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é)


엘가의 첼로협주곡(Elgar Cello Concerto)하면 떠오르는 영국의 여류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지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Jacqueline du Pré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집안은 영국령 채널제도(프랑스 북서해안 인근의 영국령 제도) 출신이다. 프랑스식 이름이어서 프랑스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채널제도를 지도로 보니 이름의 기원이 아마도 프랑스에 인접한 지리적 요인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노교사였고 재클린도 피아노와 음악적 기초를 모친으로 부터 배웠으나 재클린이 4살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 중 첼로소리를 가려 듣고(one of those) 첼로를 가지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클린 뒤 프레의 부모는 재클린이 5살이 되었을 때 런던첼로스쿨(London Cello School)로 보냈고, 2년 뒤에는 길드홀 음악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공부를 하게 했다. 재클린은 1955년 부터 윌리엄 플리스에게 사사했으며 16세에 위그모어 홀(Wigmore Hall)에서 첼로연주자로 공식 데뷔하였다. 

그녀는 1960년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기도 하고, 1962년에는 프랑스에서 폴 토르틀리(Paul Tortelier)에게 그리고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첼로계의 대마왕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첼로의 대가들에게 학습하는 좋은 기회였으나 역시 그녀의 최고 스승은 플린스이다. 


                                ▲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와 재클린



영국은 유럽의 중심에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의 자존감은 낮은 곳이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은 독일 이민자이고 그 이후로 연상되는 음악가는 마땅치 않다. 아마도 비틀즈 이전까지 음악의 변방이었기에 엘가는 소중한 영국 음악가로 대접받는다. 이런 엘가를 세상 밖으로 들어올린 사람은 역시 영국의 재클린이라고 할 수 있다. 엘가의 첼로협주곡 연주로 재클린은 주목을 받았다. 

존 바르톨리 경(Sir John Barbirolli)의 연주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65년 레코딩이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쉽게 드어온 곡은 아마도 이때의 녹음일 것이다. 또한 그녀는 1965년 카네기홀 무대에 데뷔하여 역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아날 도라티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미국인들에게 첼로가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연주경력은 10여년 정도로서 매우 짧지만 대가로서 인정받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재클린 & 바렌보임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클래식 음악계의 유명한 스토리이다. 스타첼로연주자이자 클래식음악계의 샛별로 자리잡은 재클린은 1966년 다니엘 바렌보(Daniel Barenboim)을 만났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바렌보임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고 있는 신성이었다. 누가 먼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재클린은 그와의 결혼을 결정하였고 키작은 유대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의 물리치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결혼을 하였다.

두사람이 만난지 6개월만에 올린 결혼식은 제3차 중동전쟁중이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치뤄졌다. 

전쟁중의 천재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의 결혼은 결국 불행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대단한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이때 결혼식 증인과 결혼기념연주의 지휘를 비호감 지휘자 주빈 메타가 맡았다고 한다.

국민요정이 강행한 유대인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차가움에 대한 탈출이고, 음악적 동지에게 느끼는 사랑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재클린은 부모와 관계가 소원하였고 형제들과의 불화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상황들이 결혼의 충분한 원인이 었을수 있다. 연주활동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농사 짇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는 재클린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결혼을 하면 동반자에게 받는 편안함에 마음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들의 결혼은 음악적 정서를 깊고 섬세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풍부한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피아노 바렌보임, 첼로 재클린, 바이올린 이츠하크 펄만, 비올라 핀커스 쥬커만, 제2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 쥬빈 메타(지휘자 쥬빈 메타와 동일인) 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The Trout'와 같은 많은 실내악곡을 연주하였다. 

위 연주는 동영상으로 쉽게 볼 수 있는데 최고수들의 젊은 시절 모습과 함께 동영상중에 조명해주는 바렌보임의 결혼반지와 재클린의 드레스는 이들이 부부연주자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재클린은 바렌보임과의 협주를 통해서 뛰어난 연주활동을 하였고 훌륭한 레코딩을 남겼지만 한정된 레파토리로 인하여 현대 클래식 음악에 큰 영향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녀의 팬들은 그정도 수준의 재클린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행과 죽음


1971년부터 재클린은 팔의 힘이 빠지고 손가락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연주횟수가 줄었고 그녀의 마지막 연주는  1973년에 있었다. 그녀의 병명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중추신경계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이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도 다발성경화증이었는데 그녀는 비록 뒤틀린 몸이지만 살아나서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재클린은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몸에 마비가 더해가는 불행이 온 것이다. 그녀는 연주활동을 포기한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생활을 하였고 팔과 다리가 굳어지며 온 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다가 1987년 10월 19일 42세로 사망했다. 

역시 신은 잔인한 분이시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나쁜 사람일까


다니엘 바렌보임의 '무언가'를 들어보면 꼭 지휘자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주활동으로 바쁜 그는 예전 가수 이0이나 권투선수 누구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병든 부인을 버린 나쁜 인간의 반열에 올라있다. 

병든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하고 재클린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하는 야사가 정설로 변하여 대부분의 기록들은 바렌보임을의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재클린에 대한 관계에서 비난이 앞선다.

바렌보임은  유대인이지만 반유대주의자로서 괴테의 작품을 따 시작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 갈등지역의 연주자들을 모아서 창단했으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콘서트를 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임진각에서도 공연을 갖은 기록이 있다.

재클린이 투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때 바렌보임이 냉혈한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렌보임이 미국 오케스트라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유럽 파리에 남아서 지휘활동을 한 있던 이유가 런던에 있는 재클린의 병간호때문 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유대계 러시아 바이올리스트 기돈 크래머의 전 부인이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의 만남은 바렌보임을 천하의 바람둥이로 몰아 붙이는 좋은 소재가 되었지만 여성편력이 경력이 되는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한다면 그가 그만한 비난의 대상인지는 찬성하지 않는다. 


                  ▲ 다니엘 바렌보임과  엘레나 바쉬키로바 


음악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바렌보임에게 엘레나와의 동거생활과 두 아이의 탄생은 비난하기보다는 음악을 위한 차선이었다고 억지 변명을 해주고 싶다. 왠지 그가 밉지 않다. 







                              ▲ 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하는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묘비(런던의 유대인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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