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들어본 현이와 덕이 음반이다. 세련지는 않았지만 장덕만의 색깔이 있다. 한번은 보고 싶었는데. 


 천재는 왜 불행할까

장덕과 장현 남매, 현이와 덕이로 기억되는 한국의 카펜터즈는 90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 잊혀져가던 이들 남매는 최근 장덕이 작곡하였던 주옥같은 노래들이 되살아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내 기억속에서도 다시 떠올려졌다.

남매의 부친은 개성고보와 연세대를 나온 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고 장규상, 모친은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나온 재미 서양화가 이숙희 여사라고 한다. 예술적이 관점으로 보면 클래식음악가와 서양화가의 만남은 이상적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서양화가가 추구하는 삶과 철학적인 남자의 삶은 달랐던지, 남매의 부모는 장덕이 9살때 이혼을 하였고 남매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다. 철학과 종교가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긍정적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면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더구나 종교와 이상에만 존재하는 삶에 가족들이 함께하기는 어렵고 정상적인 가족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구도자로서 실천적 철학을 꿈꾼 ‘뿐철학자’ 장규상에게 가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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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 젊은날의 이숙희, 말년의 장규상



뿐철학

장덕과 장현은 부모로 부터 이어진 예술적 재능과 함께 장현은 바이올린을 장덕은 피아노를 공부하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고, 부모의 갈등과 부친의 기행 등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가 이들 남매의 조숙함과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는 삶을 원했던 모친에 비하여 부친 장규상의 기인적 삶과 철학에의 심취는 분명 가정불화를 낳았다. 수시로 집을 비우거나 양로원, 고아원에 대한 무료공연 그리고 지인의 빚보증 등 지금으로 보면 빵점아빠의 모든 것을 갖춘 부친에 대한 갈등이 있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이 흥인국민학교 2학년때 이혼을 하게 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두 남매는 같은 집에 살지 못하고 각각 고모와 지인의 집에 맡겨진다. 지금은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덜하지만 당시에 감수성이 예민한 남매가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인생의 짐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규상을 검색해보면 ‘뿐철학’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볼 수 있고, 제자가 수천 명이라고도 나오는데 자기 성찰과는 반대로 현실 도피적인 철학이 남겨 준 현실은 10대 남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하겠다. ‘뿐철학자’ 장규상을 따라 결국 남매는 도봉산의 한 사찰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학교를 가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으며 지냈다고 하는 이 기간들을 생각 해 보면, 이 후 수차례 일어나는 장덕의 자살기도는 그녀의 극도의 센티멘털한 감수성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도 있는 삶의 괘적이다.


한국의 카펜터즈

1974년 장덕은 서울사대부중에 다니던 중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남매가 겪는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부친과의 관계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있던 이숙희 여사는 한국의 카펜터즈 듀엣을 결성하게 해 준다. 1975년 장현과 장덕 남매는 드래곤랫츠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 데뷔하였고, 당시부터 장덕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는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었다.

장덕은 안양예고를 졸업했다. 1977년 입학한 장덕은 그 유명한 소녀와 가로등을 작사작곡하여 진미령의 노래로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출전하였다. 당시는 국제가요제가 유행하여 각 국에서 경쟁적으로 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장덕은 3년 연속으로 입선하는 재기를 보여주었다.

장덕과 오빠 장현은 훌륭한 음악듀오였지만 분명 음악적 재능은 장덕이 앞섰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남매는 당시의 여건상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없었고 음악적 재능과 함께 귀여운 외모였던 장덕은 팬들에게 납치를 당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결국 장덕은 솔로로 독립하였고 장현은 락그룹사운드 ‘현이와 거룩한 성’을 결성하여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재혼으로 받은 충격과 부친과의 갈등 그리고 가출 소동 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던 장덕은 결혼한 오빠 장현의 집에서 독립하였는데 혼자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위기였고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였다.


미국생활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던 장덕의 미국생활은 3년정도 였다. 딸의 불안한 생활과 자살기도를 걱정하던 이숙희여사가 장덕을 설득하여 1979년 10월 LA로 불러들인다. '나성에 가면'의 나성에서 당시 비주류였던 한국사람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백인들이 기피하는 자영업이었다. 장덕이 미국에서 어떤 일을 했을 까 궁금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사회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탈출구이기도 했다. 안양예고를 졸업한 장덕은 LA의 델몬트칼리지 음악과에 입학하였다가 테네시대학에 편입하여 음악을 전공하였다. 장덕은 짧은 결혼생활의 기록이 있는데  1981년 컨트리음악의 성지인 내쉬빌에서 교회오빠인 교포와 결혼을 하였다. 그 후 리패밀리라는 가족그룹을 결성하여 음악활동(교회나 교포사회 공연)을 하였으나 1983년 가을 이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성장기의 아픈 기억은 치유가 힘든가 보다. 내가 겪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도 성장기의 상처가 남긴 치유할 수 없는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방송에서 보았던 80년대 장덕의 쾌활함이 있었다. 뒤에 숨겨진 아픔도 많았겠지만 그런 장덕이 좋았다.

장덕은 귀국 후 너무 많이 변화된 대중음악계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졌으나 이번에도 오빠의 도움이 있었다. 장덕의 재기를 위하여 장현은 1985년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였고 타고난 재능과 보조개와 단발머리로 기억되는 상큼한 외모의 장덕은 "나너 좋아해 너나 좋아해" "이제 안녕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장덕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녀가수로서 지금은 원로가수급인 이선희, 정수라와 더불어 '바지 삼총사'로 불렸다. 장덕은 또한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김진아의 '묻지 말아요' 등 히트곡을 양산하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불행한 남매

장현은 장덕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진정으로 장덕을 아끼고 평생을 보호자로서 자기 희생을 한 오빠이다. 그는 장덕을 위하여 밤무대 출연을 정리하고 장덕,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을 소속가수로 하는 코아기획이라는 음반매니지먼트회사를 운영했다.

장현은 그 후 혀가 붓고 호흡장애를 겪다가 설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 음악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혀의 일부를 절단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다른 언론에서는 치료를 거부하고 안수기도 등 종교적 완치를 고수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는데, 설암은 대부분 발병증상을 인지하기 어려워서 상당히 악화된 후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오빠의 보호자가 된 장덕은 심각한 불면증을 겪었고, 친구집에서 지내던 장덕은 마포 염리동 진주아파트에서 기관지확장제, 수면제 과다복용 등에 의한 약물중독으로 사망하였고 사망과 같은 해 8월 16일 장현도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96년 봉천동 자책에서 부친 장규상도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덕은 그녀의 재능보다 비극적인 가족사가 먼저 회자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최근 그녀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되면서 주옥같은 명곡들이 부활하고 있다. 장덕은 출중한 능력을 가진 아티스트였지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2% 부족한 음악적 완성도와 아티스트임에도 인기에 연연했던 조급했던 모습들이 장덕의 존재감을 떨어뜨리고 단명하는 불행을 가져왔다.



강원도, 군입대의 추억

89년 12월에 우편으로 보내 온  군입대영장에는 도트프린터로 1990년 2월 6일 102보충대라고 찍혀 있었다. 102보충대는 강원도 춘성군(춘천시)에 있었고, 대전에서 춘천가는 버스편을 몰라서 대전역에서 서울역으로 다시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89~90년도 2012년 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 찬바람이 불던 청량리역에서 흘끔 본 신문에 장덕 요절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1990년 2월 4일 장덕이 죽었다.