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제르킨

클래식 음악계에서 유대계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금융과 군사적 패권을 차지하고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뚜렷히 내세울만한 문화적 자산이 없는 미국에서, 그나마 메이드인유에스에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재즈는 흑인노동자들의 고통의 창조물로서 탁월한 감성적 우월함에도 이 유럽이주민들에게 유럽의 고급문화 그 중에서도 고전음악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의 유럽탈출 및 미국으로의 대거 유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주지하듯이 고전음악은 유럽이 주도하였으며, 20세기 이전까지 미국에서의 고전음악은 없다고 할 수 있고, 유대인 음악가들의 미국 이주가 본격화 된 20세기 초부터 미국의 고전음악이 활발해 졌고, 유대계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미국은 탈출구이자 문화적 불모지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유럽문화를 동경했던 미국에서 대도시별로 교향악단들이 창단되었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이 미국산 연주자로서 명성을 높이기 전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에서 태어난 유대인 지휘자들이 대도시 악단을 고전음악 불모지인 미국에 클래식음악 붐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지휘자들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피에르 몽퇴, 모리스 아브라바넬,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아서 피들러, 조지 셸, 유진 오르먼디, 안탈 도라티, 게오르그 솔티 등으로서 미국 클래식음악의 초석을 세웠고, 미국은 전쟁덕에 어부지리로 대지휘자들을 영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클라라 하스킬이 신체적 장애와 유대인로서의 한계로 인하여 나치시대 절망의 시기를 보낸 것은 유명하다. 1903년에 유럽의 보헤미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운이 좋은 음악가였다. 아돌프 부쉬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그들은 32년간 협주를 하였으며, 루돌프 제르킨은 아돌프 부쉬의 딸이자 바이올리스트였던 이레네(Irene)와 1935년 결혼하여 부쉬가문의 일원이 되어 아돌프 부쉬와 그의 형인 지휘자 프리츠 부쉬(Fritz Busch), 동생인 첼리스트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 제르킨과 이레네의 아들 숀(호르니스트), 그리고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Peter Serkin)과 함께 음악 가족을 형성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제르킨은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1939년 미국으로 부쉬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음악적 명성과 유대계 음악인들의 도움으로 커티스(Curtis)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축제 중 하나인 말보로 음악축제를 주재하였다. 그는 평생을 학생들을 가르키면서 연주생활을 하였는데 제르킨이 부쉬의 영향력을 벗어나 세계적인 독주연주자로서 알려진 것은 1952년 아돌프 부쉬가 세상을 떠난 후 부터이다.

 - 최고의 인기피아니스트인 중국의 랑랑도 커티스음악원에서 음악장학생으로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맨으로 거듭낳았다고 한다.



훌륭한 연주자라면 뛰어난 기교와 뜨거운 감성이 이상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호로비츠같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끊임없이 피아노와 씨름하면 연구했으며, 고전 음악 레퍼토리부터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레퍼토리, 그리고 막스 레거의 후기낭만주의 음악과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의 현대 레퍼토리를 두루 연주했다. 그의 전성기는 50~70년대이다. 비록 그의 실황음반은 극히 드물지만 명쾌하고 투명한 그 연주가 나는 좋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보다는 열정적인 삼바나 탱고가 더 연상되는 나라, 내게는 ‘몬테스 알파’로 친숙한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1903년생이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를 칠레 당국은 1911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한 아라우는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3~1918 동안 프란츠 리스트의 직계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lause)의 지도를 받았다. 

위대한 스승 크라우제는 아라우에게 기술적인 기교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라우가 대가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제공한 그는 다양한 방면의 문화적 소양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아라우는 스승이 원했던 리스트의 승계자로서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호로비츠,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라우는 스승인 크라우제의 타계 후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11세)에 이루어졌다. 이후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과 같은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였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그는 1930년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하였으며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칠레와 미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익군사정권치하의 조국 칠레에서는 연주초청에 응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국에서의 아라우는 자신만의 지적영감, 라틴특유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승계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연주를 통하여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198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KBS교향악단과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인터뷰하였는데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6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타계했을 때 독일낭만주의 맥이 끊어졌다고 애통해 한 칠레사람 아라우 그는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섬세한 유대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그는 쇼팽, 베토벤, 리스트의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을 남겼다. 베르나르드 하이딩크의 지휘로 암스테르담 콘세르헤보관현악단(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과 연주한 음반, 50년대 후반 알세오 갈리에라가 연주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음반, 1986년 콜린 데이비스와의 음반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