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청암 송건호 선생

2013. 3. 10. 20:20


충청도 옥천 그리고 한겨레신문

백범 김구선생이 우리나라에 끼친 가장 큰 사회적 공헌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이비)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질문받았을 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정답인 '김구선생을 존경합니다' 라는 답을 주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근대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할만한 인물을 마땅히 떠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지식인이라고 알아왔던 사람들의 변절, 그리고 젊은 날의 용기와 기백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었던 노명망가들이 사회에서 버려진다는 두려움과 노욕이 겹쳐 판단력을 상실한 기행적인 퇴행이 거듭되면서 아름다운 결말 이루기 쉽지 않은 사회가 되었고, 지식전달의 매체가 다양화 되면서 얼치기 지식인들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게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갑자기 질문한다면 누구라고 답을 할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난 분이 한겨례신문 사장이셨던 송건호 선생이었다. 청암 송건호 선생이 파킨슨씨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움과 함께 나와 같은 옥천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동향이면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시던 당당한 모습에서 느끼던 뿌듯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청암 송건호

대전은 과거 대전천을 경계로 하여 중구와 동구로 나뉘어 있었다. 대덕군에 속해있던 산내, 구도리, 흑석리, 유성출장소, 신탄 등등 추억의 이름들은 대전이 광역화되면서 대전에 흡수되어 사라진 지명이 되었다. 한편 은진은 논산시에 있다. 은진미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연상되며, 대전 그리고 대덕군에는 그래서인지 은진 송씨들이 많이 살았고, 같은 반 친구들 중에도 송씨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옥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중에 육씨들이 비교적 많았는데 이들이 옥천육씨라는 것은 성장해서 알았다. 과거 대전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면 꼭 출마하시던 친구 외삼촌인 송oo님도 은진송씨 문중표에 많은 기대를 하셔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선거에는 단골 출마를 하셨는데 항상 아쉽게 결과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었다고 들었다.

예상과 같이 송건호 선생은 본관이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대덕군에 살았던 은진송씨인것을 보면 같은 혈족일 것이다. 대덕 동면에 사시던 증조부께서 옥천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하였고,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증약)에서 부 송채찬과 모친 박재호 사이에 3남 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약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고향 옥천에서 해방을 맞은 송건호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자유언론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픽션을 잘 쓰는 작가급 기자들이 판을치는 요즘의 한국언론에서 자유언론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6,70년대 당시에는 송건호 같은 기백이 넘치는 기자들이 있을 때 였다. 송건호는 대학재학시절부터 대한통신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래 19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과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5년 편집국장, 1969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74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신체제는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의 광고를 중단하였고(백지광고사태),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송건호의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과 사회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씨알의소리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신군부에 의하여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풀려났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 말을 발행하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왜곡없는 날카로운 보도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독재정권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이른바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겨레신문 창간과 죽음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988년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느낀 민주인사,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기자들,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이 앞장서 새로운 신문의 창간 준비 작업에 나섰고, 1987년 10월 30일 3,344명이 창간발간인 대회를 열어 한겨레 창간을 공표하였으며, 1988년 2만여 명이 출연한 50억 원을 국민주로 하여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자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선을 거쳐 1991~93년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폭행 등의  고문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씨병이 발병하여 7년간 투병생활 후 별세하였다. 투병하는 모습을 방송해서 본적이 있었는데 기백이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병약한 노인이 고통받고 있었다. 사망 후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위패는 고향인 충북 옥천 군북면 감노리에 있는 보륜사에 있다.


한겨레는 어디로

1988년 당시 정론지를 표방한 한겨례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경향신문과 함께 충성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이면서 현재 조중동에 맞서는 4대 신문으로 자리잡았으나 규모의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은 아쉬움이다. 지금은 초기의 신문사 설립방향을 잃은 것이 아닐 까 하는 우려를 많이 받고 있는데, 부디 송건호 선생의 유지하였던 정론관을 잃지 말고 좌우의 날개 짓으로 날아가는 새의 왼날개가 되어 균형을 잡아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