여사분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온 사연만 알려주었는데, 화가는 맛갈나는 말솜씨로 갤러리를 소개하고 문화활동, 캘리그라피를 하게된 사연 등을 설명한다. 

점례나 점숙같은 통념적으로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름을 가진 아주머니들에게 캘리그라피 그림을 그려 촌스러운 이름을 멋진 꽃으로 재탄생시켜 선물할 때 그 분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감격하는 화가의 만족감과 예술적 가치의 재발견은 이러한 행사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이름을 말하고 내 마음을 말하고  

 

갤러리에서 화가와 마주보며 편하게 대화를 하면 화가는 캘리그라피 작업을 한다. 조경희 여사는 본인과 아들인 시인 이이체, 이재욱을 이희정 여사는 본인과 아들 김범진을 묘사하고 화가는 멋진 작품으로 남겼다. 모두 수작이었지만 내 마음에는 말 많고 잘 덤비는 범진이를 호랑이와 까치로 표현한 작품이 최고였다. 

이름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쉬어가는 시간과 공간을 남겨주는 작품들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 아주머니 모델들과의 대화



                      ▲ 2~5분의 짧은 시간이다. 내 이름이 꽃으로 탄생한다. 

 


                      ▲ 김범진: 범은 호랑이를 진은 말을 많이 하는 아이의 특성을 담아 새로 표현했다.



                      ▲ 이희정




1000점의 작품이 모이고 

 

'캘리그라피' 작업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에너지가 발산되어 기가 빠져가는 것 같았다. 작가는 1000개의 작품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마친다고 했다. 친구 기라와의 인연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예술 체험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화가와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은 근처 '내집'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했다. 나는 내일 인하대 가는 날이어서 술을 삼가했지만 화가는 술을 즐긴다. 마시고 싶었지만 좋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게 현실이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아쉽게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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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이관과 오삼계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인 중국 허베이성 산하이관(산해관)은 산과 바다가 모여있는 곳이어서 산해관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동쪽 끝이며 험준한 지형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며 베이징과 가까운 군사적 중요성때문에 명나라시절 만족이 세운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오삼계가 지휘하는 명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함락당하자 오삼계는 자신이 방어하던 주적 청나라와 연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토벌한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적장이 적을 섬멸하는 꽃놀이 패를 가지고 베이징에 무혈입성한 만주족 장군들은 베이징 주민들을 전부 몰살하고 심양에 수도를 삼으려고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오삼계의 배신이 명나라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산해관은 베이징과 가깝다. 가깝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국토종단보다 먼 거리이지만 베이징에서만 둘러보는 만리장성이 아니고 만리장성의 시작점이자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이곳을 보는 것도 중국여행의 백미가 될 듯 하다. 일단 올해 방문을 계획해 보기로 하고 탕산대지진을 알아보자. 



탕산대지진


인하대학교에 유학을 온 '상'씨 성의 중국학생이 있다. 허베이성 산해관이 근처가 집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탕산대지진에 몇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 물어보았더니 표정이 영 반가와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작년에 탕산대지진을 소재로 한 '대지진'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지만 재난을 영웅담으로 미화시켜 극복하는 헐리우드식 상투적인 스토리가 남아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당시의 지진피해의 처절함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가지고 있던 지진트라우마는 넘어선 것 같다. 

나중에 중국학생  '상'군이 자신의 조부도 그 때 작고하셨다고 말을 해준다. 이런 실수다. 


베이징은 허베이성에 있다. 베이징과 인접해 있는 항구도시가 천진이고 베이징과 천진 윗쪽에 탕산시가 있다. 1976년 7월 28일 03시 42분 54초, 중국 허베이성하(河北省) 탕산(唐山) 펑난(丰南)일대에 강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관동대지진은 점심때 발생하여 불이 많이 났고 폭동으로 발전하여 조선인 학살을 포함하여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탕산대지진은 새벽에 그것도 광산 일대와 인구 밀집지역에 지진이 집중되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도시를 벗어난 외곽에는 붉은벽돌로 대충지은 집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뼈대도 없이 벽돌로만 지어진 이런 허술한 집들이 무너지지 않는게 신기해 보일 정도인데, 70년대 당시 이런 집들이 대부분이었던 인구 100만명의 도시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다. 지진으로 사망자만 24만명(65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이 넘었으며, 100만명 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가 1976년이다. 이 해에 중국에서는 대사건이 많았다. 주은래 총리 사망, 주덕 원수 사망, 모택동주석 사망, 4인방의 체포와 문화대혁명의 종말 등등 이다. 76년에 탕산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모택동(毛泽东)은 피해관련 보고서를 여러번 세심하게 검토하는등 이재민 구호작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며,  8월 4일 당산(唐山)에 도착한 구호인력은 본격적인 재해 구호 활동을 시작했고, 지진 구호 본부를 설립, 10만명이 넘는 인민해방군, 2만명의 의료진과 지원인력등을 재해지역에 투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았던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재난극복 영웅담이다. 

사망 2달전 모택동은 판단력에 문제가 많았고 중국인의 아버지 총리 주은래는 사망하였으며 정국은 사인방의 폐해가 극심했을 때이다. 대지진 후 폭동이 발생한 일본과는 다르게 탕산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지 않고 구조작업이 이루어 졌다. 제대로 구호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인력에 의존한 게 현실인데 부실한 정치와 사회적 안전망 부족에 항상 애꿎은 인민들이 피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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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치기"

'대전에선 마땅히 먹을 많한 음식이 없다. 손님이 와도 모실 곳이 마땅치 않다. 대전은 먹을거리, 먹을 곳, 먹을 정보가 부족한 '음식 3무 지대'다. 라는 주제의 신문 기사를 보고 공감했다.


대전시에서 설렁탕, 돌솥밥, 삼계탕, 숯골냉면, 민물매운탕, 구즉 도토리묵을 대전 대표음식으로 선정한 적이 있는데, 설렁탕, 삼계탕, 냉면, 민물매운탕, 돌솥밥을 지역토속음식으로 내세우는 것은 지역민들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설렁탕은 한밭식당, 삼계탕은 예전 구도심의 금성삼계탕, 동성삼계탕, 고려삼계탕, 돌솥밥은 귀빈식당, 무지개회관, 유성의 골프선수 장정 모친이 하던 경성회관이 유명하기는 했지만 전국구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대전의 대표음식으로 소개되는 것들이 두부두루치기, 묵 정도이니 참 먹을거리가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두루치기란 소고기나 돼지고기 또는 조갯살이나 낙지 따위를 잘게 썰어 넣고, 콩나물, 버섯, 박고지 등과 함께 볶다가 양념한 국물을 조금 부어 끓여 낸 음식이라고 나와 있다.  

두부두루치기는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어서 두루치기가 충청도 사투리인줄만 알았는데 전국적으로 재료만 다른 두루치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징어두루치기, 돼지두루치기, 김치두루치기 등등...


대전에는 유독 두부, 콩나물, 닭을 사용한 음식이 많은데 재료부족이 낳은 결과이다. 신선한 해산물의 부족과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단백질의 부족을 닭과 두부로 대신하였고, 이런 음식들은 대부분 저렴하다보니 손님대접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대전에서는 먹을 게 없다는 말을 하는가 보다.


두부두루치기가 전국적인 음식으로 거듭나았으면 하는 기원과 기대를 하며 대전역부터 유성까지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을 접해보았다. 


"별난집"

대전역 앞쪽 중동 한밭식당옆에 있는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88년에 처음 맛 보았다. 지금은 강원도에서 공업선생님을 하고 있을 권계순 선배님하고 같이 였는데 아마도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출사 후 였다.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맵고 고소하다. 그런데 맛있다. 면사리를 두부밑에 넣어서 나오는데 절묘한 맛이다.

서울출신 동료들하고 왔을 때 이런 집을 찾고 있다며 만족도가 높은 결과를 얻었는데 역시나 최고의 맛이다. 개인적으로는 대전에서 가장 두부두루치기 맛이 좋은 집이다.  


"광천식당"

선화동 삼성생명 빌딩 부근에 있다. 과거에 광천식당 골목에는 벌집식당, 청양식당이 있어서 두부두루치기가 유명한 골목이었는데 지금은 광천식당만 남았다. 특생이 많이 남아있는 대흥동과는 달리 이 곳 선화동 충남도청 앞 쪽은 그 많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쇠락해 가는 대전 구도심의 아쉬움만 남아 있다. 충남도청마저 내포로 이전한 시점에서 (구)도청건물을 문화의 아이콘으로 변신시키지 않는다면 구도심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심정이다.



선화동쪽에 있는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은 전통적으로 멀국이라고 부르는 구수한 칼국수 국물을 준다. 두부두루치기에는 보통 국수사리를 비벼서 먹는데 식사를 하기 전에 소주는 필수였고, 25도 소주시절에는 1병은 보통이고 2병은 주량이 센 사람으로 불렸었다. 지역소주인 선양소주대신 진로소주를 마시는 것이 대접받는 다고 생각되던 시절이다.



그런데 최근 광천식당에서 맛 본 두부두루치기는 훌륭하지만 최고는 아닌 것 같다. 추억은 남았지만 약간 맛은 변해버린 느낌이다.

별은 세개 ★

"진로집"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대전의 두부두루치기 식당을 소개할 때 진로집이 맛집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몇 개를 빼고는 온통 칭찬으로 가득한 식당인데 비록 맛을 평가하는 것은 주관이지만 진로집에 과찬을 남발하는 것은 블로그의 상업성을 의심해보게 된다.

 

'진로집'이라는 작명이 참 좋다. 아마도 진로소주에서 차용한 명칭인데 과거 진로소주가 지역소주에 비하여 한단계 위로 대접받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소주와 잘 어울리는 두부두루치기를 전문식당의 이름으로는 좋은 선택이다.

원도심인 대흥동 대전여중 앞쪽에 위치한 진로집은 작은 골목안이어서 일단 찾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건물과 변하지 않은 집기 등을 간직한 두부두루치기의 원조급 식당이다.





진로집에서 두부두루치기를 맛보면 대부분 반응이 비슷하다.  

맵다. 친절하지 않다.

오래된 건물이고 인테리어 감각이 있는 곳이 아니어서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친절함이 없다. 90년대 서구가 개발되고 대전청사가 이전하기 이전까지 대전의 대부분 식당들은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친절함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는 아무 생각없이 장사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진로집은 무대접이 대접이던 예전 대전지역 식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런 전통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데 간직하고 싶은 가 보다. 중구청에서 관내 맛집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외지사람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다. 


진로집은 소설가 백파 홍성유 선생(2002년 작고)이 선정한 한국 맛있는집으로 소개하였다. 방배추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백파선생의 맛기행이 공짜는 아니었구나 하는 실망감이 높았는데 그보다 지금은 백파선생이 맛기행 하던 시대가 아니기도 하고 실제로 맛도 명성에 비하여 별로여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다.

별은 두개 ★


"내집"

20여년 전에 대흥동 풍년갈비가 유명했었다. 지역 극장에서 메인영화 상영전 극장광고에 나오던 갈비집이었는데 집안 행사라도 있으면 대흥동 풍년갈비를 가는게 통과의례 였다. 언젠가 이 식당 냉면에 대장균이 많이 검출되었다고 언론에 크게 나온적이 있었다. 지금은 만나기 힘든 우리 부모님과 삼형제가 같이 가족식사를 했던 좋은기억에 근처를 지나가면 풍년갈비 건물을 보게 된다.  

대흥동에 냉면집이 많다. 사리원면옥, 수라면옥 등등, 수라면옥 근처에 있는 내집식당이 있다. 개업한지는 11년째인데 주인 아주머니 음식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전북 김제가 고향이라고 하시는데 충청도 음식도 전라도 솜씨가 만나면 더 빛나는가 보다.

두부두루치기가 맛 있는집으로 화가 박석신의 소개가 있었는데, 올갱이해장국 전문식당이다. 올갱이해장국, 두부두루치기, 닭도리탕이 메인메뉴인데 음식과 어울리는 대흥동 구옥을 개조한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몇년전에 올갱이 국밥을 먹으러 왔던 기억을 있는데 그때는 맛을 잘 몰랐다. 올갱이 국밥은 어머니의 솜씨가 수준급이었고 집에서는 자주 먹는 음식이어서 식당에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게 내 성향인지라 두부두루치기와 증약막걸리(한겨레신문 회장이셨던 청암 송건호 선생의 고향 옥천 증약에서 만든 막걸리)를 먹었는데 수준급이다.

막걸리맛도 좋지만 두부두루치기는 별난집과 동급이다. 

이날은 막걸리와 두부두루치기를 함께 하며 예술가의 내면을 찾아가는 즐거움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대전에 오는 분들은 이곳에 들러보는 것도 멋진 여행의 기억이 될 것 같다.

별은 다섯개 ★




"대선칼국수"

79년 10살때 부친과 함께 지금은 작고하신 은행동 김대윤피부비뇨기과에 갔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를 좋아하셨던 부친이 대선칼국수를 지나쳐 가지 못하셨다. 아픈 몸에 속은 울렁이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있었고 억지로 입에 넣은 칼국수는 ..  맛있었다. 

대전역 앞쪽에 있던 대선칼국수가 둔산동으로 이전하여 성업하고 있다. 부친이 칼국수를 좋아하신 것이 나와 아이에게도 칼국수를 좋아하는 동인이 된 것 같다. 

대선칼국수는 그 뒤로 잊고 있었는데 아마 10년전쯤 직장에서 몰려간 점심식사자리에서 칼국수를 입에 넣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10살때 그 맛과 기억이 났다. 맞아 이집이야 하고..


그뒤로 대선칼국수를 자주 간다. 가게 입구에 다시다 박스를 쌓아놓고 영업하는 강심장인 대선칼국수의 두부두루치기도 수준급이다. 그러나 20여년 전의 꼬마가 느꼈던 맛을 한 번에 기억나게 해준 칼국수를 맛보며 가끔은 두부두루치기에 면을 먹기도 하지만 대선칼국수는 적당히 조미료가 들어간 국수맛도 훌륭하다.

별은 네개 ★


"동원칼국수"

대학 조교를 할때 송강동 동원칼국수를 많이 갔었는데 지금은 대전청사 앞에 있는 월평동 동원칼국수가 성업하고 있고 자주 간다. 

조개육수 칼국수이다. 대전에서 대흥동 대전중학교 근처에 있던 칼국수집들은 맵고 빨간 국물이 특징이었다. 별도로 쑥갖을 한 그릇 주는데 다른 고장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칼국수를 먹는 것을 볼 수 없다.

동원칼국수의 두부두루치기는 표준형이다. 특별한 특징은 없지만 적당히 맛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다.

최고는 아니다.

 

별은 세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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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역사적으로 만주는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주 동부지역을 뜻한다. 중국 대륙의 주 지배민족을 지금의 한족이라고 한정해 본다면 한족의 시각에서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사례는 몽고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청나라 등, 수 차례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시절에 중국영토의 대부분이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황제, 금나라, 누르하치, 여진, 팔기군, 서태후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만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를 세운 민족이자 우리와는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민족이 과거에 고조선, 발해, 고구려의 역사를 내세우며 만주가 한 때는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영토였다고 주장해도 과거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영토로 한정되었고 그나마 분단국가가 되어 대륙의 섬이 되었지만, 중국은 비록 이민족의 지배를 당했어도 지금의 광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공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보다는 운이 좋다.

 

국사시간에 읍루, 말갈, 여진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자세히 알 기회가 없었고 가르치는 국사선생님들도  발해라는 나라외에는 잘 설명을 못 했었다. 우리가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배우면서도 의문시되었던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고 말갈은 발해의 주력 구성원이었다고 배웠었다. 동북지방에서 우리민족과 여진족이 어울려 살았고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귀화를 많이 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과 상당히 동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인하대학교에는 유독 외국학생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지리적 연관때문인지 중국학생들이 많이 있다. 대학원 수업에서 만난 만주족 후배학생 '샤뢰' 를 보면서 만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샤뢰와 대화를 나눌 수록 한족보다는 확연히 우리민족과 더 가까운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런 관심이 이어져서 최근에 만주족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만주족의 역사-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돌베게) 이다.  


만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샤뢰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그 유명한 산해관 근처가 집이다. 동북 3성은 만주족의 본거지였고 지금도 만족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내용중에 중국미인은 동북 3성에 많이 있다고 한다. 동북3성의 여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얼굴이 갸름하고 흰 피부와 늘씬하고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 남방인 항주에 미인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동북미인이 지금의 미인기준과 잘 맞는 것 같다.


중국은 큰 나라답게 지역별로 사투리도 가지각색이다. 우리나라같이 작은 면적의 나라도 지역별 사투리의 분포도가 높은데 중국의 사투리 차이는 더욱 크기 때문에 광둥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 말이다.

그런데 중국의 표준어는 동북 3성 그중에서도 하얼빈쪽 말이 기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샤뢰는 중국어는 잘 하지만 만주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멸된 언어에 속하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는데 샤뢰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만족들 중에도 많지 않다고 알려준다. 중국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만주어를 알아야 한다. 청조시대의 수 많은 기록이 만주어로 남아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고 한다. 


샤뢰가 우리나라 영화 '활'을 보면서 영화속 만주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너무 신기했다고 하는데 함경도 북방은 사실 조선이 국경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성계가 여진족으로 의심받기도 하며 설령 그가 여진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하중에 이두란(이지란)이라는 여진족 심복이 큰 공을 세워 이씨 성을 받은 기록이 있고 용인에 많이 있는 청해 이씨의 시조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여진족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 여진족 출신 이지란(퉁두란)


물론 우리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역사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불가능한 주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에 단일민족이 한명이라도 있을 까 싶다. 어쩌랴 피는 섞이고 물은 바다에서 합쳐지는 것을...


만주족 출신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랑랑'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수도 봉천(심양)에서 태어난 만주족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인기 피아니스트로서 중국의 국보급 연주자이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1m는 밀려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랑랑이 사용하는 피아노가 바로 스타인웨이 이다. 


                    ▲ 만주족(여진족) 청년 '랑랑'


   - 그런데 피아노 대가들은 전부 스타인웨이를 사용한다.


피아노가 1억원이 넘는 가격에

우리나라에서 스타인웨이(앤손) 피아노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사람은 재벌회장도 아니고 피아노연주자도 아니고 예술의 전당 관계자도 아니고 지방문화예술회관 관계자도 아닌 조달청 국제물자국 외자장비과 악기담당 직원이다. 전국적으로 수요가 많을 때는 1년이면 10대 이상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하기도 하는데 이 제품들은 대부분 각 지방의 문화예술회관으로 공급된다.


직장에서 외자근무를 하면서 우연히 피아노를 구매한 적이 있다. 2번은 스타인웨이이고 1번은 백스타인 이었다. 당시 환율로 대당 1억 3천 이상으로 기억되었던 독일 함부르크산 스타인웨이 D시리즈 피아노에 관심이 생겨서 한국 에이전트였던 코스모스악기에 피아노에 대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받아놓았었다. 

국내 피아노연주자들이 가장 연주하기 원하는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기 때문에 각 지자체의 예술의 전당같은 문화회관은 다른 대안 없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요청하였고,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미국산은 연주자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미국산 스타인웨이가 독일산보다 저렴했지만 절대 선택하지 않고 전부 독일 함부르크산을 희망했었다.


스타인웨이는 독일사람이다.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내에서 먼저 생산을 했는데 나중에 세워진 유럽공장의 품질이 더 우수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역시 미국은 무기가 전공이다.  


블라드미르 호로비츠,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조율사를 비행기로 싣고 다니며 연주하신 분인데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이 분이 사랑한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다. 


                      ▲ 까칠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와 스타인웨인피아노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 소리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클래식 FM의 피아노연주를 듣는 것이고 조금만 시간여유가 있다면 집에 있는 대가들의 피아노곡 음반을 듣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은 대부분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되었으니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왔던 피아노 소리의 주인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인 것이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할 때 기억나는 것은 스타인웨이 전용의자가 우리집에 있는 피아노보다 비쌌고, 억대의 피아노를 구매하는 개인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아이는 클라리넷 부는 걸 좋아한다. 

 

 

 

 

Life is

사진작가 김아타

2013. 5. 6. 16:24


앵글스

충남대학교 사진동아리인 사진예술반은 영문으로 '앵글스'라고 부른다. 

60년대 선배님들이 1969년 광은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을 했고 내가 군입대전인 89년에 창립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 했는데 세월은 흘러흘러 이제 45년의 역사를 가진 중년의 동호회가 되었다. 

많은 대학동아리들이 시대 변화에 따라 장기간 역사가 지속되기 어려운데 비하여 앵글스는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재학생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고 300명 가까운 졸업생 OB들의 모임이 탄탄히 유지되어 대전에서는 깊은 역사를 가진 동아리로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위기도 많았고 갈등요소도 분명 있었지만 다들 대학 신입생 시절의 초심을 벗어나지 않고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5월 3일 토요일은 앵글스의 재학생 춘계수련회가 계룡산 동학사지구에서 있었다. 대전에서 접근성이 좋은 수련회장소가 계룡산국립공원이다. 우리 집에서도 약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다만 너무 많이들 가 본 곳이어서 식상해 하기도 한다. 앵글스의 수련회는 재학생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OB들은 재학생을 격려하고 과거를 회상하는게 관례이다. 이번에는 나도 선배형들하고 함께 참석했다. 


77학번 경우선배님부터 85학번 선배들까지 함께 했고 88인 내가 제일 학번이 낮다. 20년 전에는 대전 근교 강변에서 천막을 치고 캠프파이어를 했고 새벽이면 추워서 벌벌 떨던 기억들이 소록소록한데, 이젠 천막치고 노숙하는 시대는 아니고 편하게 민박집을 이용하고 법규정에 캠프파이어가 금지되어 촛불을 켜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구름에 달가듯이 세월에 좋은 기억만 남아 있다. 후배들도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김아타

이날 계룡산 동학사 아래 민박집에서 선배형들과 우리나라 최고의 사진작가는 누구일까를 놓고 대화가 이어졌다. 다들 추구하는 미의 세계가 달라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주제였지만 지금도 사진작업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포함하여 독설이 강한 형들까지 합쳐진 결론은 '김아타' 였다.  가명이 확실해 보이는 철학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뉴욕 맨하탄의 세계사진센터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Atta Kim - On Air 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사진작가인 배병우, 구본창, 김중만 같은 분들은 국제적인 인지도에서 김아타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흔히 빌게이츠가 즉석에서 고가의 사진을 구매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 김아타는 독특한 사진세계로 그만의 팬들이 많다. 

그의 이름인 아타는 그의 사상을 아타이즘이라고 부르고 사진소재로 부디즘이 사용되는 것을 접하면서 가 살고 타를 살리기 위한 것... 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여간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고도 쉬운 그의 작품을 보려면 그의 누리집을 찾아가면 된다. 


http://www.attakim.com/mai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