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역사적으로 만주는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주 동부지역을 뜻한다. 중국 대륙의 주 지배민족을 지금의 한족이라고 한정해 본다면 한족의 시각에서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사례는 몽고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청나라 등, 수 차례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시절에 중국영토의 대부분이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황제, 금나라, 누르하치, 여진, 팔기군, 서태후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만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를 세운 민족이자 우리와는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민족이 과거에 고조선, 발해, 고구려의 역사를 내세우며 만주가 한 때는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영토였다고 주장해도 과거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영토로 한정되었고 그나마 분단국가가 되어 대륙의 섬이 되었지만, 중국은 비록 이민족의 지배를 당했어도 지금의 광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공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보다는 운이 좋다.

 

국사시간에 읍루, 말갈, 여진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자세히 알 기회가 없었고 가르치는 국사선생님들도  발해라는 나라외에는 잘 설명을 못 했었다. 우리가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배우면서도 의문시되었던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고 말갈은 발해의 주력 구성원이었다고 배웠었다. 동북지방에서 우리민족과 여진족이 어울려 살았고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귀화를 많이 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과 상당히 동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인하대학교에는 유독 외국학생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지리적 연관때문인지 중국학생들이 많이 있다. 대학원 수업에서 만난 만주족 후배학생 '샤뢰' 를 보면서 만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샤뢰와 대화를 나눌 수록 한족보다는 확연히 우리민족과 더 가까운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런 관심이 이어져서 최근에 만주족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만주족의 역사-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돌베게) 이다.  


만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샤뢰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그 유명한 산해관 근처가 집이다. 동북 3성은 만주족의 본거지였고 지금도 만족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내용중에 중국미인은 동북 3성에 많이 있다고 한다. 동북3성의 여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얼굴이 갸름하고 흰 피부와 늘씬하고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 남방인 항주에 미인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동북미인이 지금의 미인기준과 잘 맞는 것 같다.


중국은 큰 나라답게 지역별로 사투리도 가지각색이다. 우리나라같이 작은 면적의 나라도 지역별 사투리의 분포도가 높은데 중국의 사투리 차이는 더욱 크기 때문에 광둥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 말이다.

그런데 중국의 표준어는 동북 3성 그중에서도 하얼빈쪽 말이 기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샤뢰는 중국어는 잘 하지만 만주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멸된 언어에 속하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는데 샤뢰는 만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만족들 중에도 많지 않다고 알려준다. 중국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만주어를 알아야 한다. 청조시대의 수 많은 기록이 만주어로 남아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고 한다. 


샤뢰가 우리나라 영화 '활'을 보면서 영화속 만주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너무 신기했다고 하는데 함경도 북방은 사실 조선이 국경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성계가 여진족으로 의심받기도 하며 설령 그가 여진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하중에 이두란(이지란)이라는 여진족 심복이 큰 공을 세워 이씨 성을 받은 기록이 있고 용인에 많이 있는 청해 이씨의 시조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여진족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 여진족 출신 이지란(퉁두란)


물론 우리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역사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불가능한 주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에 단일민족이 한명이라도 있을 까 싶다. 어쩌랴 피는 섞이고 물은 바다에서 합쳐지는 것을...


만주족 출신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랑랑'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수도 봉천(심양)에서 태어난 만주족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인기 피아니스트로서 중국의 국보급 연주자이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1m는 밀려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랑랑이 사용하는 피아노가 바로 스타인웨이 이다. 


                    ▲ 만주족(여진족) 청년 '랑랑'


   - 그런데 피아노 대가들은 전부 스타인웨이를 사용한다.


피아노가 1억원이 넘는 가격에

우리나라에서 스타인웨이(앤손) 피아노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사람은 재벌회장도 아니고 피아노연주자도 아니고 예술의 전당 관계자도 아니고 지방문화예술회관 관계자도 아닌 조달청 국제물자국 외자장비과 악기담당 직원이다. 전국적으로 수요가 많을 때는 1년이면 10대 이상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하기도 하는데 이 제품들은 대부분 각 지방의 문화예술회관으로 공급된다.


직장에서 외자근무를 하면서 우연히 피아노를 구매한 적이 있다. 2번은 스타인웨이이고 1번은 백스타인 이었다. 당시 환율로 대당 1억 3천 이상으로 기억되었던 독일 함부르크산 스타인웨이 D시리즈 피아노에 관심이 생겨서 한국 에이전트였던 코스모스악기에 피아노에 대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받아놓았었다. 

국내 피아노연주자들이 가장 연주하기 원하는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기 때문에 각 지자체의 예술의 전당같은 문화회관은 다른 대안 없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요청하였고,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미국산은 연주자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미국산 스타인웨이가 독일산보다 저렴했지만 절대 선택하지 않고 전부 독일 함부르크산을 희망했었다.


스타인웨이는 독일사람이다.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내에서 먼저 생산을 했는데 나중에 세워진 유럽공장의 품질이 더 우수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역시 미국은 무기가 전공이다.  


블라드미르 호로비츠,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조율사를 비행기로 싣고 다니며 연주하신 분인데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이 분이 사랑한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이다. 


                      ▲ 까칠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와 스타인웨인피아노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 소리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클래식 FM의 피아노연주를 듣는 것이고 조금만 시간여유가 있다면 집에 있는 대가들의 피아노곡 음반을 듣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은 대부분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되었으니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왔던 피아노 소리의 주인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인 것이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매할 때 기억나는 것은 스타인웨이 전용의자가 우리집에 있는 피아노보다 비쌌고, 억대의 피아노를 구매하는 개인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아이는 클라리넷 부는 걸 좋아한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보다는 열정적인 삼바나 탱고가 더 연상되는 나라, 내게는 ‘몬테스 알파’로 친숙한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1903년생이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를 칠레 당국은 1911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한 아라우는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3~1918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직계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lause)의 지도를 받았다. 

위대한 스승 크라우제는 아라우에게 기술적인 기교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라우가 대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다양한 방면의 문화적 소양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아라우는 스승이 원했던 리스트의 승계자로서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호로비츠,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라우는 스승인 크라우제의 타계 후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11세)에 이루어졌다. 이후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과 같은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였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그는 1930년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하였으며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칠레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익군사정권치하의 조국 칠레에서는 연주초청에 응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198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교향악단과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인터뷰하였는데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6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타계했을 때 독일낭만주의 맥이 끊어졌다고 애통해 한 칠레사람 아라우 그는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섬세한 유대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그는 쇼팽, 베토벤, 리스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을 남겼다. 베르나르드 하이딩크의 지휘로 암스테르담 콘세르헤보관현악단(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과 연주한 음반, 50년대 후반 알세오 갈리에라가 연주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음반, 1986년 콜린 데이비스와의 음반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