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브라보 재즈라이프

라틴계음악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라는 멋진 이름에 반해서 음반을 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노예들이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뿌리인 것은 알려져 있다.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 흑인노예의 후예들이 탄생시킨 재즈가 미국의 대표 음악이 되었고, 쿠바에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전통음악이 타락한 쿠바 사회에 맞물려 쿠바재즈가 시작되었다. 새롭게 알게된 것은 쿠바재즈가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 마력이 있다는 것과 이런 노인들이 세상을 달관한 음악을 연주하는 놀라움이 교차되었다.

한국재즈, 들어는 보았지만 생소하다. 알고있는 재즈뮤지션, 류복성, 이정식, 웅산, 나윤선 정도이다. 남무성님의 재즈만화 3권을 보며 옆문으로 입문한 재즈이지만, 재즈 1세대들인 노검객들의 둔탁하지만 농염한 연주에는 감동이 있다. 남겨진 숙제는 1세대 재즈뮤지션들을 기록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도 재즈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 재즈공연 보기가 어렵다. 재즈바라는 간판으로 영업하는 곳에서도 다른 음악이 흘러나온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1999년 영화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유사하다. 그래도 영화는 감동이 있고 재미도 있었으며 우리 재즈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블로그도 틈틈히 자료를 모아서 한국 재즈뮤지션에 대한 기록을 올려보고 싶기도 하고, 아울러 재즈공연에 대한 기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거라고 판단된다. 직장내에서도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청취장소가 부족하여 동호인들끼리 개인집에서 음악감상을 하시는데 4,50대 사회주축인 분들의 문화생활이 너무 빈곤하다.


▲ 브라보 재즈 라이프 포스터(이판근, 류복성, 김수열, 조상국, 김준, 박성연, 신관웅, 이동기, 강대관, 강태환, 최선배)


 

                ▲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약칭은 BVSC이다.)


혁명과 음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1959년 성공하였다. 1900~1950년대  혁명전의 쿠바는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국가 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의 역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독재정권하에서 수도 아바나는 타락과 환락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환락의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쿠바음악의 최전성기로서 사교클럽이 번성하였고 당시 수도 아바나의 가장 대표적인 사교클럽이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이다. 우리나라의 예인중에서 기생출신이 많은 것도 비슷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가, 권번과 요리집, 요정같은 무대가 있었기에 예악도 같이 발달하는 현상.

사회주의적 성향인 카스트로 정권에서 사교클럽이 배타되었고 여기에서 주로 연주되던 전통적 쿠바재즈는 침체하였다. 역시 사회주의와 재즈는 어울리는 단어들의 조합은 아니다. 쿠바음악이 세상으로 알려진 전기는 냉전시대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쇠퇴 그리고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음반인 PD R.쿠더와 영국음반사 월드 서킷 사장 N.골드가 쿠바 음악가들의 합주를 녹음하기 위해 1995년 쿠바를 찾았고, 쿠바재즈에 심취한 쿠더는 이듬해 다시 쿠바를 찾아 쿠바 전역에 흩어져 있던 노인 연주자들, 즉 콤바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이브라임 페레르를 주축으로 하여 기타 멤버인 오초아, 포르투온도 등을 영입하여 과거 최고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팀을 만들어 '월드 서킷·논서치'라는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였고, 그 뒤는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세계적인 쿠바음악 붐을 일으키며 6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무려 12만장이 판매되었다.  




                                ▲ 콤바이 세군도


세군도

장 쿠바사람 같이 생긴 세군도는 1907년 생이다. 생존했다면 올해(2013년) 107세. 쿠바의 여러 그룹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였고, 쿠바혁명 뒤에는 담배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참고하자면 쿠바는 에스파냐계, 흑인노예, 토종원주민의 혼혈이 섞여 있다.




                         ▲ 오마라 포르투온도


오마라 포르투온도

년 전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본 조화에서 국민가수 000이라는 꼬리표를 보았다. 스스로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가수가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오마라는 쿠바의 국민가수이자 국보급 가수이다. 80노인이 국민가수로 불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그녀는 1930년 수도 아바나생이다. 10대 중반에 댄서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오랑**과 비슷하다고 첫 인상을 말해주는데 국민가수에게 죄송스럽긴해도 그런것 같기도 하다.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인 '필링(feeling)의 피앙세 미스 오마라 브라운'으로 불리며 쿠바 전역에 명성을 날렸고, 여성보컬 그룹 콰르테토 라스 다이다'에서도 활약하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유일한 여성멤버로서 독특한 음색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였는데, 잘 들어보면 트롯에도 잘 어울릴 듯한 음색이다. 샹송같기도하고 포르투칼 파두의 색깔도 있다. 밀바가 노래부르는 것 같기도 한데 이분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는 우리 정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창단 멤버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쿠바스타일 피아노연주자 루벤 곤잘레스(2003년 사망)


루벤 곤잘레스

2001년 한국공연을 하기도 한 그는 의대생이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연주활동을 하는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길옥윤선생과 유사한 여정이다. 그는 자신만의 피아노스타일을 완성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대외적인 명성은 역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쿠바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받들어 졌다.

우리의 길옥윤선생은 박춘석선생 등과 같은 국민작곡가였으며 우리나라 가요계를 주름잡던 분이신데 명성에 비하여 자기관리에 철저하지는 못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함이 사업과는 맞지 않는데 지금처럼 경영이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지원되던 시절이 아닌 주먹구구식 경영이 이루어지던 때, 그의 사업실패는 충분한 예견이 된다. 사업실패 후 피신한 일본에서의 구라브(클럽) 운영하였는데 그의 클럽을 찾았던 한 분이 잡지에 기고를 한 것을 보았다. 대음악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는데 길옥윤선생은 암발병후에 임종을 우리나라에서 맞기 위해 귀국하였고 쓸쓸히 사라졌다. 언젠가는 이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한편 루벤 곤잘레스의 연주는 정확한 타이밍이 일품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그는 음악을 시작한 지 50년만에 첫 자신만의 앨범인 Introducing...Ruben Gonzalez을 발표하였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루벤 곤잘레즈를,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훌륭한 피아노 솔리스트"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는데 그는 실질적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음악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 리드 싱어 이브라힘 페레르(2005년 8월6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브라힘 페레르

이브라힘 페레르는 14살때부터 직업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쿠바혁명 후 잊혀졌으나 199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파우스티노 오라마스

오라마스는 1911년생이다. 15세부터 연주활동을 시작하여 90세가 넘어서까지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멤버들이 많아서 여기서 줄인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밤해변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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