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바다낚시


대전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바다낚시 출조지는 서해, 그중에서도 서천의 마량포구, 홍원항, 보령의 대천항, 무창포, 오천, 그리고 당진시의 장고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낚시와 인생을 함께 하는 우리 청 낚시 선배님들은 돔류의 대상어가 부족한 서해안보다는 통영, 여수 등등 남해쪽으로 수시로 출조하지만, 서해바다는 서해바다는 낮은 수심, 뻘물 그리고 고패질을 하는 낚시방법 등 독특한 재미를 안겨주는 특성이 있다.


작년부터 조달청 낚시동호회도 젊은 회원들의 가입 및 참여를 유도하고 도를 닦기 보다는 가끔은 즐기는 낚시를 추구하기로 결정하고, 바다낚시 출조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서해쪽 항구는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부터 인기가 많은 탓인지 낚시배 예약의 불편함으로 당진, 태안 쪽 보다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서천군 마량, 홍원항을 찾고 있다. 각 항구 포구마다의 느낌이 다르고 특징도 있지만 서해바다는 그리 넓지 않고 충남쪽은 더 좁아서 출발지는 다르지만 매번 비슷한 장소에서 낚시를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서해안 출조(2013.6.)는 대전에서 서천, 당진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혜택을 보는 셈인데, 조달청 낚시동호회의 바다낚시는 다수 회원들이 대어를 잡을 수 있는 깊은 바다로의 출조의견을 모아서 작년 쭈꾸미낚시를 갔을 때 잘 협조한 해돋이낚시의 도움으로 홍원항 도깨비호를 임차해서 서해 외연도까지 출조했다.  













충청남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유인도인 외연도의 유래는 안개(해무)가 많아서 늘 연기에 쌓여있는 섬이라고 하는데 이 날도 역시 해무가 가득하다. 해무가 많으면 조황이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어서 걱정 되었다. 20명이 승선가능한 배를 총 16명이 승선한다고 예약을 했는데 전날 4명이 급한 일이 발생하여 불참하는 변고가 발생하여 총 12명이 출조했다. 서운하지만 참석한 회원들은 쾌적한 낚시가 가능해서인지 서운해 하지 않는다.


한국재발견에 외연도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가 소개됐다. 외연도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미리 쌓았다면 눈앞에 물고기만 보이고 외연도의 진가를 볼 수 없던 내 근시안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홍원항에서 새벽에 출발한지 약 1시간 30분 가량 항해를 하는 동안 대부분 선실에서 잠을 청했다. 좁은 선실이지만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는 낚시가 인생인 선배님들(고기ㅇ, 김현ㅇ 등)이 감탄스럽다.  오늘 승선한 도깨비호 선장님은 그동안 보아왔던 낚시배 선장과는 다른 서비스정신으로 뭉친 프로선장님이시다. 출조를 마칠때까지 진심으로 철저히 챙겨주시며 다들 조과에 만족할 때 까지 열심히 이동하셨다. 10여년간 승선한 바다낚시배 선장님중에 진정성과 실력 모두 최고였다.  





외연도 출조는 비교적 선비 지출이 많아서 인지 인근 바다에 낚시배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낚시배들이 연근해를 벗어 나지 않고 변죽만 올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큰 기대를 안고 온 출조인들에게 큰 씨알의 고기는 기대하기도 힘들고 실망하지 않을 정도의 조과를 올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무리 유가상승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서운했었다. 이번 출조는 제대로 바다낚시를 즐겨보자는 의견을 수용하여 여유가 많지 않는 동호회의 사정을 무시하고 비용 지출을 각오하고 마련한 자리이다.   





O.B. 라영주 선배님이 연질대로 대형 광어를 잡는 저력을 보여주셨는데, 조금 후에 양ㅇㅇ 회원이 대형 놀래미를 낚았다. 제주도에서는 어랭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45cm 가 넘는 놀래미는 처음 보았다. 다수의 기대속에 2시간 후에 횟감으로 사라졌다. 




이필열 회원이 낚은 우럭을 들어보였다. 외연도에는 이 정도 사이즈의 우럭이 대중적인 크기라고 한다. 부럽다.

 




예전에 타보았던 어설프게 고깃배를 개조한 낚시배가 아니다. 전동릴용 전원, 해수가 공급되는 쿨러, 낚시꽂이 등등 사용자 위주로 낚시배가 개조되었고 선장님은 개개인의 낚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줄이 엉켜도 부담이 없다. 




이 섬은 참돔 낚시가 잘 되는 변도라는 무인도이다. 양식장이 있고 갯바위 낚시는 금지되어 있다.





대형 삼식이(쏨뱅이)를 잡아 올린 양ㅇㅇ 회원 



곧바로 오늘의 우럭 최대어를 낚아올린 양ㅇㅇ 회원이다. 





낚시 경력 50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김현태 회원이 우럭을 잡고 기뻐하고 있다. 감성돔 낚시를 즐기는데 서해 배낚시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고 하신다. 






배에서 먹는 회는 특별한 맛이다. 숙성한 회가 좋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즉석에서 잡은 회맛을 당해낼 수 있을 까 싶다. 광어, 우럭, 놀래미를 듬성듬성 썰어놓은 회를 먹고 있는 동호회원들. 종이컵에 따라서 마시는 소주는 이 때가 최고의 맛이고 해풍에 정신이 맑아져서 쉽게 취하지도 않는다.  






부자간의 대화가 많지 않은 시대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낚시를 사랑하는 낚시인 중 한명인 조연찬 회원 부자는 낚시를 같이 다니는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4짜 우럭을 걸어 올렸다. 역시 검객부자 답다. 





오늘의 조황이다. 이미 뱃속으로 사라진 고기가 절반이지만 이 것을 제외해도 제법 성과가 좋고 무엇보다도 씨알이 굵어서 대부분 만족스러운데 도깨비호 선장님은 자신의 배를 타고 성과가 좋지 않다고 미안해하신다. 

다들 선장님이 마음에 드신다고 다음에 또 이분하고 출조하자고 한다. 서천에서 도깨비팬션도 같이 운영하시는 선장님(010-5041-5525)께 감사드린다. 





     



작은 포구에는 어시장이 형성된다. 바다낚시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어시장을 구경하며 수산물을 사는 재미도 상당하다. 홍원항에는 수산물시장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 가격도 상당히 저렴하였고 양식을 자연산으로 속여서 파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나 해서 도깨비호 선장님께 등대수산을 소개받아서 찾아갔는데 아주머니가 친절하고 연세가 많으신데도 충청도식 위트가 있으시다. 잡은 고기를 손질하면 킬로그램당 3천원인데, 자연산 대형광어를 손질해서 킬로그램당 2만원에 살 수 있다. 저녁 회식용으로 5킬로그램, 다른 분들은 가족회식용으로 광어를 사가지고 집으로 출발했다. 저녁회식은 늘 그러하듯이 유성 삼천포수산(042-824-8242)에서 홍원항 광어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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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대회

조달청 본청은 대전에 있는 정부대전청사 3동에 있다. 기관의 역사는 약 60년이 넘었으며 전국적으로 직원의 수는 약 1천명이고 본청에는 약 4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사내 복지의 일환으로 다양한 동호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근 젊은 직원들이 많이 입사하면서 당구, 야구, 배드민턴, 탁구 등 스포츠 동호회가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조달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내 동호회는 낚시동호회와 산악회이다. 두 동호회 모두 약 40년이 넘는 역사가 있지만, 민물낚시에 대한 인기가 없어지면서 우리 낚시동호회도 회원수 감소를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해있다. 전국의 호수가 오염되고 어족자원의 남획으로 민물에 붕어가 사라지니 조사들의 흥미가 반감하고 젊은 층은 루어낚시에 관심을 갖다보니 민물낚시를 기간으로 하는 우리 낚시동호회는 이제 변방으로 밀리는 것 같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우리 청 낚시동호회원들은 양어장낚시, 경기낚시 등으로 불리는 낚시대회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연과 동화되는 낚시를 추구하는데 덕분에 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노출하지만 큰 불만들은 없다.  전국의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참가하는 제11회 중앙부처대항 전국공무원낚시대회가 공주 자연농원 낚시터에서 개최되었다. 자연농원낚시터는 경기낚시 대회가 많이 열리는 곳인데 입질이 까다로워서 일반 동호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곳이다. 

항상 전년도 우승 팀이 대회를 개최하는 룰에 따라서 올해는 전년도 우승팀인 농촌진흥청이 수고를 해주었다. 작년에는 그 전년도 대회에서 우승을 한 조달청에서 주최하여 당진시 전대리지에서 개최하였는데 이철환 당진시장님이 적극 협조하여 주셨고 당진시 공무원들도 휴일에 나오셔서 도움을 주셔서 고맙고도 미안했었다. 당진시의 도움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니 다른 일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낚시대회는 안전행정부의 재정지원이 이루어지는데 협조가 힘들어서 우승팀은 개최하면서 1등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행사지원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조달청 낚시동호회

조달청의 조가 잡을 조라고 우기는 분이 있다. 물건조달을 해야하는데 물고기만 잡는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신다. 최근에 뿌리없는 동호회가 장족의 발전을 해서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지만 대부분 성적을 다투는 리그전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낚시동호회는 물고기와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삶을 즐기는 행복한 동호회이다. 연령대가 높고 젊은 직원들이 부족하지만 다들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이기적인 직원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번 대회는 너무 급작스럽게 개최통보가 와서인지 전체적으로 참여자가 적다. 우리청에서는 오세홍, 조연찬, 고기철, 윤성원, 김성찬, 김한두, 이남주, 이강율, 최동진, 그리고 내가 출전했다.  


물고기는 다 어디로 갔지

경험적으로 경기낚시는 자리배정이 당일 성과의 핵심 포인트이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청은 자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입질 한 번 받지 못한 회원이 3명이나 된다. 전체적으로 몰황이기도 하고 너무 덥고 자리별 편차도 심해서인지 대회 중간에 다들 지쳐버렸다. 

 


             ▲일단 아침부터 먹고 시작합시다.

 

             ▲자리배정을 했다. 우리청 동호회는 이런 방식의 낚시는 선호하지 않는다.


             ▲과거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대회에서 개인 2위를 차지했던 최동진회원. 

               우리나라에 가장 낚시를 사랑하는 사람중의 한 명이다.


 
       ▲이번에 진급하시는 파평윤씨 윤성원 회원. 낚시 채비를 다루는 실력이 아트의 경지에 도달했다.
           물론 채비의 아티스트가 낚는 것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전 회장이신 오세홍 회원. 항상 넉넉하신 마음으로 동회회를 이끌어 주신다.  

            ▲낚시에 대한 애정으로 항상 행사를 빛내주는 이남주 회원.

            ▲품질관리단에서 참여하신 김한두회원. 요즘은 내림낚시를 주로 한다고...  


            ▲이름부터 낚시를 할 수 밖에 없는 고기 철 회원.  


            ▲이날 우리 청에서 가장 좋은 실적을 거둔 김성찬 회원. 


            ▲작은 체구이지만 낚시에서는 검객으로 불리는 조연찬 회원


            ▲말없이 세월을 낚으시는 이강율회원은 시작과 동시에 붕어를 낚었다. 


후기

농진청에서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웠고 급하게 준비해서인지 대회진행이 순조롭지 않았 보였다. 사회자가 낚시대회를 이벤트식으로 진행하면서 경기중간에 경품을 주는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 오히려 경망스럽고 가볍게 보여서인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 같다. 

이런 대회는 개최자에게 항상 고민이다. 민물낚시의 기본은 밤낚시인데 대낮에 하는 낚시 대회를 노지에서 열게되면 거의 고기를 잡을 수 없고 관리지에서 개최하면 낚시의 맛을 잃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입질 한번 받고 소식이 없다.

 










과거 보건복지부에서 개최한 대회(이천 각평지)는 당시 유시민 장관이 출전했었고(이분이 낚시광인것은 이때 알았다.) 몇년 전 예당지 대회에서는 대회시작할 때는 탤런트 여운계씨가 사망소식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오무렵에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분이 공무원들인 참석자들이 다들 당황했었던 기억이 있다(이때 조달청이 우승했다).  

11년의 역사가 쌓인 중앙부처대항 공무원낚시대회가 연합회 체제로 변신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 이고 우리 청도 적극 찬성이다. 매년 참석해보면 예전에 출전하셨던 낮익은 분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퇴직하신 경우이다. 퇴직자까지 초빙해서 대회를 열고 젊은 사람들도 적극 참여하는 축제가 되도록 모든 부처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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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꽃' 이다

 

'지난주 목요일, 2주일 전부터 대흥동 '문화공간 주차'에 전시되어 있는 내 이름작품을 찾으려고 대흥동으로 향했다. 친구 기라와 화가 박석신과 함께 저녁을 할 계획으로 시인 이이체의 모친인 조경희 여사와 이희정 여사를 모시고 간 대흥동 거리는 80년대 만큼의 활력은 없지만 둔산동 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대흥동만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꽃이다 전시회가 5월 26일 까지 예정되어 있다. 이미 종료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화가에게 몰랐다고 할 수는 없어서 두 여사분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온 사연만 알려주었는데, 화가는 맛갈나는 말솜씨로 갤러리를 소개하고 문화활동, 캘리그라피를 하게된 사연 등을 설명한다. 

점례나 점숙같은 통념적으로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름을 가진 아주머니들에게 캘리그라피 그림을 그려 촌스러운 이름을 멋진 꽃으로 재탄생시켜 선물할 때 그 분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감격하는 화가의 만족감과 예술적 가치의 재발견은 이러한 행사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이름을 말하고 내 마음을 말하고  

 

갤러리에서 화가와 마주보며 편하게 대화를 하면 화가는 캘리그라피 작업을 한다. 조경희 여사는 본인과 아들인 시인 이이체, 이재욱을 이희정 여사는 본인과 아들 김범진을 묘사하고 화가는 멋진 작품으로 남겼다. 모두 수작이었지만 내 마음에는 말 많고 잘 덤비는 범진이를 호랑이와 까치로 표현한 작품이 최고였다. 

이름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쉬어가는 시간과 공간을 남겨주는 작품들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 아주머니 모델들과의 대화



                      ▲ 2~5분의 짧은 시간이다. 내 이름이 꽃으로 탄생한다. 

 


                      ▲ 김범진: 범은 호랑이를 진은 말을 많이 하는 아이의 특성을 담아 새로 표현했다.



                      ▲ 이희정




1000점의 작품이 모이고 

 

'캘리그라피' 작업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에너지가 발산되어 기가 빠져가는 것 같았다. 작가는 1000개의 작품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마친다고 했다. 친구 기라와의 인연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예술 체험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화가와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은 근처 '내집'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했다. 나는 내일 인하대 가는 날이어서 술을 삼가했지만 화가는 술을 즐긴다. 마시고 싶었지만 좋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게 현실이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아쉽게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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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치기"

'대전에선 마땅히 먹을 많한 음식이 없다. 손님이 와도 모실 곳이 마땅치 않다. 대전은 먹을거리, 먹을 곳, 먹을 정보가 부족한 '음식 3무 지대'다. 라는 주제의 신문 기사를 보고 공감했다.


대전시에서 설렁탕, 돌솥밥, 삼계탕, 숯골냉면, 민물매운탕, 구즉 도토리묵을 대전 대표음식으로 선정한 적이 있는데, 설렁탕, 삼계탕, 냉면, 민물매운탕, 돌솥밥을 지역토속음식으로 내세우는 것은 지역민들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설렁탕은 한밭식당, 삼계탕은 예전 구도심의 금성삼계탕, 동성삼계탕, 고려삼계탕, 돌솥밥은 귀빈식당, 무지개회관, 유성의 골프선수 장정 모친이 하던 경성회관이 유명하기는 했지만 전국구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대전의 대표음식으로 소개되는 것들이 두부두루치기, 묵 정도이니 참 먹을거리가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두루치기란 소고기나 돼지고기 또는 조갯살이나 낙지 따위를 잘게 썰어 넣고, 콩나물, 버섯, 박고지 등과 함께 볶다가 양념한 국물을 조금 부어 끓여 낸 음식이라고 나와 있다.  

두부두루치기는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어서 두루치기가 충청도 사투리인줄만 알았는데 전국적으로 재료만 다른 두루치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징어두루치기, 돼지두루치기, 김치두루치기 등등...


대전에는 유독 두부, 콩나물, 닭을 사용한 음식이 많은데 재료부족이 낳은 결과이다. 신선한 해산물의 부족과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단백질의 부족을 닭과 두부로 대신하였고, 이런 음식들은 대부분 저렴하다보니 손님대접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대전에서는 먹을 게 없다는 말을 하는가 보다.


두부두루치기가 전국적인 음식으로 거듭나았으면 하는 기원과 기대를 하며 대전역부터 유성까지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을 접해보았다. 


"별난집"

대전역 앞쪽 중동 한밭식당옆에 있는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88년에 처음 맛 보았다. 지금은 강원도에서 공업선생님을 하고 있을 권계순 선배님하고 같이 였는데 아마도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출사 후 였다.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맵고 고소하다. 그런데 맛있다. 면사리를 두부밑에 넣어서 나오는데 절묘한 맛이다.

서울출신 동료들하고 왔을 때 이런 집을 찾고 있다며 만족도가 높은 결과를 얻었는데 역시나 최고의 맛이다. 개인적으로는 대전에서 가장 두부두루치기 맛이 좋은 집이다.  


"광천식당"

선화동 삼성생명 빌딩 부근에 있다. 과거에 광천식당 골목에는 벌집식당, 청양식당이 있어서 두부두루치기가 유명한 골목이었는데 지금은 광천식당만 남았다. 특생이 많이 남아있는 대흥동과는 달리 이 곳 선화동 충남도청 앞 쪽은 그 많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쇠락해 가는 대전 구도심의 아쉬움만 남아 있다. 충남도청마저 내포로 이전한 시점에서 (구)도청건물을 문화의 아이콘으로 변신시키지 않는다면 구도심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심정이다.



선화동쪽에 있는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은 전통적으로 멀국이라고 부르는 구수한 칼국수 국물을 준다. 두부두루치기에는 보통 국수사리를 비벼서 먹는데 식사를 하기 전에 소주는 필수였고, 25도 소주시절에는 1병은 보통이고 2병은 주량이 센 사람으로 불렸었다. 지역소주인 선양소주대신 진로소주를 마시는 것이 대접받는 다고 생각되던 시절이다.



그런데 최근 광천식당에서 맛 본 두부두루치기는 훌륭하지만 최고는 아닌 것 같다. 추억은 남았지만 약간 맛은 변해버린 느낌이다.

별은 세개 ★

"진로집"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대전의 두부두루치기 식당을 소개할 때 진로집이 맛집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몇 개를 빼고는 온통 칭찬으로 가득한 식당인데 비록 맛을 평가하는 것은 주관이지만 진로집에 과찬을 남발하는 것은 블로그의 상업성을 의심해보게 된다.

 

'진로집'이라는 작명이 참 좋다. 아마도 진로소주에서 차용한 명칭인데 과거 진로소주가 지역소주에 비하여 한단계 위로 대접받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소주와 잘 어울리는 두부두루치기를 전문식당의 이름으로는 좋은 선택이다.

원도심인 대흥동 대전여중 앞쪽에 위치한 진로집은 작은 골목안이어서 일단 찾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건물과 변하지 않은 집기 등을 간직한 두부두루치기의 원조급 식당이다.





진로집에서 두부두루치기를 맛보면 대부분 반응이 비슷하다.  

맵다. 친절하지 않다.

오래된 건물이고 인테리어 감각이 있는 곳이 아니어서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친절함이 없다. 90년대 서구가 개발되고 대전청사가 이전하기 이전까지 대전의 대부분 식당들은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친절함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는 아무 생각없이 장사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진로집은 무대접이 대접이던 예전 대전지역 식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런 전통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데 간직하고 싶은 가 보다. 중구청에서 관내 맛집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외지사람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다. 


진로집은 소설가 백파 홍성유 선생(2002년 작고)이 선정한 한국 맛있는집으로 소개하였다. 방배추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백파선생의 맛기행이 공짜는 아니었구나 하는 실망감이 높았는데 그보다 지금은 백파선생이 맛기행 하던 시대가 아니기도 하고 실제로 맛도 명성에 비하여 별로여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다.

별은 두개 ★


"내집"

20여년 전에 대흥동 풍년갈비가 유명했었다. 지역 극장에서 메인영화 상영전 극장광고에 나오던 갈비집이었는데 집안 행사라도 있으면 대흥동 풍년갈비를 가는게 통과의례 였다. 언젠가 이 식당 냉면에 대장균이 많이 검출되었다고 언론에 크게 나온적이 있었다. 지금은 만나기 힘든 우리 부모님과 삼형제가 같이 가족식사를 했던 좋은기억에 근처를 지나가면 풍년갈비 건물을 보게 된다.  

대흥동에 냉면집이 많다. 사리원면옥, 수라면옥 등등, 수라면옥 근처에 있는 내집식당이 있다. 개업한지는 11년째인데 주인 아주머니 음식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전북 김제가 고향이라고 하시는데 충청도 음식도 전라도 솜씨가 만나면 더 빛나는가 보다.

두부두루치기가 맛 있는집으로 화가 박석신의 소개가 있었는데, 올갱이해장국 전문식당이다. 올갱이해장국, 두부두루치기, 닭도리탕이 메인메뉴인데 음식과 어울리는 대흥동 구옥을 개조한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몇년전에 올갱이 국밥을 먹으러 왔던 기억을 있는데 그때는 맛을 잘 몰랐다. 올갱이 국밥은 어머니의 솜씨가 수준급이었고 집에서는 자주 먹는 음식이어서 식당에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게 내 성향인지라 두부두루치기와 증약막걸리(한겨레신문 회장이셨던 청암 송건호 선생의 고향 옥천 증약에서 만든 막걸리)를 먹었는데 수준급이다.

막걸리맛도 좋지만 두부두루치기는 별난집과 동급이다. 

이날은 막걸리와 두부두루치기를 함께 하며 예술가의 내면을 찾아가는 즐거움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대전에 오는 분들은 이곳에 들러보는 것도 멋진 여행의 기억이 될 것 같다.

별은 다섯개 ★




"대선칼국수"

79년 10살때 부친과 함께 지금은 작고하신 은행동 김대윤피부비뇨기과에 갔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를 좋아하셨던 부친이 대선칼국수를 지나쳐 가지 못하셨다. 아픈 몸에 속은 울렁이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있었고 억지로 입에 넣은 칼국수는 ..  맛있었다. 

대전역 앞쪽에 있던 대선칼국수가 둔산동으로 이전하여 성업하고 있다. 부친이 칼국수를 좋아하신 것이 나와 아이에게도 칼국수를 좋아하는 동인이 된 것 같다. 

대선칼국수는 그 뒤로 잊고 있었는데 아마 10년전쯤 직장에서 몰려간 점심식사자리에서 칼국수를 입에 넣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10살때 그 맛과 기억이 났다. 맞아 이집이야 하고..


그뒤로 대선칼국수를 자주 간다. 가게 입구에 다시다 박스를 쌓아놓고 영업하는 강심장인 대선칼국수의 두부두루치기도 수준급이다. 그러나 20여년 전의 꼬마가 느꼈던 맛을 한 번에 기억나게 해준 칼국수를 맛보며 가끔은 두부두루치기에 면을 먹기도 하지만 대선칼국수는 적당히 조미료가 들어간 국수맛도 훌륭하다.

별은 네개 ★


"동원칼국수"

대학 조교를 할때 송강동 동원칼국수를 많이 갔었는데 지금은 대전청사 앞에 있는 월평동 동원칼국수가 성업하고 있고 자주 간다. 

조개육수 칼국수이다. 대전에서 대흥동 대전중학교 근처에 있던 칼국수집들은 맵고 빨간 국물이 특징이었다. 별도로 쑥갖을 한 그릇 주는데 다른 고장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칼국수를 먹는 것을 볼 수 없다.

동원칼국수의 두부두루치기는 표준형이다. 특별한 특징은 없지만 적당히 맛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다.

최고는 아니다.

 

별은 세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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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사진작가 김아타

2013. 5. 6. 16:24


앵글스

충남대학교 사진동아리인 사진예술반은 영문으로 '앵글스'라고 부른다. 

60년대 선배님들이 1969년 광은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을 했고 내가 군입대전인 89년에 창립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 했는데 세월은 흘러흘러 이제 45년의 역사를 가진 중년의 동호회가 되었다. 

많은 대학동아리들이 시대 변화에 따라 장기간 역사가 지속되기 어려운데 비하여 앵글스는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재학생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고 300명 가까운 졸업생 OB들의 모임이 탄탄히 유지되어 대전에서는 깊은 역사를 가진 동아리로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위기도 많았고 갈등요소도 분명 있었지만 다들 대학 신입생 시절의 초심을 벗어나지 않고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5월 3일 토요일은 앵글스의 재학생 춘계수련회가 계룡산 동학사지구에서 있었다. 대전에서 접근성이 좋은 수련회장소가 계룡산국립공원이다. 우리 집에서도 약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다만 너무 많이들 가 본 곳이어서 식상해 하기도 한다. 앵글스의 수련회는 재학생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OB들은 재학생을 격려하고 과거를 회상하는게 관례이다. 이번에는 나도 선배형들하고 함께 참석했다. 


77학번 경우선배님부터 85학번 선배들까지 함께 했고 88인 내가 제일 학번이 낮다. 20년 전에는 대전 근교 강변에서 천막을 치고 캠프파이어를 했고 새벽이면 추워서 벌벌 떨던 기억들이 소록소록한데, 이젠 천막치고 노숙하는 시대는 아니고 편하게 민박집을 이용하고 법규정에 캠프파이어가 금지되어 촛불을 켜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구름에 달가듯이 세월에 좋은 기억만 남아 있다. 후배들도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김아타

이날 계룡산 동학사 아래 민박집에서 선배형들과 우리나라 최고의 사진작가는 누구일까를 놓고 대화가 이어졌다. 다들 추구하는 미의 세계가 달라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주제였지만 지금도 사진작업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포함하여 독설이 강한 형들까지 합쳐진 결론은 '김아타' 였다.  가명이 확실해 보이는 철학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뉴욕 맨하탄의 세계사진센터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Atta Kim - On Air 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사진작가인 배병우, 구본창, 김중만 같은 분들은 국제적인 인지도에서 김아타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흔히 빌게이츠가 즉석에서 고가의 사진을 구매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 김아타는 독특한 사진세계로 그만의 팬들이 많다. 

그의 이름인 아타는 그의 사상을 아타이즘이라고 부르고 사진소재로 부디즘이 사용되는 것을 접하면서 가 살고 타를 살리기 위한 것... 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여간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고도 쉬운 그의 작품을 보려면 그의 누리집을 찾아가면 된다. 


http://www.attakim.com/main.html


Life is

교회 안나가

2013. 5. 3. 15:47


"교회를 나가는 것과 기독교를 믿는 것"

크리스천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을 믿는 다는 것에 대한 방황이 길어져서 20여년 넘게 고민이었는데, 결국 종교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내세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합쳐진 내 고민은 같은 대전 지역의 토인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주변을 보면 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를 가진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무조건 믿어라'와 '원죄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날 때의 회의감이 발목을 잡고 있다.


몇년전 기억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내게 '교회믿고 천국가세요' 라고 말을 하고 쑥쓰러운 듯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아이는 교회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사실 교회를 믿으라는 말에 당혹스럽고 씁쓸한 하루였다. 

구세주가 있다면 우리 마음안에 있음을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Unchurched Christian

교회없는 기독교인을 뜻한다. 

지역 커뮤니티인 토인회에 참여하기 전에 고민했던 것은 이분들이 자유스러운 모임으로 보이는 종교적 모임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알게된 것은 토인회에 참여한 분들이 대부분은 교회에서 희망을 얻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결국 교회를 나가는 것과 기독교를 믿는 것은 별개이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종교관도 헛된 것을 인식하시고, 가정신앙 그리고 내 삶의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그분들은 크리스천이다.


기독교 방송이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다. 방송에 나온 목사분중 많은 분들이 과연 목사인지 유대교 랍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약에 집착한다. 적절하지 않은 구절을 뽑아내어 시대착오적인 우화를 비유한다. 구약스토리를 적절히 인용하면 독선과 기만이 픽션급 감동으로 변형된다.   


큰교회와 사업가

대형교회가 대기업과 혼동되기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는 세속적인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역사속에 세속과 종교가 구분된 적은 없었다.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종교사업가들을 비판하면 하나님이 나를 벌할 것 같고 기복에 영합하는 것이 나의 종교관 이라면 신앙이 사회의 악성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 

교회에 가지 않는 선한 사람을 벌하고 교회에 나가는 악인을 천당에 보내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앙

직장의 젊은 직원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이고, 또한 자신은 기독교를 믿지만 다른 종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직원도 많다. 

다양한 정보교류를 통해 종교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할 수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 선인의 말씀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비록 생각은 해도 실천이 어려운 일이지만 내 영혼을 스스로의 깨우침없이 누군가에게 맏긴 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 수 있다. 

Life is

수사받는 기법

2013. 4. 27. 16:54


 신문에 수사받는 기법에 대해서 나온 기사가 있었다. 조달공무원의 업무 특성상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찰과 검찰 같은 사정기관에 몇번씩은 불려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다. 

예전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작성해 보았다. 참고로 내 기억으로 검경에 5번 정도 가봤네...


1. 별거 아닌 게 아니다

수사관은 “별거 아니다”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소환할 때는 잠깐 얘기만 하면 된다 하고, 신문할 때는 자백하면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일종의 신문 기법이다. 한 변호사의 말이다. “체포된 피의자를 접견하러 가면 대부분 조금 있으면 풀려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곧 구속될 상황인데도 말이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러려면 수사기관이 소환 통보를 할 때 자신이 정식으로 입건된 ‘피의자’ 신분인지, 아직 입건되지 않은 ‘참고인’ 신분인지 확인해야 한다. 피의자 신분이라면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요구하자.


 →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어도 대부분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죄의 유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사기관이 그동안 불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이 없어도 엮일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작동하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2. 수사 초기에 변호인을 구하라

외국 영화를 보면 자유롭게 로이어를 부른다. 경찰은 로이어를 부르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평등한 관계로 바뀐다. 헌법에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할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이라면 더욱 법률적 조언을 받아야 한다.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좋은 변호인을 소개받아야 한다. 

공무원들이 초기 대응을 잘 못하여 기소가 되면 신분이 걸린 문제이므로 상당한 변호사 비용이 든다. 사후에 약방문 두드리는 격이다. 평균 3~5천 만원 정도의 변호사 비용이 사용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사건 초기에 돈을 아끼지 말고 변호사를 구하자. 변호사 양산시대인 지금은 친절하고 수임료가 저렴한 변호사가 상당히 많다. 출석 날짜도 수사기관과 협의하거나 조정·변경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방어 무기를 갖춘 뒤 출석하자.


3.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협업하라

아무리 성실한 변호인이라도 그는 남이다.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지도,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지도 않는다. 피의자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지만, 변호인에게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무죄 증거를 수집하고 구속된 피의자와 변호인 사이를 오갈 또 다른 조력자가 필요하다. 죄가 없으니까 혼자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고 자만이다. 수사나 재판은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가 결백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다. 특히 수사기관은 유죄라고 단정하고 몰아세운다. 유죄 증거는 확대하고 무죄 증거는 무시한다. 무죄라고 절규해도 그 상황을 혼자 벗어날 수 없다. 유죄 올가미가 씌워졌음을 인정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자.


→ 일단 사건이 시작되면 주변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직장에서 잘못된 사건으로 2년을 고생한 선배가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해서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을 만든 다른 사람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만나주지 않아서 내가 더 황당했던 안 좋은 기억이 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자. 


4. 진술 거부권을 활용하라

헌법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진술거부권이다. 이는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묵비권’이 아니다.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신문에는 일단 응하면서 불리한 질문에만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변호사와 협의한 진술만 하고 다른 질문에는 묵묵부답해도 된다. 흔히 대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지만, 현실에선 진술이 오히려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한 검사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건은 피의자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이유를 수사기관에 설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유죄 증거를 발견하고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책임이다. 직접 증거를 먼저 대라.”


→ 직장에서 보면 수사기관에 출두하면 이성을 잃어 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진술까지 열심히 하고 나온다. 잘 알고 지내는 수사관이 내게 말한다. 저런 놈하고 같이 근무하면 큰일 난다고..

필요한 말만 하자. 거짓말과 진술 거부는 다른 것이다.


5. 조사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을 정하라

피의자를 조사실에 넣어놓고는 몇 시간 동안 대기시켜서 피의자가 불안감에 심리적으로 무너지도록 하는 수사 기법이나, 수사관 한명이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며 수사를 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조금후에 푸근하게 생긴 수사관이 커피를 타 가지고 들어오며 고생이 많지요 하며 친절하게 대해주며 자백을 유도한다. 자신을 잡아넣으려는 사람을 구원자로 여기게 하는 전형적인 수사기법이다. 여기에 말려드면 안된다.

이럴 때 대응 방법은 출석할 때 조사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을 미리 정하고 변호인이 조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부당한 신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변호인이 옆에서 수사관의 질문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수사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 미리 정한 종료 시각이 지나면 조사가 끝나지 않아도 피의자는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장기간 조사는 피의자의 방어력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특히 심야 조사는 거부하는 게 낫다. 사실상의 가혹행위가 될 수 있다. 재출석하고 싶지 않아서 심야 조사에 응하기도 하는데 어차피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계속 소환한다.


→ 경찰이나 검찰에서 재소환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재소환은 죄가 위중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코 손해볼 일이 아니다. 수사관도 사람이어서 퇴근을 일찍하고 싶어 한다. 명심하자 수사관도 사람이다.


6. 자백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다

많은 증거 중에서 수사기관이 가장 원하는 것은 피의자의 자백이다. 혐의 자체가 불분명할 때 일단 자백을 받아내면 수사가 압축되고 법원도 유죄를 선고한다. 형사소송법은 자백 이외에 다른 증거가 없을 때, 즉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자백만 가지고 유죄를 선고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백은 ‘증거의 왕’으로서, 모든 무죄 증거를 뒤덮는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수사기관의 반복·유도 신문이나 “옆방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백했다”는 회유에 넘어가 거짓 자백해서는 안 된다. 혼자 계속 버티면 오히려 자기만 불리해질 것이라고 언뜻 생각하지만 전형적인 수사 방식에 불과하다.


→ 우습게도 수사기관에 소환된 많은 분들이 알아서 자백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한다. 이런 성향은 똑똑한 사람이 더 심하다.


7. “의심스러울 때는 검사의 이익으로”

법정은 거짓말 경연장인 것 같다. 판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억울한 일도 판사가 가려주지 못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선 양 당사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적어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는 경우가 많아서 진실이 100% 밝혀지기 어렵다. 게다가 판사는 같은 법률가인데다 공직자인 검사의 주장을 피고인보다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은 곧잘 무너진다. 따라서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검사의 유죄 주장·증거에 대해 판사가 합리적 의심을 품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무죄판결이 나오지 않는다.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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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주차 (Space Park-ing)' 갤러리 오픈

 

도안동 아파트 거실을 아트타일로 꾸미면 미적인 아름다움과 음향판 효과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오후 대학시절부터 아트타일 공예작업을 하는 앵글스 후배 미희를 만났다. 몇년만에 만나는 자리를 역시나 게으른 내가 약속시간에 늦었다. 돌이켜 보니 95년에 같이 대학원시험을 보았는데 어렸던 후배가 벌써 40이 넘었다고 한다.

벽지, 목재, 석재(대리석 등) 이외에는 벽장식에 사용할 소재가 많지 않은 것이 집 지을 때의 일반적인 고민이다. 아트타일을 사용하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장식효과가 있지만 시공이 복잡하고 비용이 높으며 이사할 때 탈착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후배가 시공의 어려을 설명하며 적극 권하지는 않는다. 나도 흙을 소재로 사용한 작품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만 아파트벽에 적합할 지는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개인주택이라면 주저함이 없을 것 같다.


금요일 오후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마침 선화동에 있는 기라에게 연락했다. 식사후의 장소는 화가 박석신이 운영하는 갤러리로 정하고 미희, 기라와 함께 출발.

주차장을 개조한 갤러리 키작은 하늘보기가 'PARKing 문화공간 주차'로 이름이 달라졌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아직 오픈하지 않았을 때였다고 한다. 화가의 성인 PARK 과 진행형 ing, 주차장의 뜻이 합해져서 문화공간 주차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갤러리와 문화공간의 차이는


이 곳이 화가 박석신의 개인 갤러리와 크로키 등의 수업을 하는 장소로만 알고 있었는데 화가는 세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쉼터 역활을 해줄 수 있는 공간을 꿈꾸며 문화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갤러리를 연상하면 몇점되지 않는 작품을 잠시 보는 장소였는데 예술과 체험문화를 결합한 대중으로의 적극적인 접근은 문화빈곤의 도시 대전에 꼭 필요한 현명한 시도인 것 같다.




                           이름모델과 대화를 하며 감성을 뽑아낸다. 편한 대화..



                              ▲ 이름이 작품으로 변하는 광경

 


'달빛도 때론 모양을 달리하지요'


화가 박석신(박교수)은 갤러리에서 내이름과 미희부부의 이름으로 각각 글씨그림을 그려주었다그림이 완성되어 눈앞에 보이기까지 기대와 설레임 그리고 약간의 걱정도 되는데 결과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돌아온다.

박교수가 내게 보내준 메시지는 '달빛도 때론 모양을 달리하지요'


 

 




내이름이 갤러리에 걸리고


박교수의 제안으로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됐다. 이런 영광이 있나. 정말로 지치고 바쁜 생활이 당연하게 받아 들여지던 내 모습이 편하게 쉬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 이름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다시 보니 미희 이름이 아트다. 박교수는 아름다울 미를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하고 감탄스러웠다. 미희는 도예작품에 사용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 위안 받고 싶은 사람, 미술이 알고싶은 사람 문화공간 주차로 가서 박 교수를 만나보기를 권한다. 문화공간 주차는 대흥동 대전여중 앞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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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버킨


에르메스(HERMES), 최고의 명품 브랜드이다. 

루이뷔통을 기저귀 가방으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가지고 싶어 한다는 버킨백은 영국출신의 프랑스 샹송가수 제인 버킨으로 인해서 탄생되었다. 

60년대 유럽문화의 아이콘, 제인 버킨(Jane Birkin)은 1946년생이고 마마 '주디 캠밸'은 영화배우였다. 세번의 결혼과 아빠가 다른 세딸의 엄마인 버킨은 영국출신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프렌치 샹송가수 겸 영화배우였다. 시인이기도 하고.. 


                                  ▲ 주디 켐벨(Judy Campbell)


                                 ▲ 제인 버킨(Jane Birkin)

 


첫 남편 - Jonh Barry


제인 버킨은 17세에 배우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 첫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1965년 훗날 영화음악의 거장이 되는 젊은 존 배리(John Barry)가 제작한 뮤지컬 'Passion Flower Hotel'에 출연했고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버킨이 19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존 배리는 007의 작곡가이며 아카데미와 그레미상을 수상한 훗날 영화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여자의 운명은 첫남자가 좌우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버킨의 첫남편부터 평범하지 않다. 제인은 첫딸인 Kate Barry를 낳고 다음해에 이혼했다. 


                                  ▲ 제인 버킨과 존베리 부부의 결혼시절 


                             ▲ 영화음악계의 거장이 된 존 베리의 말년사진이다. 


                                   ▲ 제인 버킨과 큰 딸 케이트의 어린시절 


                             ▲ 제인 버킨과 큰 딸 케이트의 최근 사진 



두번째 - 세르쥬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갱스부르, 갱단 보스는 아니다

프랑스의 천재 대중음악가, 배우이자 연출가이며 버킨의 영원한 남자인 갱스부르 사진을 보면 코가 크고 휘어진 전형적인 유대인이다. 러시아출신인 갱스부르의 부모가 러시아혁명 시기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본명은 뤼시앵 긴스버그(Lucien Ginsburg)이다. 

세르게이(Sergei)에서 세르쥬를 차용하였고 영국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에서 갱스부르를 차용했는데 클래식한 이미지의 영어 게이즈버러가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갱스부르가 되었다고 한다. 


평범할 수 없는 갱스부르는 영화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샹송에 대중음악을 접목하여 프랑스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이다. 그는 우리나라와는 멍멍탕으로 악연인 프랑스 여배우겸 가수인 브릿짓 바르도의 연인이었고 그녀를 위하여 많은 노래를 만들어 주었으나 외설적인 가사에 대한 악영향을 두려워한 브릿짓 바르도가 그 유명한 노래인 ‘Je t’aime moi non plus’의 취입을 거절하자 결별하게 되었다



                                        ▲ 브리짓 바르도와 갱스부르 




                                        ▲ 브리짓 바르도와 갱스부르 


예술과 사랑은 열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영화 'Slogan'에서 그녀를 만나 세르쥬는 그녀에게서 음악적재능과 매력을 발견했다. 즉 당시 영화계에 활약하는 여배우들은 볼륨이 있는 글래머스타일이었으나 제이 버킨은 깡마른 체형이어서 패셔니스타일수는 있어도 스타여배우로 활약이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제인의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알아차린 세르쥬는 그녀에게 샹송을 부를 것을 권했으며 그녀를 위하여 바르도가 포기한 노래를 주었고 갸냘프고 불안한 음색의 제인 버킨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며 대스타가 된 것이다. 결국 샹송계의 플레이보이인 갱스부르의 구애와 예술적 결합으로 두 사람은 (비공식)부부가 되었다.







                                        ▲ 제인버킨, 갱스부르, 큰 딸 케이트, 샤를로뜨 (1977) 


불어를 모르니 뜻은 이해되지 않지만 노래를 들어보면 신음소리도 나오고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면서 중독성이 있다. 두 사람은 예술적 동반자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제인버킨이 갱스부르를 만난 것은 분명히 행운이었다. 

갱스부르가 있었기에 영국인이어서 불어발음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갱스부르의 명곡을 부르는 샹송가수로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퇴물이 되어버린 브릿짓 바르도, 그리고 70을 앞둔 나이에도 세르쥬 갱스부르의 이름을 걸고 월드투어를 하고 있는 명가수 버킨,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 

그녀의 재능을 음악과 영화의 영역에서 꽃피워준 갱스부르는 잦은 기행과 알콜의존으로 재인 버킨과 갈등을 겪다가 82년 그녀와 헤어졌지만 83년 제인에게 신곡을 주며 음악적 재결합을 하였다. 당시의 명반이 브람스의 3번 교향곡 3악장을 편곡한 Baby Alone In Babylon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영국인인 제인 버킨이 프렌치 팝(샹송)을 대표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알콜중독과 심장병을 앓고 있던 갱스부르는 결국 심장마비로 91년 사망했다. 


마지막이다 - 쟈크 드와이옹(Jacques Doillon)


영화감독인 쟈크 드와이옹(Jacques Doillon)은 버킨의 세번째 남자이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하기도 하였던 쟈크 드와이옹은 우리나라도 보면 이창동 감독 같은 사람인 것 같다. 그들은 1982년 루 드와이옹(Lou Doillon)을 낳았다. 루는 패션디자이너, 모델, 패셔니스타, 배우, 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루 드와이옹(Lou Doillon)





월드투어 


제인버킨은 라이브공연에 주력하여 월드투어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004년, 2012년, 그리고 2013년 4월 공연까지 3번 내한 공연을 하였고, 공연관람기를 보면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근사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뷰티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아름답다.




샤를로뜨 갱스부르(Charlotte Gainbourg) 


제인 버킨과 갱스부르 사이에 낳은 딸이 2006년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사를로뜨 갱스부르이다. 샤를로뜨는 불편한 아빠의 외모와 엄마의 우월한 몸매를 이어받는데, 자신만의 개성있는 외모로 승화시키고 자신감 있는 패션에 대한 감각으로 영화뿐만 아닌 패션계에서도 탑클라스의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 패셔니스타로 활동하고 있다. 부모의 명성에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쌓아가는 이 배우 역시 아름답다. 











버킨백 


일년에 100개 정도 생산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버킨백은 1984년 에르메스의 회장이었던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가 비행기에서 동석하게 된 제인 버킨의 가방안에 자신과 샤를로트의 양육을 위한 물건이 엉망진창으로 넣어져 있는 것을 보고 포켓이 부착되고 많은 물건을 정리하여 넣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기로 제안하여 탄생한 가방이라고 한다. 지금은 켈리백과 함께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백으로서 베컴의 부인인 빅토리아는 100개가 넘는 가방을 가지고 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인 버킨은 최근 인터뷰에서 마지막 가지고 있던 버킨백은 도난을 당하고 더이상은 버킨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조달청은 조직력


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에서는 2013년 사업의 일환으로 대전청사에 입주한 7개청(직원들을 대표하는 조직이 없는 병무청은 불참)이 참여하는 청대항 체육행사를 개최하였다. 남녀 모두 참가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축구와 피구 2종목을 토나멘트 방식으로 일과후 경기를 하고 있다. 


조달청은 여자종목인 피구에서 1차예선을 통과하였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통계청을 상대하여 대전지방조달청 여직원(장동미, 이민원 등등)들의 무서운 실력으로 2 : 1로 신승하였다. 

통계청에서는 전직 핸드볼국가대표 출신 직원이 불참한게 가장 큰 패인이었다고 아쉬워 했는데, 승부에는 항상 적극성을 가지고 참여하는 조달청에게 좋은 결과가 있었다.


4월 15일 축구예선은 조달청 대 산림청의 경기였는데 일과시간 이후에 하는 경기이어서인지 봄날씨가 매섭다. 비가 올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경기는 가능하였다. 

산림청은 축구동호회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조달청 선수들이 시작부터 자신감이 있었다. 최근 젊은 직원들이 많이 축구동호회에 가입하여 전력이 급상승하였다고 하는데, 왕년의 주전들이 보이지 않는다. 산림청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대전청사 잔듸구장은 보수관계로 올해들어 처음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아직 적응이 어렵고 잔듸도 길어서 걱정스럽다. 우리청은 총 25명 선수단을 구성했고 적극적인 참여로 사기가 높다. 



           ▲ 파란색 유니폼이 조달청 선수들이다.


조달청은 젊은 직원위주로 선수 구성을 하였고 개인기보다는 패스위주의 게임을 운영해서 체력적으로 우월해 보인다. 정원철, 정우영, 강승호, 정호형, 김곤, 남유환 이런 젊은 직원들이 젊음을 체력으로 보여준다. 각 청별로 소속직원들의 특성이 있는데 조달청은 예전부터 승부근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 아마도 업무상 업체들에게 많이 시달려서인지 내면이 강하다.


           ▲ 헐크 이완


           ▲ 왼발의 달인 정원철


           ▲ 달려라 정우영


           ▲ 김곤


           ▲ 조달청 지단-관록의 성경수


           ▲ 테크니션 김광환




산림청이 페어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양팀이 부상자 없이 재미있는 경기가 이루어졌고, 산림청의 넉넉한 양보덕인지 조달청이 3 : 0으로 승리했다. 열심히 달려준 산림청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우리청 선수들에게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런데 우리청 주전선수들이 양복차림으로 구경을 하고 있다. 

다음 4강전은 대전청사에서 강팀으로 불리는 특허청과의 경기이다. 대규모 응원단을 구성해서 조달청의 저력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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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서을 박범계의원

 

대전청사공무원연합회(회장 관세청 장준영)의 각 청 노조위원장들이 정부대전청사가 위치한 대저시 서구 둔산동이 포함된 대전서을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박범계님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특허청 김정훈노조위원장이 마련한 이 자리는 대전청사내 산적한 현안들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박범계의원은 과거 판사, 고 노무현대통령의 동지, 그리고 지역구 의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접하기만 하였지만, 짧은 시간의 만남동안 판단의 균형감을 잃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공무원 임용제도에서 일제때부터 내려오는 행정고시제도의 문제점 설명 및 폐지의 필요성에 대한 토론과 공무원 6급이하 직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좋은 의견교환이 있었고, 박의원은 대전청사 공무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을 약속했다.    

 





정부대전청사


1998년 대부분 서울에 위치하였던 행정부 외청들이 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청사에는 관세청, 조달청, 특허청, 산림청, 문화재청, 철도청(철도공사), 병무청, 통계청, 중소기업청이 이주하였고, 조달청도 서울 반포에서의 역사를 접고 대전청사로 이주하였는데, 초기의 불편함은 이제 사라지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대전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높다.

 

대전은 광역시 승격 후 별다른 변화의 흐름이 없었고 외부 변화에 대한 반응이 느린 보수성이 강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말 둔산지역 개발이 시작되면서 구도심에서 둔산지역으로 대전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시대 충남도청의 이전, 대전역 설립이래 가장 큰 대전의 변화인 대전청사의 이전은 분명 대전시 역사의 획기적인 터닝포인트이다. 대전으로의 인구 유입이나 둔산동의 지엽적인 성장외에도 문화적, 경제적 성장동력은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박범계의원은 영동출신이고 어머니는 옥천이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옥천 출신이신데 옥천, 영동, 심천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말고 사람을 위한 좋은 의원으로 기억되고 멋진 다선의원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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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집이 뭐하는 곳이야

대전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소개하면 두부두루치기와 칼국수를 언급한다. 

대선칼국수, 신도칼국수, 공주분식, 상신분식 등등 유명한 칼국수 집들이 참 많았다. 칼국수집들 중에는 두부두루치기도 팔았는데 이 두부두루치기가 대전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대표음식이다. 음식문화가 발달한 지역의 사라들은 고작 두부두루치기야 할 수도 있지만 대전사람들은 매운 두부두루치기를 정말 좋아한다,

대전에는 두부두루치기로 유명한 식당이 많았다. 80년대에 청양식당, 광천식당, 벌집식당, 진로집, 별난집, 진선미 등등의 두부두루치기 전문식당에는 남녀노소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 최고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별난집이다. 대전역 맞은편 중앙로에서 인쇄거리 초입의 한밭식당 옆에 있는 별난집은 허름하고 장소도 협소하여 불편하지만 독특한 맛에 매료된 팬들이 많다.


두부두루치기

대학시절에 충남대 사진동아리 앵글스 선배형들이 데리고 와서 처음 맛본 별난집 두부두루치기는 맛도 있지만 분위기도 좋아서 당시 시대상과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참여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평하고 자신을 반성하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모습들은 눈에 선하다.

별난집은 같은 장소에 있다. 10년 전 쯤에 둔산동에 별난집 간판을 보고 아무생각없이 자연반사로 들어갔는데 짝퉁이었다.

예전 사장님이 계속 나오시지만 요즘은 아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대전역앞을 갈때면 생각나는 별난집 그집에서 두루치기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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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팔권광팔권


장미희라는 이름은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익숙하다. 대부분 멜로물에 출현한 장미희가 쿵푸영화에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에 힘준 모습, 유치한 의상 두가 아프다.  





장미희, 유가휘 주연의 1981년작 쿵후영화 <취팔권광팔권> 이다. 1981년이면 장미희 전성기인데 이런 영화에 출연하다니 실수다. 홍콩과의 합작영화(어쩌면 한국과의 합작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림만 보아도 유치함이 하늘로 치솟는 3류 공장형영화. 아트가 영구가 되었다.

 



Life is

앵글스 친구들

2013. 3. 30. 22:01

앵글스 친구들

2000년 전까지는 필름카메라 시절이었다.  충남대에 입학했던 88년 3월 사진동아리에 가입했고  앵글스라는 동아리 명이 참 좋았다.

그 때 만났던 충남대 사진예술반(앵글스) 88 동기들이 3년만에 모였다.  

25년 시간이 흘렀다. 

환섭이는 15년 만에 본 것 같다. 건축시공기술사로 지금은 세종시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0喜는 벌써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다들 건강히 지내고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으랴..  

여름에 서천에서 전원생활을 하고있는 경애를 찾아서 모임을 하기로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화첩기행

문화적 토양이 척박한 대전에서 활발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가 박석신은 자신의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대전의 원도심(구도심이 어울린다)인 중구 대흥동에 있는 박석신의  화랑 겸 문화공간 '문화공간 파킹'에 다녀왔다. 

화가 박석신은 지역에서 잘 알려진 화가이자 문화기획자 그리고 대흥동 문화거리의 지킴이로서 활동하고 있다. 화가 박석신의 배우자가 친구인 인연으로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꾸준한 활동으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지역방송에서 방송되는 화첩기행에 출연하고 있다.



문화공간 주차

지금은 구도심이지만 대전의 원도심의 대표는 선화동, 은행동, 대흥동을 꼽을 수 있다. 40대 이상의 대전사람들에게 대흥동은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대전의 중심이 중구에 있었던 90년대 중반까지 대전 문화의 중심지는 분명 대흥동이었다. 비록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전의 중심축이 서구 둔산동과 유성구로 옮겨졌고 내게도 생활권이 서구와 유성에 한정되어 대흥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추억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전은 새것보다는 역사가 담겨있는 스토리가 필요한 도시이다. 비록 지금은 문화적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상업과 문화가 동반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공생할 때 대흥동의 생명이 이어질 것이고 대전이 부족한 문화자산의 젖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역사깊은 대전여중 앞에 있는 문화공간 파킹은 80년대 유명했던 대전의 세시봉 '팔로미노'가 있던 건물 주차공간을 개조한 자리에 있다. 지금은 1층에 로디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고 있는 이 건물이 '80년대 대전의 아마추어 명가수 신승훈이 통기타를 치며 희야, 라밤바를 열창하던 곳이고 촛불잔치를 부른 이재성이 노래를 했었던 팔로미노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컨트리가수 이정명씨가 운영했던 대전의 명소 '팔로미노'에서 많은 가수들이 탄생했는데 당시 신승훈의 인기는 대단하여서 대전시내 많은 업소와 학교축제를 휩쓸었는데 전성기 목소리로 신승훈이 부르는 희야에 대전의 젊은이들이 열광했었다.  

지금은 추억의 팔로미노는 이 건물 근처의 대전여중 앞 건물 2층으로 이사했고 일년에 몇차례 가보면 여전하신 가수 이정명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구 팔로미노 건물의 반지하공간을 화가 박석신이 운치있게 개조하여 갤러리 및 크로키 수업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계량기도 작품으로 변신했다.


화가 박석신

화가 박석신은 1997년에 처음 보았다.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했는데 오래되어서 기억이 멀다. 

그리고 친구 기라를 문병갔을때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화첩기행 사회자인 그를 보면서 그 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고, 화가의 부인이자 친구인 기라와의 인연으로 그의 작품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림세계가 남다르다. 


             ▲ 박석신 화가의 테라코타가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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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회(토요일 인생을 즐기는 모임)

박홍주 여사의 50하고도 몇 번째 생일이다. 서로의 생일을 열심히 축하해주는 토인회 전통에 따라 인천에서 인하대 이동원교수님이 내려오셨고 기타 토인회식구들하고 광섭씨 부부가 옥천 대청댐이 보이는 장계리의 뿌리깊은 나무에서 모였다.

지금도 토요일은 항상 가슴이 설레인다. 오전 수업이 있던 예전 학교에서도 토요일이 주는 편안함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대흥동에서 친구들고 어울리던 토요일 오후의 기억을 잊기는 힘들것 같다. 

오랜만에 옥천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을 달렸다. 유성에서 옥천 ic까지는 약 20분 소요된다. 5분을 더 가면 금강유원지에 갈 수 도 있다. 경부고속도로 최고의 난공사였다는 옥천터널 옆에는 경부고속도로 당시에 순직한 분들의 위령탑이 있다.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 단기간 내에 고속도로를 만든 분들 이시다. 잊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추억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정겹다.



아직은 푸르름이 부족하다. ‘뿌리깊은 나무’ 레스토랑 입구에서 전원주택을 소개하는 책에서 보았던 장계리 와이어패널 주택이 보인다. 독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몇년전에 부모님 집을 지으면서 참고하려고 유심히 보았었는데 건축비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 집처럼 수려한 전경을 가진 장소를 찾는 것이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숙제이다.



'뿌리깊은 나무'라고 하는 잡지가 있었다. 이 상호명도 잡지에서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는데 하여간 옥천의 뿌리깊은 나무는 전원 레스토랑이고 1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금강변 장계리는 대청댐 수몰전까지는 금강이 흐르는 유원지로서 옥천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잔자갈과 금빛 모래가 있던 장계리 금강변에서 여름이면 옥천 보은 사람들이 강수욕을 하곤 했던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가족들이 여기에서 물놀이 했었는데 그 날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강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레스토랑과 커피숍의 분리되어 있다. 입구 오른편에 커피숍이 보이는데 관리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초록이 감싸주면 운치가 있겠지만 짜임새 있는 풍경은 아니다. 2년 정도 계획적으로 관리해주면 색깔있는 장소로 변할 수 있는데, 사랑이 필요하다.


꽃이 피었다. 봄이 된 것을 잊고 있었다. 계절은 변하고 또 변하는데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이 수레는 파스텔톤으로 나무에 색을 입혔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올드한 느낌의 건물이다. 각을 많이 잡아준 유럽 산속 건물같고 내부는 루바로 장식했다. 실내인테리어는  일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전원레스토랑에 부담없이 어울린다.

보은 집을 지으면서 알게된 것은 지붕 경사도의 중요성이다. 우리나라 집들의 지붕경사는 뒷 배경에 보이는 산의 경사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눈에 부담이 적다. 알프스의 집들을 연상해보면 빼쪽한 지붕이다. 왠지 멋있어 보이는 그림같은 집이지만 조금만 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다. 알프스는 엄청난 적설량에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경사를 높여서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그럴 우려가 없으므로 20~30도 정도의 수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당연희 수평이 수직보다는 안정적인 구조이고 시각적으로도 편안하다. 



스테이크로 점심식사를 하고, 생일케잌은 이곳에서 준비한 치즈케잌으로 축하를 해드렸다. 오늘 식사 계산은 부군이신 최박사님이 하시고..


저녁에는 도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가볍게 물오른 이희정여사의 핸드드립커피를 대접했다. 시작은 커피였으나 와인, 코냑, 발렌타인까지 동원되어 늘 그러하듯이 12시까지 난상토론장이 되었다. 사이좋은 두 분은 시인 이이체의 부모님이시다. 내 생일선물로 정경화 LP를 보내셨는데 아직 LP세팅 실력이 부족하여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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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달청에 근무한 기간은 약 12년 이다. 선배들에 비하여 미천한 근무경력이지만 12년 동안 11명의 청장이 있었고 전원 기획재정부 등 외부 기관 출신이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의 경험과 새로운 시각이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되기도 하지만 평균 1년 정도의 재임기간내에 이룰 수 있는 현안들은 많지 않다. 

결국 취임식과 업무보고 그리고 우리 청 설립의 본질을 벗어난 대외용 사업에 치중하는 문제들이 반복되었고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현 정권 출범 후 처음 이루어진 중앙부처 외청인사에서 조달청은 1997년이후 16년만에 내부에서 승진한 수장을 맞게 되었다.

신임 민형종 청장님은 차장재직시절 직장협의회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조달맨으로서 진정성을 가지시고 항상  부하직원이자 후배들에게 베푸시는 모습에 다들 고마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차장 퇴임하실 때 드리려고 직협에서 감사패를 준비했는데 내부 승진을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연기해 놓았다. 청장직을 아름답게 마치실 때 다시 드려야 겠다

외청을 각 부처의 인사적체 해결 도구로 이용하는 낙하산 인사를 막아보자고 대전청서공무원연합의 각 청 노조위원장하고 직협회장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행동을 하였는데 내부승진은 우리 청과 특허청만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신임 특허청장님은 국장시절 지경부에서 오셨다고 하니 실질적인 내부승진은 우리 청이 유일하다. 다른 청 노조위원장님들이 축하한다고 하시는데 미안한 마음 가득이다.

전문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요구와 조달청 업무의 특성상 국익에 도움이 되는 조달행정을 이끌 수 있는 조달 전문가의 발탁은 필연적이었는데 지난 두 정권에서 이루어 지지 않았던 내부승진이 이번 정부에서 이루어 졌다. 지금까지 청장들의 잦은 외부 임용으로 조직의 안정성에 문제가 많았으며 장기적인 내실보다는 한 건위주의의 보여주기 행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공공조달을 통한 효율적인 재정집행을 위하여 조달 업무에 정통한 내부인사의 발탁은 전문성 강화와 나라를 위하여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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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청암 송건호 선생

2013. 3. 10. 20:20


충청도 옥천 그리고 한겨레신문

백범 김구선생이 우리나라에 끼친 가장 큰 사회적 공헌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이비)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질문받았을 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정답인 '김구선생을 존경합니다' 라는 답을 주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근대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할만한 인물을 마땅히 떠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지식인이라고 알아왔던 사람들의 변절, 그리고 젊은 날의 용기와 기백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었던 노명망가들이 사회에서 버려진다는 두려움과 노욕이 겹쳐 판단력을 상실한 기행적인 퇴행이 거듭되면서 아름다운 결말 이루기 쉽지 않은 사회가 되었고, 지식전달의 매체가 다양화 되면서 얼치기 지식인들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게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갑자기 질문한다면 누구라고 답을 할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난 분이 한겨례신문 사장이셨던 송건호 선생이었다. 청암 송건호 선생이 파킨슨씨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움과 함께 나와 같은 옥천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동향이면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시던 당당한 모습에서 느끼던 뿌듯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청암 송건호

대전은 과거 대전천을 경계로 하여 중구와 동구로 나뉘어 있었다. 대덕군에 속해있던 산내, 구도리, 흑석리, 유성출장소, 신탄 등등 추억의 이름들은 대전이 광역화되면서 대전에 흡수되어 사라진 지명이 되었다. 한편 은진은 논산시에 있다. 은진미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연상되며, 대전 그리고 대덕군에는 그래서인지 은진 송씨들이 많이 살았고, 같은 반 친구들 중에도 송씨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옥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중에 육씨들이 비교적 많았는데 이들이 옥천육씨라는 것은 성장해서 알았다. 과거 대전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면 꼭 출마하시던 친구 외삼촌인 송oo님도 은진송씨 문중표에 많은 기대를 하셔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선거에는 단골 출마를 하셨는데 항상 아쉽게 결과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었다고 들었다.

예상과 같이 송건호 선생은 본관이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대덕군에 살았던 은진송씨인것을 보면 같은 혈족일 것이다. 대덕 동면에 사시던 증조부께서 옥천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하였고,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증약)에서 부 송채찬과 모친 박재호 사이에 3남 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약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고향 옥천에서 해방을 맞은 송건호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자유언론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픽션을 잘 쓰는 작가급 기자들이 판을치는 요즘의 한국언론에서 자유언론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6,70년대 당시에는 송건호 같은 기백이 넘치는 기자들이 있을 때 였다. 송건호는 대학재학시절부터 대한통신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래 19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과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5년 편집국장, 1969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74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신체제는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하였고(백지광고사태),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송건호의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과 사회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씨알의소리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신군부에 의하여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풀려났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 말을 발행하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왜곡없는 날카로운 보도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독재정권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이른바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겨레신문 창간과 죽음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988년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느낀 민주인사,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기자들,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이 앞장서 새로운 신문의 창간 준비 작업에 나섰고, 1987년 10월 30일 3,344명이 창간발간인 대회를 열어 한겨레 창간을 공표하였으며, 1988년 2만여 명이 출연한 50억 원을 국민주로 하여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자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선을 거쳐 1991~93년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폭행 등의  고문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씨병이 발병하여 7년간 투병생활 후 별세하였다. 투병하는 모습을 방송해서 본적이 있었는데 기백이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병약한 노인이 고통받고 있었다. 사망 후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위패는 고향인 충북 옥천 군북면 감노리에 있는 보륜사에 있다.


한겨레는 어디로

1988년 당시 정론지를 표방한 한겨례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경향신문과 함께 충성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이면서 현재 조중동에 맞서는 4대 신문으로 자리잡았으나 규모의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은 아쉬움이다. 지금은 초기의 신문사 설립방향을 잃은 것이 아닐 까 하는 우려를 많이 받고 있는데, 부디 송건호 선생의 유지하였던 정론관을 잃지 말고 좌우의 날개 짓으로 날아가는 새의 왼날개가 되어 균형을 잡아 주기를 기대한다. 



Life is

범진이 졸업식

2013. 2. 15. 13:57

졸업식

아들 범진이 초등교육 졸업식이다. 직장에는 연가를 내고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모여서 졸업식장으로 향했다. 

대전에서 5개구에 살아 보았다. 노은동, 반석동은 주거환경이 좋고 삶의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범진이가 다닌 반석초등학교는 아이들의 만족도도 높고 주위의 평이 좋다. 직장 동료들이 서구 둔산동에 있는 학교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찌그러진 아파트에 눌러 안아 있다. 

마을축제 같은 졸업식을 내심 기대해 보았는데, 진행이 서투르고 경직되어서 졸업식의 광경이 서늘했다. 사회자는 후덕해보이시는 인상의 여자분이었는데 딱딱함과 서늘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교육청에서 배포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졸업식을 진행하는 것 같았는데 개성도 없고 학교별로 졸업식이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을 것 같다. 획일화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육청인가 보다. 아이들의 동영상 인사, 형식적인 상장전달 등 감동은 전혀 없었다. 

졸업식의 압권은 동영상으로 등장한 김신호대전교육감이었는데, 피곤한 얼굴로 등장하여 의례적인 주어동사목적어를 나열하여 아이들에게 다가가는데 제대로 듣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과는 50년 차이가 날텐데 연세 드신분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교육감 양복이 목깃은 붕 떠있고 양복은 몸과 옷이 별도로 움직이는 유체이탈이었다. 

졸업식 진행은 수준이하였지만 졸업식을 대하는 아이들이 행동이 자연스럽다. 부러운 세대이자 불쌍한 세대이지만 우리의 미래이다. 그런데 아이들 장래희망(꿈)의 약 80%가 의사라고 써 있는데, 이런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범진이가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게 기여했으면 한다. 졸업 축하한다.



▲ 교장선생님이 졸업장을 주시고 있으신데 아이들이어서 악수는 없고 인사로 대신한다.


▲ 학부모총회상

▲ 90도로 인사한다.

▲ 지난 4년간 행복하게 살았던 반석동 5단지아파트, 건물이 영산 계룡산 자락을 가리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좋은 위치와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 반석초등학교


▲ 반석동 커피로드 초입

Life is

사진가 최민식

2013. 2. 13. 13:56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 사진가 최민식 선생이 작고하셨다는 기사가 나왔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213000134

최민식 선생은 인간을 촬영했다. 흔히 다큐멘타리 사진으로 알려진 그의 사진 속에서는 화려함이나 자연미학이 아닌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넝마를 걸친 아이, 시장아지매, 속옷차림의 노동자, 발가벗은 아이들의 웃음을 그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라 불렸고 한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던 사진가이고, 사회에서 소외된 우리 이웃들의 참 모습을 사랑한 사진작가가 바로 최민식이다. 50년이 넘도록 사진작업을 한 그는 "은퇴할 나이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흑백사진에 관심이 많던 80년대 후반에 이분 작품을 많이 참고? 했었다. 예전에 방송에 출연하셔서 어려운시절 왜관에 있는 수도원의 도움을 받으셨다고 한다. 생전에 한번 뵙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인생을 누빈 사람인데 이분이 그런분이겠다.

Bravo Goo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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