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이관과 오삼계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인 중국 허베이성 산하이관(산해관)은 산과 바다가 모여있는 곳이어서 산해관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동쪽 끝이며 험준한 지형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며 베이징과 가까운 군사적 중요성때문에 명나라시절 만족이 세운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오삼계가 지휘하는 명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함락당하자 오삼계는 자신이 방어하던 주적 청나라와 연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토벌한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적장이 적을 섬멸하는 꽃놀이 패를 가지고 베이징에 무혈입성한 만주족 장군들은 베이징 주민들을 전부 몰살하고 심양에 수도를 삼으려고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오삼계의 배신이 명나라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산해관은 베이징과 가깝다. 가깝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국토종단보다 먼 거리이지만 베이징에서만 둘러보는 만리장성이 아니고 만리장성의 시작점이자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이곳을 보는 것도 중국여행의 백미가 될 듯 하다. 일단 올해 방문을 계획해 보기로 하고 탕산대지진을 알아보자. 



탕산대지진


인하대학교에 유학을 온 '상'씨 성의 중국학생이 있다. 허베이성 산해관이 근처가 집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탕산대지진에 몇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 물어보았더니 표정이 영 반가와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작년에 탕산대지진을 소재로 한 '대지진'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었지만 재난을 영웅담으로 미화시켜 극복하는 헐리우드식 상투적인 스토리가 남아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당시의 지진피해의 처절함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가지고 있던 지진트라우마는 넘어선 것 같다. 

나중에 중국학생  '상'군이 자신의 조부도 그 때 작고하셨다고 말을 해준다. 이런 실수다. 


베이징은 허베이성에 있다. 베이징과 인접해 있는 항구도시가 천진이고 베이징과 천진 윗쪽에 탕산시가 있다. 1976년 7월 28일 03시 42분 54초, 중국 허베이성하(河北省) 탕산(唐山) 펑난(丰南)일대에 강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관동대지진은 점심때 발생하여 불이 많이 났고 폭동으로 발전하여 조선인 학살을 포함하여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탕산대지진은 새벽에 그것도 광산 일대와 인구 밀집지역에 지진이 집중되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도시를 벗어난 외곽에는 붉은벽돌로 대충지은 집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뼈대도 없이 벽돌로만 지어진 이런 허술한 집들이 무너지지 않는게 신기해 보일 정도인데, 70년대 당시 이런 집들이 대부분이었던 인구 100만명의 도시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다. 지진으로 사망자만 24만명(65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이 넘었으며, 100만명 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가 1976년이다. 이 해에 중국에서는 대사건이 많았다. 주은래 총리 사망, 주덕 원수 사망, 모택동주석 사망, 4인방의 체포와 문화대혁명의 종말 등등 이다. 76년에 탕산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모택동(毛泽东)은 피해관련 보고서를 여러번 세심하게 검토하는등 이재민 구호작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며,  8월 4일 당산(唐山)에 도착한 구호인력은 본격적인 재해 구호 활동을 시작했고, 지진 구호 본부를 설립, 10만명이 넘는 인민해방군, 2만명의 의료진과 지원인력등을 재해지역에 투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았던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재난극복 영웅담이다. 

사망 2달전 모택동은 판단력에 문제가 많았고 중국인의 아버지 총리 주은래는 사망하였으며 정국은 사인방의 폐해가 극심했을 때이다. 대지진 후 폭동이 발생한 일본과는 다르게 탕산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지 않고 구조작업이 이루어 졌다. 제대로 구호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인력에 의존한 게 현실인데 부실한 정치와 사회적 안전망 부족에 항상 애꿎은 인민들이 피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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